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대표님! 제 잔도 받아 주세요. 안 받아 주시면 미워할 겁니다.”
인기인인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무서워서라도 마셔야겠군요.”
그리고 도하는 취한 기색 없이 술을 권한 직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세연아?”
“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도하를 힐끔거린 세연은 어느새 자리를 바꿔 제 옆에 앉아 있는 진형을 바라보았다.
“술잔이 비었네.”
진형이 세연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싱긋 웃었다.
몇 잔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세연은 주량을 넘기지 않은 선에서 잔을 부딪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이 울렁거렸다.
“아웁. 도저히 못 마시겠어요.”
“왜? 속이 안 좋아?”
“네. 잠시 바깥 공기 쐬고 올게요.”
취기 때문에 몸이 더워진 세연은 웃옷을 걸치지 않고 둥근 조명이 깔린 뜰로 나갔다.
독채는 ‘ㄷ’자형의 구조였다.
그녀는 왼쪽으로 꺾어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판판한 벽에 등을 대고 열기를 식히고 있는데.
“세연아.”
어느덧 진형이 그녀를 쫓아와 있었다.
비장한 눈빛을 직시한 순간, 세연은 진형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아직 너를 잊지 못했어. 너를 보면 여전히 내 심장이 뛰어.”
“잠깐만요. 선배.”
“몇 번째 말하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또 할게. 세연아. 나랑 만나 줄래?”
자박.
풀을 밟는 소리가 벽면 모퉁이 방향에서 들렸다.
“선배. 잠시만요! 누가 있어요.”
“듣는 사람이 있다고?!”
저보다 더 놀란 듯한 진형의 목소리에 세연은 소리가 난 반대편을 지그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형이 성내며 소리를 높였다.
“누군데 남의 대화를 엿듣고 있습니까!”
버럭 화를 낸 진형이 빠르게 세연을 지나쳐 벽면이 끝나는 지점을 돌았다.
“……없잖아.”
“네?”
진형의 뒤에 서 있던 세연은 얼른 그의 옆에 섰다. 조명이 설치된 뜰에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싫었어?”
“핑계 아니에요. 분명 들었어요.”
진형은 믿음이 가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억울해!
“진짜라니까요.”
강경하게 주장하자 진형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인가 보다.”
“……그런가 봐요.”
암만 봐도 아무도 없었다.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에 고개를 끄덕이자, 진형이 다시 분위기를 잡았다.
“세연아. 나는 널 좋아해.”
세연은 난처했다.
조금은 두근거릴 줄 알았는데 그의 고백을 듣고도 담담한 심장이었다.
진형과 다시 만난 게 신기하긴 해도 어떻게 해 볼 마음도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곤란한 티가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진형의 얼굴에 드리운 기색이 어두웠다.
“나는 네게 선배일 뿐이니? 정말로 나는 안 되겠어?”
안경을 벗은 진형이 눈가를 마른 손으로 덮었다.
처량해 보이는 모습이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진형을 사랑하지 않는데 마음을 속인 말을 했다간 사귀게 될 것 같았다.
“죄송해요. 저는 선배에게 이성으로서의 마음이 없어요.”
그가 마음 정리를 할 수 있도록 세연은 고백의 답을 미루지 않았다.
“네 대답은 항상 같네.”
그녀의 거절을 들은 진형이 안경을 도로 끼고서는 쓸쓸히 웃었다.
“내가 싫은 건 아니라면 한 번만 더 생각해 줄래? 그래 줄 수 있지?”
간곡하게 부탁하는 사람 앞에서 고개를 젓기란 힘들었다.
“천천히 생각하고 말해 줘. 난 계속 기다릴 수 있어. 그때 가서도 네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내 마음을 접을게.”
생각해 보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알겠어요.”
끈덕진 부탁을 냉큼 거절하면 직장 내 인간관계도 망칠 것 같아 세연은 감정 없이 대답했다.
“고맙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모습이 가슴 언저리에 들어앉아 세연은 마음이 무거웠다.
“들어가자.”
자신이 뭐라고. 여태껏 좋아해 주는 진형에게 미안했다.
“아. 같이 들어가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몇 분 후에 들어올래?”
뒤돌던 진형이 문득 멈추곤 다시 돌아 아직 제자리인 세연을 응시했다.
“사귀지 않는데도 말이 나올 수 있거든. 그건 너도 불편할 거 아니야. 상관없다면 괜찮지만.”
의도치 않게 흘러가는 상황은 사양이었다.
“먼저 들어가세요.”
“그래, 이따 봐.”
안경 속의 눈꼬리가 주름 잡히도록 접혀 있었다.
* * *
진형은 등을 돌리면서 소리 나지 않게 웃었다.
‘쟤는 어째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냐.’
사람 의심할 줄 모르는 순진함은 여전했다.
대학교 때 세연을 좋다고 따라다녔던 건 그녀에게서 얻을 것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정세연은 예쁘장한 얼굴에 몸매도 기가 막히게 죽여줬다.
촌스럽게 꾸며서 그렇지 본바탕이 예뻤고, 잘록한 허리에 비해 유독 큰 가슴은 관심을 안 가지려고 해도 시선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하면 옆에 놔둬도 괜찮은 외모였다. 무엇보다 과 탑이라 자신의 앞길에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다.
학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봉사 활동에도 최선을 다하던 정세연이었다.
애인으로 둬도 뒤탈이 없을 듯했고 딴 여자를 만나도 속이기 쉬워 보였다.
들켜도 진심으로 뉘우친 척, 빌기만 하면 마음 약해서 쉽게 용서해 줄 것이었다.
그래서 받아 줄 때까지 고백했는데 철벽은 얼마나 치던지.
그때는 지쳐 나가떨어졌지만, 이번에야말로 세연을 제 것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주아가 있지만, 안 들키면 되지.’
미소를 감출 수가 없어 실실 쪼개던 진형이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들이닥친 형체를 올려다보던 진형은 제 앞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반걸음 물러났다.
“대, 대표님.”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지?
“왜 그리 놀랍니까. 뒤쪽에 뭐라도 있는 것처럼.”
“네?! 누가 있긴요. 화장실에 갔다가 온 것뿐입니다.”
“그래요?”
내려다보는 눈빛이 왠지 살벌해 진형은 쫄면서도 짜증이 났다. 지가 대표면 단가.
“화장실은 반대편으로 가시는 게 더 빠를 겁니다.”
“볼일 없습니다. 용건을 끝내서 돌아가려고 나온 겁니다.”
“하핫. 그러십니까. 그럼 들어가십시오.”
대화를 나눌수록 몸이 움츠러들어 기분이 더러웠다.
진형이 부리나케 고개를 숙이고는 돌계단을 밟았다. 신발을 벗은 발로 판판한 마루를 넘은 진형은 도하를 슬쩍 곁눈질했다.
‘왜 안 가고 있지?’
이도하는 그가 나온 방향을 가만히 주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틀었다.
* * *
“카디건 들고 올걸.”
바깥에 있었더니 열기가 가셔 추워졌다. 한기가 느껴져 몸을 부릇, 떠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활짝 웃음이 나왔다.
“아빠!”
-우리 딸 첫 출근 잘 했어?
“아직은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차차 배워 나가려고요. 지금은 회식 중이에요.”
-첫날부터?
“신입 신고식 같은 거예요. 자유로운 분위기라서 힘들지 않아요.”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딸이 내일 숙취로 고생할까 걱정하는 아빠의 마음을 이해한 세연은 쌩쌩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험악한 세상이다 보니 아빠는 딸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아빠의 관심이 귀찮거나 싫지 않았다.
어릴 적에 돌아가신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해서 두 배로 애쓴 아빠였다.
그런 아빠를 엄마처럼 의지했기에 부녀 사이는 애틋했다.
-…….
“아빠. 또 엄마 생각하고 있구나.”
아빠가 말이 없을 때면 어김없이 사고로 돌아가신 엄마 생각 중이셨다.
우리 아빠, 또 눈가가 젖어 있겠네.
-우리 딸, 이렇게 잘 큰 모습을 네 엄마가 봐야 하는데.
“엄마는 하늘 위에서 보고 있을 거라고 아빠가 나 어릴 때 그랬잖아요. 설마 날 속인 거였어요?”
능청스럽게 말하자, 저편에서 아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빠보다 딸이 낫네. 그래. 네 엄마, 널 지켜보고 있을 거야.
혼자서 슬픔을 털어 내는 아빠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울렸다.
“아빠. 아빠는 엄마가 왜 좋았어요?”
딸이 엄마를 잊지 않도록 아빠는 저를 무릎에 앉혀 놓고 잠들기 전까지 엄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추억이 가득한 앨범을 보면서 들은 두 분의 연애 스토리는 아빠의 눈물겨운 구애로 시작되었다.
-그냥 다 좋았어. 네 엄마한테 첫눈에 반한 거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게 보여도 행복했었어. 그땐.
행복한 시간을 더듬듯이 아빠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세연은 슬그머니 웃었다.
-딸. 우리 세연이도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오겠지.
스물여섯.
그동안 연애하고 싶은 남자는 없었다. 진형 말고도 관심을 표해 온 남자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연애 감정을 느껴 보지 못한 세연은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날이 멀게만 느껴졌다.
“평생 끼고 살고 싶다면서요.”
-아빠 마음이야 그렇지.
“아빠는 내가 어떤 남자와 만났으면 좋겠어요?”
-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지.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잖아요.”
-네가 좋아하는 남자 말고 널 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라는 소리야. 그래야 행복해. 아빠가 엄마를 사랑한 것처럼.
아빠의 사랑은 엄마 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살아 계셨을 적에 어린 그녀가 보기에도 엄마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엄마에 관한 추억이 희미해져도 웃음이 끊이지 않던 집 안의 풍경은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아빠한테 말해야 한다. 갑자기 결혼한다고 인사하러 오면 혼낼 거다.
근엄한 목소리로 단단히 일러도 세연은 아빠가 무섭지 않았다.
인상은 웃는 아이도 울게 할 만큼 사나워도 마음만은 여린 아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