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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5)화 (5/70)

5화

“서 있기만 해도 화보집이네. 사진 찍으면 안 되겠지?”

“그 이야기 못 들었어?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한다잖아. 그 왜 멋대로 사진 유포한 몇몇 인간들 때문에! 그래서 이달의 매거진에 실린 것도 힘들게 따냈다는 소문이 돌았고.”

“크흐흡. 나 혼자만 볼 자신이 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나. 세연은 올려다봐야 하는 머리에 시선을 고정하면서 도하의 뒤로 조심히 섰다.

“지금이라도 많이 봐 두게 옆으로 이동하자. 뒤태만 보기엔 아까운 얼굴이야.”

“제이온 직원들은 출근할 맛이 나겠다.”

이 건물의 15층에서 꼭대기인 20층까지가 제이온 소속이었고, 그 외는 다른 회사들이 입주해 있었다.

그리고 네 대의 엘리베이터도 운행되는 층수가 구분되어 따로 사용되었다.

제이온 전용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도하가 층 번호 버튼 앞에 섰다.

안으로 들어온 세연을 보고는 그의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갔다.

저를 발견한 그의 시선을 의식한 세연은 입 속에서 중얼거리던 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꾸벅, 인사하곤 정면을 응시하자 그의 시선이 얼굴 옆으로 꽂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째 돌아보고 싶더라니. 정세연 씨가 내 뒤에 있었군요.”

저를 당연히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여겼었다. 도하가 제 이름을 기억하고 있자 세연의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네. 바로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세연은 열없이 웃어 보였다.

도하는 눈매는 가만두고서 입꼬리를 그녀가 보이는 측에서 휘었다.

야릇한 윤곽이 맞물린 입술이 열린다.

“어제 잘 들어갔습니까.”

회식이 끝났을 때가 10시였다.

대부분 술에 취해 택시를 타느라 차 키의 주인을 찾지 못했지만, 그거야 오늘 찾아 주면 되는 거고.

무탈하게 집에 돌아갔던 세연은 도하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소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요.”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할 정도로 세연의 가슴이 주책없이 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도 두근거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소한 일이라, 혹시 고백이라도 받았습니까?”

어떻게 알았지?

세연이 댕그래진 눈으로 도하를 쳐다보자 매끄러운 턱선이 움직였다.

“찍어 본 건데, 맞았던 겁니까.”

진한 인상에 기여하는 눈빛이 그녀에게로 내려앉아 있었다.

대답도 못 하고 굳어 있던 세연은 저도 모르게 도하의 시선이 닿은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자 그가 헛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없겠죠.”

맞는데…….

“같은 부서에 아는 이가 있었고, 그것을 인연 삼아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니. 꽤 작위적이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 일을 겪은 세연은 비소가 담긴 목소리를 듣고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작위적인가.’

아니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때마침 열리는 문에 그녀는 속마음과 다른 말을 내뱉었다.

“저는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정세연 씨.”

“네?”

내린 뒤에 뒤돌아보자, 닫히는 문 사이로 그가 입꼬리를 선명하게 올리고 있었다.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처럼, 그도 저를 기억하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듯이 기뻤다.

닫히는 문 앞에서 세연은 방방 뛰고 싶을 만큼 기분이 들떴다.

존경하는 우상에게 사인을 받은 것 같았다. 힘든 날에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질 추억이 생겼다.

부서로 향하는 세연의 발걸음이 트램펄린을 탄 것처럼 가벼웠다.

“안녕하세요.”

얼굴을 더러 익힌 팀원 몇 명이 술이 덜 깬 낯빛으로 세연을 보며 웃었다.

“어서 와요.”

“젊음이 좋기는 하네요. 어우. 전 어제 적당히 마셨는데도 일어나기 힘들었어요.”

“저도요. 으, 도저히 안 되겠어요. 커피 마실 사람. 세연 씨. 커피 안 마실래요?”

“탕비실에 가실 거죠? 제가 타 드릴게요.”

“앉아요. 그런 거 하려고 세연 씨 있는 거 아니니까.”

“휴게실 구경하고 싶어서 그래요. 제가 마실 것도 찾아보고요. 실은 커피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럼 오늘만 부탁할까요?”

“네. 말씀하세요.”

“난 커피믹스면 돼요.”

“어. 그럼 내 것도 부탁할게요. 꿀물 부탁해요. 속이 아직도 쓰라려서요.”

“네. 가방 내려놓고 다녀올게요.”

의자 등받이에 가방끈을 건 세연은 문득 무언가 잊은 듯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잊은 게 뭐지?

무심결에 옆 파티션을 본 세연은 깜빡 잊고 있었던 존재를 떠올렸다.

‘진형 선배!’

서둘러 비품실로 향했다. 그러자 비상구 반대편 문가에 진형이 서 있었다.

“세연아!”

세연을 본 진형이 빨리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덥지? 마셔. 네가 단 걸 좋아했던 게 기억나더라고. 연유 커피야.”

“아,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받아 놓고도 세연은 마시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하지?

그녀는 연유가 몸에 받지 않는 체질이었다. 연유가 들어간 것을 먹으면 배가 아팠다. 그런 데다가 커피는 잠이 잘 오지 않아 좋아하지 않았다.

예전에 커피를 안 마신다고 말했는데 오래돼서 까먹은 모양이다.

‘그래도 나를 생각해서 사 준 거니까.’

마음만은 고마웠다.

이렇게 그녀를 챙겨 주는 진형이라면 연애하면서 감정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이런데 결혼해서도 아빠처럼 변치 않고 저를 사랑해 주지 않을까?

“같이 마시고 들어가자.”

진형의 미소를 보며 세연은 마음을 결정했다.

차일피일 대답을 미뤄 진형의 마음을 애타게 하느니, 그와 한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선배.”

세연은 진형을 응시하면서 고마움을 담아 말했다.

“우리, 만나요.”

그녀의 말에 진형의 입가가 비죽 올라갔다.

‘계획대로’라는 문구가 붙은 듯, 진형의 입매의 한쪽이 크게 올라가 있었다.

[그럴 리가 없겠죠. 같은 부서에 아는 이가 있었고, 그것을 인연 삼아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니. 꽤 작위적이지 않습니까.]

왜 이때 도하의 말이 떠오르는 걸까.

완벽하게 다듬어진 얼굴이 어디선가 지켜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대표님을 떠올리고 있으면 어떡해.’

세연은 빠르게 눈을 깜빡이면서 망막에 새겨진 듯한 얼굴을 지워 냈다.

“진짜?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어느새 진형의 입술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처음이라 실감 나지 않나 봐.’

진형은 영락없이 기뻐하고 있었다.

“네. 진짜요.”

세연은 웃으면서 확답해 주었다.

“내 고백 받아 줘서 고마워. 세연아. 내가 정말 잘할게.”

진형이 대뜸 그녀의 손을 잡았다.

땀이 밴 것처럼 그의 손바닥이 축축했다.

미지근하고 끈적한 감촉에 세연의 미간 사이가 확 모였다.

불편한 감각이 무던한 신경을 콕 찔러 댔다. 어딘가 모르게 찜찜했다.

하지만 잡혀 버린 손을 떼어 낼 수 없었다. 세연은 제 말로 진형이 기뻐하자,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내일 저녁 식사 같이할까?”

세연은 집에 가면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게 다반사였다.

티비를 보면서 한 끼를 해결하는 저녁 식사가 슬슬 지겨워진 참이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마음이야 오늘 같이하고 싶은데 우리의 첫 데이트가 될 거잖아. 좋은 곳 찾아 놓을게.”

진형이 윙크하듯이 눈가를 찡그렸다.

첫 데이트보다 맛있는 식당이 기대된 세연은 방긋 웃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 * *

진형을 보내 놓고 세연은 탕비실을 찾았다.

“커피하고 꿀물 왔어요. 드세요.”

잠시 후, 부서로 돌아온 세연에게 커피를 받은 직원이 물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카페 커피는 어디서 가져온 거예요?”

트레이에 올려 둔 플라스틱 잔을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아. 이건…….”

“제가 사 왔어요.”

자리에 앉아 있던 진형이 그들에게로 다가와 세연에게 향한 시선을 돌렸다.

“진형 씨가?”

“네. 세연 씨가 제 대학 후배거든요. 오랜만에 만났지 뭐예요. 제 후임도 됐으니까 잘 지내보자는 의미로 사 준 거예요.”

“뭐야, 뭐야. 뭔가 운명적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팀원들이 세연과 진형을 부담스럽게 쳐다보았다.

“둘이 잘해 봐.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진형 씨도 세연 씨에게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진 않은데, 안 그래요?”

부추기는 말에 진형이 안경을 치켜올렸다.

“세연이는 제게 동생 같은 후배예요.”

동생?

세연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진형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혼자 결정한 말을 막힘없이 내놓았다.

“회사에서 만났으니 사심 없이 대하려고요.”

“아쉽다. 첫 사내 커플이 탄생할 줄 알았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그렇지만 당사자들이 관심이 없는 모양인데 우리가 뭐라고 하겠어요.”

지펴진 관심이 맥없이 끊겼다.

“세연 씨. 이제 일합시다.”

일 이야기로 방향을 튼 진형이 세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듯이 그의 자리와 붙어 있는 파티션을 눈짓하고 있었다.

세연은 화가 나기보다는 어리둥절했다.

아까 전만 하더라도 사랑을 말하던 진형이 맞나 싶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설치한 사내 메신저로 진형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놀랐지? 내가 미리 말한다는 걸 잊었어. 우리 관계는 당분간 비밀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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