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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1)화 (1/70)

1화

[대표가 널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해? 이걸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생생한 목소리가 현실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세연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남자를 마주하며 쓸쓸히 인정했다.

‘그럼 그렇지. 정말로 날 좋아할 리가 없잖아.’

완벽한 외모를 갖춘 남자에게는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도 과하지 않았다.

탄탄한 몸 전체를 감싸는 슈트 핏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데, 이도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들을 뒤돌아보게 하는 값비싼 것들을 착용했다.

몽블랑의 오르비스 테라룸 시계와 같은 브랜드에서 나온 커프스, 새로 산 듯한 반들반들한 블랙 슈즈.

그가 걸친 것 중에 명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원래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메이커 명품들이 그와 한 몸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설사 문방구 뽑기에서 뽑은 보석 반지라도 도회적인 인상을 풍기는 그가 끼면 앞서가는 K-패션으로 호평받을 것이었다.

“안 들여보내 줄 겁니까.”

그런 남자였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제집처럼 거리낌 없이 들어오는 이도하는.

단단한 몸에 밀려난 세연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안으로 들여보낼 생각은 없었는데, 그는 그녀가 뒤로 물러난 공간을 차지하고는 현관문을 닫았다.

자연스럽게 이마를 조금 드러내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헤어스타일과 옆으로 보나 앞으로 보나 섬세한 이목구비. 그리고 한참 올려다봐야 하는 187cm의 신장과 맞아떨어지는 긴 다리와 떡 벌어진 어깨.

그는 일인용 가구로도 꽉 차는 작은 평수에서 사는 자신이 욕심내서는 안 될 남자였다.

그가 사귀자고 할 때부터 왜 이런 남자가 나를……? 하고 의문을 품어 왔었다.

그 의문을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덜 상처받았을 텐데.

재력이면 재력, 얼굴이면 얼굴. 모든 면에서 우월한 남자가 날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어.

“좋은 곳이군요.”

따로 놔둘 공간이 없어 현관과 바로 이어지는 거실에 침대가 놓여 있었다.

열한 명의 인원이 축구를 해도 될 만큼 넓은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작은데요?”

자격지심이 어린 세연을 돌아본 도하가 내뱉은 말을 깔끔히 철회했다.

“사실 입에 발린 소리고. 세연 씨의 손길과 발길이 닿는 곳이라서 마음에 듭니다.”

또 속지 마.

그는 내 몸에만 관심 있는 거야.

“더 기다려 줘야 합니까.”

겨냥하는 눈빛, 새까만 눈동자는 세연의 작은 움직임이라도 놓치지 않을 것처럼 조금도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노린다는 걸 알 수 있게.

내게만 보여 준 그의 모습이 나와 자려는 시도라면.

‘착각할 만했어.’

진짜로 날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고.

다가오는 마음에 다른 의도가 섞여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다정하게 날 대하는 그 때문에 잠들 때까지 행복했고.

내게 보이는 마음을 붙잡을 수 없어 애탔으며.

자신의 마음을 돌리려 그가 가진 것들로 유혹했을 때는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설렜었다.

그리고, 뼈대가 굵어도 아름다운 손이 제 몸에 닿았을 땐 그와 살결을 맞댄 것이 아닌데도 애인이 주지 못하는 짜릿한 감각을 은근히 즐기기도 했었다.

오래가지 않을 듯한 연애를 기다려 줬으면 하는 욕심에 그를 떨치지 못한 제 잘못이 이렇게 돌아왔다.

그가 날 호기심으로, 잠깐 놀 여자로 여기고 접근했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알았다는 것에 안도해야 하나.

“언제까지 날 세워 둘 겁니까.”

“기다리지 못할 거면 나가 주세요.”

제 마음에서요.

마음을 숨긴 날 선 말에 도하가 삐딱한 웃음을 걸쳤다.

하, 하고 웃고는 팔짱을 낀 그가 더 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거린다.

“멋대로 들어온 건 대표님이에요.”

“정말로 싫었다면 날 밀어냈어야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매끈한 입술을 올렸다. 날렵하게 올라가는 입술선이 예술적이었다.

“너무해요.”

자초지종도 없이 세연은 자신이 느낀 기분을 직설적으로 말했다.

“너무해?”

“네. 나빠요.”

“뭘 했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도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기다리는 건 그의 성미와 맞지 않았다. 미간을 찡그린 도하가 몇 걸음 안에 다다른 침대에 걸터앉았다.

“시작이나 했으면 얼마든지 나쁘다는 소리를 들어 줄 텐데.”

넥타이를 푸는 그의 손동작이 거칠었다.

“왜…….”

왜 그러느냐는 목소리가 채 나오지 못하게 도하가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이렇게 된 거 나쁜 놈 소리 들어 보려고요. 내가, 응? 그 소리 안 들으려고 얼마나 성깔을 죽였는데.”

“…….”

“괜한 짓 했네?”

질책하는 눈빛을 가리지 않으며 그가 짧게 웃었다.

“말해 봐요. 뭐 때문에 날 매도하는지. 증거 없이 날 몰아세우려는 건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한순간 할 말을 잃은 세연은 아랫입술에 잇자국을 슬며시 냈다.

도하가 다른 여자를 집에 들여보내는 정황은 구진형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었다.

“……진형 선배님이 갖고 있어요.”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에 도하가 섬세한 낯을 구겼다.

“구진형 씨의 말만 듣고 날 피했다는 거군요. 내 말은 들어 보지도 않고.”

“…….”

“너무한 쪽은 정세연 씨 아닙니까. 너무하다 말할 사람은 나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요? 안 그래요?”

잘못한 건 그인데도 자신이 나쁜 짓을 한 것 같아 세연은 얼떨떨하게 되받아쳤다.

“제 눈으로 보았는데 무슨 말이 필요해요.”

“직접 본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그 여자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가요?”

“내가 여자가 아쉬울 놈으로 보였나 봅니다. 세연 씨에게 안달복달하는 건 부정하지 않겠는데 날 파렴치한 새끼로 본 건, 좀 많이 화가 나네요.”

몸을 부딪칠 것처럼 거칠게 다가오는 도하를 막지 못한 세연은 벽에 닿은 어깨를 가쁘게 달싹거렸다.

그가 건장한 몸으로 그녀를 가뒀다.

뼈대가 굵은 이도하의 몸에 세연은 빠져나갈 틈을 찾지 못했다.

“여전히 날 못 믿는 거 같으니, 그냥 내 뜻대로 하죠.”

그녀 때문에 망친 기분을 풀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었다.

나쁜 놈 소리를 듣겠다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슈트의 상의를 벗기 시작했다.

그의 성질을 돋운 세연의 두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건실한 근육의 모양새가 드러난 셔츠의 단추 부분이 미어지게 팽팽했다.

참아 온 욕구를 벗어던지기라도 하는 듯이 단추를 푸는 손길에 망설임이 없었다.

정작 벗는 건 그인데도 세연이 위협을 느꼈다.

세연은 빈틈없는 철창처럼 짜인 근골의 몸을 당황한 시선으로 더듬다가 은밀한 밑으로 연결되는 치골을 보고는 다급히 눈을 감았다.

“읏. 옷, 입어 주세요.”

“날 믿는 겁니까.”

대답 못 하고 있자 도하가 그녀의 손을 잡아채듯이 움켜쥐고서 맨살이 드러난 제 가슴팍에 올렸다.

부드러운 살결에 저도 모르게 눈을 뜬 세연은 제 손이 놓인 곳을 깨닫고는 벌게진 눈가와 뺨을 떨었다.

“이러지 마세요!”

도하는 잡힌 손을 빼내려는 세연을 아프지 않게 제압했다. 그리고 고이 가둔 열기를 실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말해 봐요. 안 그럼, 나 당신 절대 포기 못 해.”

그가 제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이 손을 비롯한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을 안다.

세연은 도하의 목 아래로 시선이 내려가지 않게 턱을 치켜들었다.

“절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납득 못 하겠군요. 그런 거라면 구진형을 택해서는 안 되죠. 그 자식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런 놈이 되는데 내가 안 될 이유는 없어.”

“저를, 정말로 좋아한다고요?”

“날 믿지 못하는 여자한테 매달리는 거 보면 모릅니까. 누가 우위에 있는지.”

“내 몸을 원해서 그런 거잖아요.”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세연의 눈이 흐무러지듯이 촉촉해졌다.

“어떻게 원하지 않을 수 있지. 내가 반한 여자고, 애인이 있다는 걸 알았어도 포기가 안 될 정도로 매력적인데.”

현혹돼서는 안 되는데,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그의 심장박동처럼 그녀의 가슴도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날 믿어 주려나.”

맛이라도 느껴지는 것처럼 열기로 뭉친 두 눈으로 그녀를 주시하던 도하가 한시도 놓아 주지 않은 손을 이끌고는 현관 쪽으로 몸을 틀었다.

* * *

스물셋의 세연은 강단에 선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다니는 대학교에서 초빙한 남자는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나이로, 최근 인지도가 대폭 상승한 기업의 대표였다.

“광고 대행사 ‘제이온’ 대표, 이도하입니다. 재학생 여러분에게 유익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취업 준비생들이 지원하고픈 기업 순위에서 대기업을 제치고 1위에 뽑힌 이유엔 그가 이룬 업적이 없진 않겠지만, 한눈에 시선을 잡아끄는 외모도 한몫했을 것이라고 세연은 생각했다.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눈매의 눈동자는 멀리서도 색을 잃지 않았다.

단상을 비추는 조명처럼 빛나는 이목구비는 감탄이 나올 만큼 섬세하고도 조화로웠다.

아름답다.

친구가 초절정 미남을 보러 가자고 했을 때, 얼마나 잘생겼나 싶었는데.

응.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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