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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2)화 (2/70)

2화

간신히 대강당 끄트머리를 차지하게 된 세연이 저 얼굴을 눈동자에 담는 순간 직감적인 느낌이 들었다.

탄탄한 체격을 둔하지 않게 받쳐 주는 187cm 신장과 서늘한 인상은 부드러운 어감의 이름과 거리가 멀었다.

손을 대면 피가 날 것처럼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매력을 발산하는 그는 시선만으로 모여든 이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이크 없이도 넓은 공간을 울릴 것 같은 중저음을 듣고 있으려니 한 시간가량 지속된 강연은 끝을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그에 관해서 하나라도 알고 싶은 마음에 세연은 냉큼 팔을 올렸다.

“뒤쪽 출입구 라인에 있는 학생.”

하지만 그러한 마음을 가진 건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사방팔방 긴 팔들이 위로 향해 있었다.

“정세연.”

누군가가 호명되었으니 팔을 내리는데 유미가 그녀의 허리를 찔렀다.

“너야. 너.”

“응?”

“응이 아니라. 너라고.”

유미의 말을 깨닫기도 전, 마이크로 전달되는 목소리가 세연의 머릿속을 채웠다.

“하늘색 스웨트 셔츠에 반묶음 한 여학생.”

나?

세연이 정말로 자신이 맞냐고 유미를 쳐다보자, 유미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님.

“마이크 받아요.”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마이크를 세연의 앞자리에 있는 남학생이 건네주자, 세연은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이름이 뭐죠?”

“……정, 세연입니다.”

“네, 정세연 씨.”

백 명의 시선이 제게로 쏠리는 것보다 단 한 명의 눈동자가 그녀의 심장을 뛰게 했다.

“질문이 없으면 다른 분에게 넘겨도 되겠습니까.”

“있습니다!”

마이크를 빼앗길세라, 세연은 땀이 차는 두 손으로 차가운 마이크를 꽉 잡았다.

“한 기업의 대표님을 알아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카피라이터 이도하를 알고 싶습니다. 제이온을 설립하기 전에 카피라이터로 활동하셨다고 들었는데, 왜 이 직업을 선택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그녀의 질문에 그가 딱딱한 표정을 지우고 웃었다.

“카피라이터가 된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의 멘트는 그녀의 가슴과 머리에 콕콕 박혀 들었다.

“나만의 것이 탄생하기 때문이죠. 내 이름, 내 가족은 내가 이룬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내 손에서, 내 머리에서 나온 카피는 내가 이룬 결과입니다. 내가 걸어온 흔적이 다른 사람에게도 인상 깊게 기억되니, 내가 만든 건 살아 숨 쉬고 있는 거죠. <아, 그거?>”

“어, 그거!”

그가 가볍게 던진 말에 세연은 자동 응답기처럼 내뱉었다. 동시에 관중석에서도 “어, 그거?” 하고 화답했다.

“제 히트작 중의 하나입니다. 기획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러한 카피는 여러분에게 선명히 기억되고 있죠. 지금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역시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방송 작가의 꿈을 하루 만에 접을 정도로 도하는 세연의 선망이자 목표가 되었다.

그날로부터 3년 후.

그와 같이 일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치열한 경쟁 끝에 ‘제이온’ 회사에 입사하는 데 성공했다.

* * *

앞으로 다닐 회사의 건물은 20층짜리의 빌딩으로, 가로 너비가 길어 좌우 옆의 건축물들을 작아 보이게 하고 있었다.

로비로 들어선 세연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면접 날 와 봐서 허둥거리지 않고 제작 부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정세연입니다.”

보이는 얼굴을 향해 세연은 활기차게 인사했다.

“어서 와요.”

면접관이었던 류혜선이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반겨 주었다.

“정세연 씨 말고도 와 있는 이가 있어요. 대화라도 하면서 편히 앉아 있어요.”

면접 날에 우연히 말을 섞게 된 이가 몇 명만 앉을 수 있는 둥근 테이블에 착석해 있는 걸 본 세연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보게 될 것 같더라니. 정세연 씨. 반가워요.”

“저도요. 최유정 씨.”

“세연 씨는 CW로 채용된 거죠?”

“네.”

“나는 AD 지원했어요. 같은 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일주일 전 통성명을 할 때도 생각했지만 유정은 동글동글한 귀여운 인상과 달리 화통한 성격이 반전 매력이었다.

“다른 분은 남자라고 들었는데. 오, 저 사람인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세연은 고개를 돌렸다.

뻣뻣하게 서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세연과 유정을 발견하고는 열띠게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신입 이서오입니다!”

“우리도 첫 출근이에요. 나는 최유정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쪽은.”

“정세연이에요.”

“정세연 씨. 최유정 씨. 잘 부탁드립니다!”

챙겨 줘야 할 것 같은 어리숙한 서오의 인상 덕분에 긴장감이 많이 풀렸다.

대화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셋 다 동갑이었다.

“우리 말 놓을까요?”

“그럽시다!”

“먼저 말 터요.”

“어…… 나, 나부터?”

“서오는 깠고. 나도 지금 말 텄고. 세연이 너만 하면 되네.”

“나는 한다고 안 했는데?”

세연이 자연스럽게 반말을 시전하자, 유정과 서오가 킥킥, 쿡쿡 각기 다른 천진스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같은 나이인 데다가 셋 다 성격이 무난해 급속히 친해진 감이 없지 않았다.

“다 모인 것 같네요.”

사원들이 거의 다 모인 장소에서 혜선이 싱긋 웃었다.

“인사 시간 가질까요? 그런데 아직 안 온 직원이 있나 보네요.”

“헉헉! 왔습니다.”

비뚤비뚤한 넥타이를 바로 고친 남자가 부서 안쪽으로 들어오다 문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아는 사람을 만난 듯한 시선은 세연에게 꽂혀 있었다.

세연은 다른 사람을 보고 그런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누구지?

희멀끔한 얼굴에 안경을 낀 남자의 인상이 물을 머금은 듯이 흐릿했다.

어디서 봤더라.

“구진형 씨? 왜 그래요?”

기억났다!

그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어렴풋한 인상이 선명해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세연은 세월 속에 파묻힌 이를 떠올렸다.

구진형은 그녀에게 고백했었던 네 살 위의 대학 선배였다.

* * *

“저녁에 기획부와 함께 인사회를 가질 거예요. 신입분들의 소개도 끝났으니 자리와 사수를 지정해 줄게요.”

아트 디렉터로서 경력 1년 차인 유정은 제작 1팀으로, 아직 경력이 없는 세연과 서오는 2팀으로 배정되었다.

“오랜만이다.”

그리고 세연의 사수는 진형이었다.

“잘 지냈어?”

“취준생 생활이 다 비슷하죠. 공모전 준비하고 인턴 생활하느라 바빴어요.”

“그사이 애인은 있었고?”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없었어요.”

“나도 없었어.”

알고 싶지 않은 말을 왜 꺼낸 건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면 옛날의 일 때문일 것이다.

“나 몰라봤지?”

진형은 동기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그녀에게 열렬히 다가갔다.

대답 없음에 진형이 쓰게 웃었다.

“섭섭하네. 정세연. 나는 널 바로 알아봤는데.”

훈훈한 외모와 선후배들을 두루두루 챙기는 성격 덕에 인망이 꽤 두터운 진형이 고백해 왔던 그때는 아예 마음이 없진 않았었다.

하지만 그 당시 제게 연애는 사치였다.

일찍이 엄마를 여의고 아빠와 단둘이 사는 세연은 빠듯한 가정 형편과 학점 관리로도 벅찼다.

진형이 졸업할 때까지 세연은 그의 고백을 받아 주지 않았고, 그가 학교에 안 나오게 되면서부터 인연이 끊겼었다.

그 이후로 세연은 급히 노선을 튼 취업 준비를 하느라 진형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너는 어째 예전과 달라진 곳이 없냐. 나도 그렇고, 다른 애들 보면 나이를 먹었더만. 너만 그대로야.”

오늘 만나지 않았다면 영원히 떠올리지 않았을 사람과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다니.

‘이런 우연이 다 있구나.’

세연은 진형과의 만남이 신기할 뿐, 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 * *

제작팀과 기획팀은 협업이 기본이라 함께 회식하게 되었다.

장소는 음식 맛이 좋기로 유명한 식당의 독채였다.

그리고 세연과 두 신입 옆에 두 부서 직속인들이 돌아가면서 앉아 서로의 얼굴을 익히게 했다.

“술 못 먹는 사람들은 음료수를 먹어도 돼요.”

30, 40대의 젊은 층의 직원들이 주로 모여 있어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덕분에 세연은 뒤늦게 합석한 대표의 얼굴을 말짱한 정신으로 볼 수 있었다.

먼저 도하를 알아본 혜선이 좌식 의자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세연의 기억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이도하는 성숙한 남성미를 달고서 뭇시선을 강탈하고 있었다.

“신입분들을 보러 왔습니다.”

도하는 기립한 직원들 사이사이에 끼인 세 명을 시선으로 짚어 냈다.

“아는 얼굴이 보이는군요. 정세연 씨. 최유정 씨. 이서오 씨. 함께할 수 있어 기쁘군요.”

그가 말한 아는 이가 누구일까.

그게 자신일 거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세연은 그의 시선이 닿았던 얼굴을 발그레 붉혔다.

“대표님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우렁찬 서오의 목소리에 세연도 용기 내어 말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시켜만 주세요.”

세연은 존경하는 도하와 마주하는 이 순간이 면접 때보다 더 떨렸다.

“당찬 포부네요. 기억해 두고 있겠습니다. 힘을 합쳐 코스닥 상장을 노려 봅시다.”

경제 주간지에 실릴 듯한 스마트한 외모로 그가 입가를 늘이자 세연은 드디어 자신의 꿈을 이룬 실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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