10화
“오늘 일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말을 세연이 성큼 이어받았다.
그러자 중첩되듯이 그녀의 얼굴에 머무른 시선이 마지막으로 눈동자에 닿았다.
눈을 감지 못하게 전신을 압박하는 눈빛은 고요했고, 그 눈빛에 내뱉는 숨결이 떨리고 있었다.
쭉 뻗은 두 다리가 금방 바닥에 안착했다.
넓고 긴 소파를 차지하던 상체가 반듯해지고, 그사이에 도하는 헝클어진 이맛머리까지 가볍게 정리했다.
앞머리가 살짝 내려가 있어 흐트러져 보이지만 그만큼 이곳이 그의 공간임을 인식하게 한다.
“안 물어봅니까.”
올올히 앉아 있는 그가 고개의 각도를 비스듬히 두었다.
“왜 안전 신고를 하면 안 되는지.”
“…….”
“또 왜 병원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지 등등. 물어볼 거야 많지 않습니까.”
“물어봐야 하나요?”
“대개는. 적어도 구해 준 사람의 입장이라면 궁금해하던데.”
그녀 말고 다른 이가 그랬다는 투였다.
그제야 그의 눈빛에 깃든 감정이 읽혔다.
그는 그녀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흥미 위주의 궁금증은 들지 않아요.”
타인이 숨기고자 하는 일을 재미로 들쑤시고 다닐 만큼 그녀는 형편없지 않았다.
“알고는 싶습니까.”
세연은 침묵했지만, 부정할 수 없는 공백에서 답을 찾아낸 도하가 길쭉한 눈꼬리를 유연하게 접었다.
신뢰는 못 해도 그녀의 진심은 믿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가 말했다.
“아까 한 말 기억합니까.”
“네?”
“책임진다고 했던 말.”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묻겠다는 건가.
뭘 요구할지 가늠이 되지 않아 세연은 난처한 신음을 삼켰다.
“잊지 않았으리라고 믿습니다.”
“기억하고 있기는 한데요…….”
“그렇담 다행이고요.”
전혀 다행일 것 같지 않은 미소인데.
‘나 괜찮겠지?’
뭔가 그에게 코가 꿰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세연은 웃지 못하고 하하, 소리만 내뱉었다.
피식 웃은 도하가 손목에 찬 오데마피게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늦었군요. 다음에 차차 말하도록 하죠.”
다음에 말할 날이 있나?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어도 그와 좀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 해야 할 말부터 하죠.”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분위기를 이어 도하가 진중한 감정을 실어 말했다.
“고마워요. 세연 씨 덕분에 심각한 사태로 번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진담이에요.”
인사치레가 아니라는 것쯤은 모를 수가 없었다. 진지한 눈빛, 그리고 단호한 억양에 세연은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내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요.”
“보상 차원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있습니다.”
“말해 보세요.”
“대단한 건 아니고……, 제가 일로 실수하거나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한 번은 봐주세요.”
“어렵지 않은 부탁이군요. 좋습니다.”
미소를 머금은 허락에 세연은 눈매를 곡선으로 그리며 활짝 웃었다.
둥글게 휘어진 눈매를 이은 눈동자에 도하의 몸집이 커다랗게 번진다.
새까만 밤이 그녀를 덮치는 것처럼 그의 그림자가 세연에게 닿았다.
순간 사방이 암전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위로 진 짙은 음영에 도하가 제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깨달은 세연은 그를 얼빠지게 쳐다보았다.
방황하는 눈동자를 놓치지 않은 도하가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오늘 한 말, 전부 기억해 두겠습니다. 그러니 세연 씨도 절대 잊으면 안 돼요.”
발설하지 않겠다는 제 말이 못 미더운 모양.
도하에게 확신을 주고 싶어서 세연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해요!”
“볼썽사나운 모습은 잊어 줬으면 하지만요.”
나직한 웃음기를 품은 말소리를 끝맺은 그가 그녀에게로 팔을 뻗었다.
도하의 팔이 가까워질수록 세연의 가슴은 비명을 지르듯이 맥동하고 있었다.
그때.
“이도하! 괜찮냐! 너……!”
별안간 대표실 문이 확 열리더니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닿을 듯한 팔의 움직임이 멎었다.
방해를 받지 않았다면 그의 손이 자신의 얼굴에 닿았을까. 그리고 어디로 향했을까.
느끼지 말아야 할 아쉬움과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채 세연은 조심성 없이 열린 문을 쳐다보았다.
꽤 준수한 외모의 남성이 그녀와 그를 보고는 문을 닫았다.
다시금 문을 벌컥 소리 나게 연 남자가 가늘게 뜬 눈을 깜빡였다.
“좀 있다가 들어올게.”
“그런 거 아니니까 들어와.”
어색하게 몸을 돌린 남자를 향한 말투가 친한 친구 사이임을 짐작하게 했다.
“유석호입니다. 이도하 대표를 보좌하는 개인 비서죠.”
앉은 자세에서 일어난 세연은 목 인사를 했다.
“정세연입니다. 며칠 전 제작부서에 입사했습니다.”
“제이온 소속 직원이군요. 앞으로 오고 가다 만날 건데 친하게 지내요.”
남자 버전 최유정이다.
인싸의 향기가 나는 석호가 악수를 청해 오자 세연은 웃으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도하의 팔이 겹쳐지려는 두 손을 가로막았다.
“인사할 때가 아니지 않나?”
그의 손가락은 주인을 닮아 큼직하면서도 길쭉했다. 그리고 손톱마저 반듯한 손이 울대뼈가 도드라진 목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악수를 막은 팔을 거둬 자신의 목덜미를 가볍게 쥔 도하를 흘기며 석호가 말했다.
“인사도 못 하냐. 진짜 성격 급하다니까.”
짧은 시간 안에 그의 손을 자세히도 본 세연은 불평이 어린 목소리를 듣고서 순간 팔린 정신을 재빨리 차렸다.
어중간하게 내민 팔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긴 석호가 탈바꿈하듯이 격식을 차렸다.
“엘리베이터 사고가 났다고 들었습니다.”
“네.”
“대표님의 전달 내용이 너무 간결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내가 하지.”
“아놔. 설명 부탁한다!”
도하의 개입에 말이 막힌 석호가 성질을 부리다가 이내 그녀를 의식했다.
“원래는 이렇지 않습니다. 저도 그리고 대표님도요.”
“괜찮아요. 보기 좋은데요.”
친구와 있을 때 그가 이렇구나 싶었다.
색다른 도하의 모습에 세연은 키득 웃었다.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는 내가 걱정돼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죠.”
어랏. 비서에게 알리는 게 아니라, 내게 확인하는 듯한데?
도하를 쳐다본 세연은 확신했다.
‘맞네.’
착각이라고 의심할 수 없도록 그의 시선이 오롯이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길 시에 책임지기로도 했고. 정세연 씨가.”
말허리를 이은 도하가 비서인 석호를 쳐다보면서 그녀의 이름을 끝에 담았다.
“어떻게 된 건지 이해했습니다.”
말을 어길 경우를 대비해 공증인으로 비서를 세우는 건가.
“감사하다는 말은 대표님께서 했을 테고. 알려지면 안 되는 사정이 있어 비밀 엄수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합당한 금액 보상과 그에 따른 계약서 작성이 필요합니다만. 아, 물론 정세연 씨를 못 믿는다는 게 아니라 상황이 언제든 변할 수가 있어서 드리는 말입니다.”
“안 해도 돼.”
“할게요.”
그와 그녀가 동시에 말했다.
믿음을 주고 싶어 한 말인데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잠잠한 눈동자가 깊어지듯이 짙어졌다.
입 안을 바싹 마르게 하는 눈빛이 좀처럼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원체 잘 놀라는 심장이 움츠러들었다.
쳐다볼 때와 달리 그의 시선이 가볍게 떨어졌다.
“운전해. 네 차로.”
“왜? 아. 너 마스터키 잃어버렸다고 했지.”
“엇!”
세연은 놀랐다.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키의 주인이 요기 있었네?
“왜 그러세요?”
“그게…… 제가 주운 키가 대표님의 것이 아닌가 해서요.”
가방에 들어 있는 차 키를 꺼내 들자 석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정작 차 키의 행방에 주인은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 한쪽을 씩, 올린다.
“내 거 맞네요. 정세연 씨가 주웠군요.”
도하가 세연의 손바닥 위에 있는 차 키를 움켜쥐었다.
그러면서 스친 감촉이 손톱으로 손금을 따라 긁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오므라드는 손바닥을 본 그가 입꼬리를 샤프하게 올렸다.
“타고 가요. 집 근처에 내려다 줄게요.”
* * *
도하와 함께 뒷좌석에 앉은 세연은 정면에 둔 고개를 뻣뻣하게 굳혔다.
‘왜 나를 보고 있는 거지?’
말 한마디 없이 그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만 쳐다봤으면…….
자유로울 수 없는 그의 시선에 그녀는 창가에 붙다시피 했다.
널 보고 있다고, 그리 말하는 듯한 시선을 막을 수 없어 세연은 차라리 그를 보는 게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만 그럴 뿐, 실행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어떤 표정으로 날 보고 있을까.
무심코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간 넋 놓고 보게 될 것이었다.
자신의 취향인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을 테니까.
“앗.”
과속 방지 턱을 지나간 차가 흔들렸다.
대처하지 못하고 그녀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가 단숨에 허물어졌다.
“조심.”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모양대로 둥글게 감싸 쥐었다.
투박한 말과 다르게 조심스러운 손길에 세연은 과민하게 놀랐다.
그때 갑작스럽게 핸들이 꺾인 탓에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그 연동에 몸의 기울기가 다시 바뀌었다.
그의 손이 여전히 그녀의 어깨에 머물러 있어 흔들리는 몸이 그가 이끄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딱, 하고 뭔가에 머리를 부딪쳤다.
크게 아프지는 않지만 딱딱한 감각이 밀려오자 눈이 반사적으로 감겼다.
“후. 괜찮습니까.”
그의 숨소리가 너무 가까웠다.
제 위에서 들린 숨소리에 세연은 번쩍 눈을 뜨고는 사태 파악이 된 얼굴로 경악했다.
내가 지금…….
그녀의 머리가 베고 있는 건, 그의 허벅지였다. 부정할 여지 없는 단단한 감촉이 말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