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젊은 층이 타깃이니까 톡처럼 대화체로 가는 게 어때요?”
“신선하네! SNS 광고 홍보니까 매력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진형이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마우스를 몇 번 움직이던 진형이 PC 화면을 빤히 보면서 말했다.
“문안 작성해 볼래?”
“내가요?”
“실습이라고 쳐. 어색하거나 이상해 보이는 부분이 있으면 체크해 줄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아, 나는 널 생각해서 말한 건데 싫을 수도 있었겠다. 미안해.”
너무 매몰찼나. 세연은 말을 끊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진형을 보면서 몰래 한숨을 쉬었다.
첫 연애라 그런지 진형에 관해 알아 가고 맞추는 일이 상당히 어려웠다.
‘지금 나가야 예약 시간에 맞출 수 있는데.’
보건대, 한 시간 안에 끝낼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말을 꺼내 보려 선배, 하고 부르려는 순간 진형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시만. 엄마한테 전화가 왔네.”
복도로 나가 통화하던 진형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고개를 살짝 숙인 진형이 두 손바닥을 겹치며 비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세연아. 미안한데 오늘 데이트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왜요? 어머님께 무슨 일 생겼어요?”
“넘어지셨다고 하네. 발목을 다친 듯해. 급히 병원으로 모셔 가야 할 것 같아.”
“어서 가요. 저는 정리하고 갈게요. 예약 취소도 제가 할게요. 거기 어디예요?”
“아니야! 가면서 전화하면 돼. 너는 내 파일만 저장해 줘. 부탁한다!”
마음이 초조한지 진형이 입술에 침을 묻히면서 부리나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치킨이나 시켜 먹어야겠다.”
진형의 문서와 자신의 파일을 저장한 세연은 시큐리티 카드로 부서 문을 잠갔다.
타 부서도 퇴근했는지 복도를 제외한 모든 곳에 불이 꺼져 있었다.
배고프다.
세연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배달 앱을 켰다.
“치킨! 치킨! 치킨아∼ 기다려. 내가 널 영접하러 갈게! ……엇, 이거 왜 이러지?”
엘리베이터가 15층에 선 채 작동이 멈춰 있었다.
열림 버튼을 연속해서 눌렀지만 문제가 생겼는지 먹통이었다.
다른 엘리베이터가 있어도 제이온 직원들만 쓸 수 있는 전용은 이 한 대였다.
타 승강기는 여기서 운행되지 않았다.
“왜 멈추냐고요…….”
미련 넘치는 시선으로 계기판을 보는데 불현듯 몇 분 전에 엘리베이터를 탔을 진형이 생각났다.
저 안에 갇혀 있는 거 아냐?
“선배! 혹시 안에 있어요?”
혹시나 싶어 엘리베이터를 두드리자 침침한 복도에서 그녀의 목소리만 울렸다.
역시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안쪽에서 문을 가격하는 소리가 쿵, 하고 울렸다.
딸꾹질하듯이 힉 소리를 내지른 세연은 몸을 움츠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배……?”
“AS 회사에 연락…… 후, 하세요.”
진형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였지만 급박한 상황에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들리는 음색이 심상치 않자 세연은 다급히 이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관리하는 AS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잠실 W 센터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갇혔어요. 15층이요. 네. 119도…….”
“안 됩니다.”
힘겹게 내뱉은 목소리였다. 세연은 하던 말을 멈추고 안에 갇힌 이에게 말을 걸었다.
“안 된다고요? 뭐가…….”
“구급대원을 부르지 말아요.”
핸드폰을 붙들고 세연은 갈등했다.
다급한 상황이었다. 위급에 따른 매뉴얼을 무시했다간 큰일 날 수 있는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뒷감당은 나중의 일.
“여보세요. 네. 119도 불러 주세요…… 네. 15분이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서 그녀는 누군지도 모를 이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부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을 텐데 멋대로 이행해서 죄송합니다. 문제가 생긴다면 꼭 책임지겠습니다.”
말할 기운이 없는지 아니면 화가 났는지, 말이 없다.
“정, 정신 잃은 거 아니시죠?”
안쪽 사정을 알 수 없는 세연은 불안한 나머지 말을 더듬거리며 외쳤다.
“저, 기요! 제 말 들리면 말씀해 주세요!”
“……들립니다.”
“휴.”
“…….”
“15분만 기다리면 돼요. 제가 있을게요. 걱정 마세요.”
책임지겠다고 말했어도 남자가 정신을 잃으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자꾸만 드는 나쁜 생각을 떨치기 위해 세연은 종달새처럼 종알거렸다.
“저어.”
“…….”
“저기요.”
“……듣고 있습니다.”
“노래 불러도 될까요?”
“…….”
“싫지 않으신 거로 생각할게요. 듣기에 이상해도 참아 주세요.”
된다. 안 된다.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는데 불안한 마음이 들어 저 좋을 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치킨! 치킨! 치킨아∼ 기다려. 내가 널 영접하러 갈게!”
엄마를 닮으면 좋았겠지만 노래 실력만은 부친을 더 닮아 세연은 타고난 음치였다.
고슴도치 아빠도 못 들어 줄 노래 실력에 세연은 혼자 있을 때만 노래를 흥얼거렸었다.
즉석에서 지은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만하라는 말이 들리지 않자 불안해진 세연이 또 물었다.
“또 부를까요?”
“……해요.”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기대와 다른 말소리가 돌아왔다.
자신의 노래가 도움 된 것 같아 세연은 아예 복도 바닥에 앉아서 열창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대표님?!’
그러고 보니 이도하의 목소리와 매우 흡사했다. 잔잔하게 울리던 중저음.
그가 잠에서 막 깨면 저런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어 속삭일 때의 톤이 상상된 세연은 이내 제가 한 생각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대표님이 왜 내게 귓속말을 해!…….’
이건 그냥, 그래. 남자의 목소리가 자신의 취향이라서 그런 것이다.
“전화한 분이신가요?”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시간 감각이 돌아왔다.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에서 내려서 여기까지 걸어온 직원이 장비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자 세연은 찬 바닥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네! 빨리 구해 주세요.”
30분이 소요된 끝에 드디어 꼼짝하지 않던 문이 열렸다.
대기하고 있던 구조대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보이는 형체를 향해 침착하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남자는 층수 계기판에 몸을 기대 앉아 있었다.
그가 느릿하게 눈을 뜨며 구조 요원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어났다.
보이는 훤칠한 몸체로 인해 세연은 자신이 이때까지 누구와 대화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벌게진 얼굴로 꽤 집요한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덕분에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정세연 씨.”
나른하게 깔린 묵직한 목소리.
99% 다크 초콜릿 같은 눈동자.
진한 선으로 윤곽이 이루어진 얼굴형.
왜 이제야 알았나 싶게 세연은 자신의 이상형이 누구에게 맞춰져 있는지 깨달았다.
이도하, 이 남자였다.
* * *
“정말 병원에 안 가셔도 되나요?”
“다친 곳이 없으니 잠시 안정을 취하면 됩니다.”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낸 도하가 대표실 소파에 누워 오른팔로 피로한 눈가를 덮었다.
매끈한 골조가 선연하게 위로 드러나는 자세였다.
널찍한 어깨가 위로 들리자 벌어지는 삼각형의 라인에 세연은 그만 시선을 빼앗겼다.
육감적인 몸에서 그의 얼굴로 고개를 돌려 시야를 맞췄지만.
……현명한 선택은 아닌 듯했다.
단단한 팔 근육에 짓눌려지지 않은 콧대가 높았다. 인중으로 내려가는 코의 곡선이 죽지 않고 날카롭게 뻗어져 있고 진중하게 다물린 입술은 또 어떤가.
어색한 자리라는 것도 잊고 세연은 세련되게 빚어진 외모를 감사히 감상했다.
“다리 아플 텐데 앉아요.”
혈색이 돌아오지 않은 입술이 열렸다.
나른하게 드러나는 눈동자에 세연은 심장을 빼앗긴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그녀를 관찰하듯이 달라붙었다.
그의 시선을 달고서 세연이 엉거주춤 접객용 소파에 앉자 그의 눈이 감겼다.
안도한 세연은 조용히 집무실로 눈을 돌렸다.
그가 사용하는 가구들은 전부 검은색이었다. 그 외의 전체 톤은 화이트로 마감되어 있었다.
‘대표님 집도 이럴 것 같아.’
가 보지 않은 그의 집을 상상하던 세연은 의식의 흐름을 깨닫고서 허리까지 오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게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끊임없이 이도하와 연결되고 있었다.
앉은 자세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세연은 엉덩이를 달싹거렸다.
어느 순간부터 거칠게 들리던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리고 마주 보고 있지 않아도 감지되는 시선에 그녀의 심장이 작지 않은 소리로 울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시선을 마주하기도, 그렇다고 안 보기도 그래서 눈만 굴리던 세연은 도하가 말을 걸자 자신의 다리에 둔 시선을 올렸다.
팔을 내린 도하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뭐라도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더 쉬세요. 저는 없다고 생각하세요.”
그가 그녀의 취향인 목소리로 웃음을 짤막히 흘렸다.
단순한, 훗.
가벼운 웃음소리인데 세연의 귓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메마른 듯이 건조한 목소리가 흩어지지 않고 귓속에 단단히 뭉쳐, 예민한 곳을 까끌까끌하게 긁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