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날요?”
-너를 왜 혼내. 네 남편이 될 남자를 잡지.
“그럼 안 되죠. 내 남자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꼭 말할게요.”
-우리 딸 사랑을 받을 예비 사위 참 복 받았네.
사랑한다는 말을 잊지 않으며 아빠가 전화를 끊자 세연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빠마저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를 사랑하는 아빠가 든든하게 살아 계셔서 그녀는 웃음을 잃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술이 들어가서인지 생전 하지 않던 나쁜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돌아가시면 나는 어떡하지?
상상하기도 싫은 미래에 세연은 찡해진 눈가를 문지르며 앞으로 걸었다. 그러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딱딱함에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황급히 뒤로 물러난 세연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잔디 속에서 발견된 은색 빛의 물체는 차 키였다.
“……아까도 있었나?”
차 키를 주워 들어 들여다보니 문양이 외제 차의 엠블럼이었다.
독채에서는 제이온 회식이 단독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마도 회사 사람 것 같았다.
회식 자리로 들어선 세연은 보고 싶은 얼굴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안 계시네.’
쉽게 눈에 띄는 도하가 보이지 않자 세연은 옆자리가 비어 있는 유정의 옆에 앉았다.
술을 제법 마셨는지 유정의 얼굴이 상당히 벌게져 있었다.
“유정아. 대표님 못 봤어?”
“밖에 나가 있었어? 대표님이라면 조금 전에 나가셨어.”
그러면 이 차 키 주인은 아니겠네.
왠지 모를 아쉬움을 뒤로하며 세연은 일단 차 키를 가방 안에 넣었다.
파한 자리에서 차 키가 없어졌다고 하는 사람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 * *
잠실 대교를 지나는 차 안.
뒷좌석에 앉은 도하는 피로해진 눈을 감고 있었다.
“대리 기사 부른다고 하지 않았냐? 집 가다가 네 전화 받고 급하게 오느라 저녁도 굶었다.”
차질이 생겨 친구이자 비서인 자신을 부른 도하에게 석호가 찡찡거렸다.
“차 키 없어서.”
“잃어버렸냐?”
“그런 셈.”
“잃어버린 거면 잃어버린 거지. 그런 셈은 뭐냐. 제작 주문 넣어야겠네.”
“안 해도 돼.”
“왜?”
“직원이 주웠거든.”
도하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어떻게 확신하냐. 회식 자리에서 잃어버린 모양이니 그런 거라고 추측하나 본데. 주웠다고 한들, 누군지는 알고?”
세연이 차 키를 줍는 것까지 보고 식당 문을 나섰던 도하는 픽 웃었다.
작게 난 웃음소리에 석호의 뒷머리가 쭈뼛 섰다.
“……왜 웃냐. 나는 네가 웃을 때 좀 무섭더라.”
“나한테 잘못한 거 있나 봐?”
“잘못은. 너한테 잘한 건 있어도 잘못한 건 없다!”
목소리는 당당했으나 운전대를 잡은 석호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도하가 주무른 뒷목을 좌우로 한 번씩 움직였다.
“잘 놀더라고.”
“아. 그래서 웃었어? 직원들이 몸 게임이라도 하디? 네가 웃긴다고 하니까 궁금하잖아.”
“궁금해하지 않아도 돼. 별로 안 웃겼으니까.”
“너 날 놀리냐. 안 웃겼다는 놈이 왜 웃었냐.”
“웃기지 않아서 장난 좀 쳐 보았거든.”
부러 차 키를 떨어뜨린 이유였다.
본가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가 남의 고백을 듣게 되었어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도리어 제 영역을 침범당한 듯이 불쾌하기까지 했다.
감정이 실린 발걸음을 눈치챈 모양이지만,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내 연애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입사 첫날부터 사귀는 꼴은 허용 못 한다.
근무 태만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 자신도 안 해 본 연애를 마음 좋게 축하할 만큼 그는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석호에게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고 나서는 길에 고백을 거절하는 소리를 들었었지만, 예방 차원으로 심술을 부려 보았다.
자신이 지켜보고 있다는, 일종의 경고로 차 키를 남겨 둔 도하는 정세연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히지 않은 쪽에 가깝지만.’
별빛같이 환한 얼굴이 그의 머릿속에 박혀 시간이 지나도 떠나가지 않았다.
‘정세연.’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건 먼발치에서도 보일 만큼 그녀의 표정이 생기가 넘쳤기 때문이었다.
일 외에는 전부 무료했던 그와 다른, 세연의 열정에 자신이 그녀의 생기를 빨아들인 것 같기도 했다.
[이도하 대표님!]
강단에서 내려온 그에게 몰리는 군중엔 그녀도 있었다.
단 한 사람밖에 안 보이는 것처럼 그녀만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와 어떻게든 인연을 맺으려는 이들 속에서 그녀는 당당하게 포부를 밝혔다.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멘토였습니다. 카피라이터에 관심이 생겼어요. 열심히 노력해서 제이온에 입사하고 싶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그래요. 정세연 학생. 우리 회사에 입사한다고 하니 이 자리를 빌려 물어볼게요.]
[네. 뭐든 물어봐 주세요.]
[입사했는데 내가 없으면 어떡할 겁니까.]
[네?]
[논지를 바꾸죠. 카피라이터로 활동할 수 있는 곳이 우리 회사 말고도 많은데 제이온에 입사하려는 동기가 뭡니까.]
생각하지 못한 질문에 그녀는 잠시 입을 우물거리다가—보는 재미는 있었다—결정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담한 입술을 열었다.
[직원을 위한 복지가 잘 되어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카피라이터 양성에 힘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 취업 지원 합작으로 카피라이터를 발굴 및 육성하는 취지의 프로젝트는 회사 설립 초창기 때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카피라이터 서포터즈에 지원해서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을 이수할 생각입니다. 이처럼 배움의 기회를 주는 제이온에 입사하고 싶습니다.]
확고한 목표를 가진 그녀는 도하의 눈에 들고자 속없는 말을 내뱉는 부류가 아니었다.
총기 있는 눈동자에서 보이는 열의에 도하는 그녀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낼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기분을 단 한 줄로 표현해 보세요. 정세연 씨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자유롭게 말해도 됩니다.]
선택지 없는 유형의 질문을 던지자 도하의 주변을 맴돌던 이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상이 없으면 아쉽겠죠. 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흠, 뭘 주면 좋아하려나. 준비한 것이 따로 없어 수중에 있는 거로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이건 어떻습니까.]
그가 찬 시계의 유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자 반응은 뜨거웠다.
[즐거웠습니다!]
[대표님, 사랑합니다!]
[가지 마세요!]
직관적인 전달은 심플하지만 색다를 게 없는 대화나 마찬가지였다.
마구잡이로 뱉어 내는 사람들 틈에서 그가 고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테스트에 통과돼서 기쁘다.]
그는 잔잔하게 입가를 올렸다.
정세연은 그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카피라이터로서 중요한 자격은 소비자의 니즈와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광고물의 콘셉트를 잘 파악하여 그들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손. 내밀어요.]
[앗, 네.]
브레이슬릿을 푼 그가 작은 손바닥에 시계의 메탈밴드부터 늘어뜨렸다.
그는 두 손을 포개어 시계를 감싸는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정세연 씨가 오게 될 때까지 나도 정진하고 있죠.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넵! 주신 선물을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활짝 웃던 표정이 흘러가는 세월에 묻히지 않고 때때로 그리고 불시에 떠올랐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는 해도 관심을 들여 알아보지는 않았다.
푸드덕 날갯짓해 제 둥지로 날아 들어올 것을 알기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못 만나면 어쩔 수 없고.
그런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더니 결국 뜻을 이루지 않았나.
출장을 갔다 온 그는 그녀의 얼굴을 이력서로 마주하고는 반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기특하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입사 초반에 연애한다고 헬렐레 정신 팔린다면 좀, 아니 많이 화가 날 것 같았다.
“선배, 라고 부르는 것 보니 인연이 있는가 본데…….”
“뭐라고?”
석호의 말소리가 잠잠한 귓가에 꽂혔다.
취했네. 나.
혼자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도하는 차장에 비치는 얼굴을 정면으로 틀었다.
“몰라도 될 말이야.”
“네가 친 장난도 안 알려 줄 거냐.”
“비밀로 해야 재미있거든.”
“하나도 안 재미있네요!”
저만 재미있으면 뭐 해.
석호의 뿌루퉁한 목소리는 의미 없이 흩어졌다.
안 하던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차 키의 주인이 누군지 알게 된 표정을 상상하자 감정에 따른 짓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눈치챌까.
도하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갔다. 놀랄 얼굴을 볼 날이 기다려졌다.
* * *
세연은 출근 도중 진형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세연아. 어디쯤이야? |
저 회사 로비예요. |
내가 딱 맞춰서 연락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