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86화 (186/186)

?186화

* * *

“왜 도망쳤느냐고는 묻지 않을게요.”

언젠가, 그토록 커다랗게 보였던 레오나르도는 조금 왜소해진 몸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보다는 커서, 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간 기억을 잃어서 못 돌아오셨다는 말씀, 믿어요.”

“…….”

“그리고 저를 보는 순간 기억이 돌아오셨다는 말도요.”

“…….”

“하지만 황도로 가지 않으시겠단 말은 믿지 못할 것 같아요.”

레오나르도가 움찔거렸다. 이내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덜컹, 덜컹, 곱지 못한 길을 돌아가는 마차가 흔들렸다.

“드세요.”

나에게 손바닥을 치료받은 카르시안이 레오나르도에게 물을 건넸다. 레오나르도는 그 물컵을 바라보다 받아들고 마셨다.

“돌아가셔야 해요.”

“그럴 수 없어.”

“왜요?”

“…….”

“왜 돌아가실 수 없는데요? 이미 국장이 치러져서요? 그거 다 에메르나 전 황비의 짓이었어요. 그렇게 급하게 장례를 치른 것부터가 이상했어요.”

“그게 아니야.”

“그러면요? 설마 사람들이 폐하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요? 그럴 일은 없어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친자 검사를 하면 돼요. 저도 그렇게 해서 황녀가…….”

난 입을 꾹 다물었다. 문득 이 상황이 기묘하단 생각이 들었다. 레오나르도는 황제고 나는 황녀다. 이게 무엇을 뜻하겠는가? 우린 부녀란 거다.

그런데 우리는 부녀의 애틋한 재회를 하기도 전에, 그전에 서로에게 느꼈던 이상하고도 강한 이끌림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기도 전에, 다투고 있었다.

그것도 집으로 가자, 난 가지 않아, 하는 괴상한 이유로.

난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가셔야 해요.”

“그럴 수 없어.”

“왜요?”

여전히 레오나르도에게선 대답이 없다. 난 이제 익숙했다. 기실 이런 대화는 벌써 여섯 번째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르시안이 괜히 그에게 물을 건넨 게 아니었다.

덜컹거리던 마차가 천천히 조용해지기 시작한다. 포장된 도로로 넘어온 것이다. 그것을 느낀 레오나르도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날 내려 줘.”

“그럴 수 없어요.”

“명령이야.”

“지금은 황제도 아니라면서요?”

나의 맹랑한 말에 레오나르도의 녹색 눈에 일순간 노기가 담겼지만, 이내 그건 짙은 감동과 너그러움으로 누그러졌다. 오히려 내가 그에게 대든 것이 기쁘다는 듯이.

가슴이 술렁거렸다. 모든 기억이 돌아왔으니 마땅히 화를 내도 당연한 이 상황에, 나를 보자마자 표정부터 허물고 보는 아버지의 모습.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가 치미는 것 같기도 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하.”

레오나르도가 짤막한 웃음을 흘렸다.

“그때, 정말 내가 뭔가에 씌긴 한 모양이야.”

“……?”

“이렇게 닮았는데…….”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그가 나에게서 루니아 황후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내 레오나르도가 다짐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면 안 돼서 그래. 지금 아론은 황제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어. 그런데 내가 가 봐, 그 아이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잖아.”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난 그의 말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레오나르도의 마음을 돌리지 못할 거란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난 그의 딸이긴 하지만 우리 사이엔 너무도 많은 공백이 있다. 그리고 그건 레오나르도와 아론도 마찬가지다. 아론이 나와 레오나르도의 공백을 메워 주지 못하듯, 나도 그러지 못한다. 그러니까 저 공백은 아론만이 메울 수 있다.

난 이제야 카르시안과 단둘이 여행을 온 게 후회가 됐다.

행선지라도 알릴걸!

그럼 레오나르도를 온갖 말로 붙잡아 두는 동안 아론을 불러올 수 있었을 텐데! 무릎을 내리치고 싶을 정도로 아쉬웠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아론의 생각은 어떨까?

아론은 레오나르도가 루니아를 뒷전에 둔 채 에메르나와 갖은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을 보며 자랐다.

아버지가 밉지 않을까?

뒤늦게 레오나르도의 정신이 돌아오고 그가 그동안 세뇌를 당했단 것도 알게 된 지금도, 레오나르도를 미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아무리 레오나르도도 피해자라고는 하지만, 루니아가 상처를 입은 일이 없는 일이 된 건 아니게 되니까.

그래서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걱정은 정말 기우였는지.

“무슨 일이야?”

마을의 여관 쪽으로 마차를 몰던 마부가 우뚝 멈춰 서더니 자리에서 내려와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카르시안의 물음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웅성거리는 인파 너머를 손짓했다.

나와 카르시안, 그리고 반대쪽을 보고 있던 레오나르도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우리 셋은 동시에 숨을 집어삼켰다.

“헉!”

“……!”

“……!”

거기엔 놀랍게도 황가의 인장이 양각된 호화로운 마차가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엔 내게 너무도 익숙한 사람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루니아 황후와 아론 황태자, 그리고 클로드와 헥터!

네 사람이 사람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얼굴로 느긋하게 서 있었다.

“어, 어떻게 여길…….”

“카르시안, 네가 알렸어?”

“아니! 내가 너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왜 단축하겠어?”

레오나르도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도 루니아와 아론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와 카르시안이 투닥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난 정말 아니야. 난 할 수만 있다면 너와 영영 도망치고 싶어 했잖아.”

카르시안이 정말 억울하단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우리가 여기로 온 이유는 도중에 레오나르도를 만나 황도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만약 레오나르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여기로 오지 않았을 터.

그렇다는 말은…….

“우릴 추적하고 있었구나.”

저 네 명이 독자적으로 우릴 따라오고 있었단 소리가 된다.

“우리 둘만 여행하는 걸 반대하셨거든. 내가 미성년자니까.”

“날 너무 파렴치한 사람으로 보고 계시는군.”

나와 카르시안의 대화에 꼼짝도 않고 루니아와 아론만 보던 레오나르도의 몸이 움찔거렸다.

“…….”

그리고는 녹색 시선에 희미한 경멸을 담아 카르시안을 쳐다본다.

“……오햅니다.”

카르시안이 바로 부정했지만 레오나르도는 이미 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자신 쪽으로 조금 이끈 후였다. 과연 황제! 나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에스코트였다.

“……진짜 오햅니다.”

카르시안이 시무룩하게 말을 이었다.

“저도 사고라는 걸 합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믿어 주지 않을 듯 보였다.

그 뒤로도 카르시안이 변명을 구시렁거렸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직 저 밖의 네 사람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상한 질문이다. 난 조금 전까지 레오나르도를 데리고 황도로 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레오나르도를 가장 기다렸을 이들을 앞에 두고서, 이런 질문이라니.

아니, 사실은 알고서 한 질문이다. 이제 레오나르도는 가타부타한 거짓말로 자신을 숨기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루니아와 아론을 보는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 담긴 건 강한 사랑과 그리움이다. 저런 시선을 가진 이가, 나의 물음에 돌려줄 대답을 정해져 있었다.

“……만나고 싶어.”

내 입꼬리는 나의 의지를 떠난 듯 씩 올라갔다.

이때였다.

“!”

레오나르도의 몸이 흠칫 떨렸다. 왜 이러나 싶어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론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레오나르도의 녹색 눈과 아론의 녹색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아론이 입을 벌렸고, 비록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

아론은 레오나르도를 알아봤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자신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저 사람은!’이나, ‘황제 폐하!’가 아니고 ‘아버지.’.

문득 루니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드디어 우리 가족이 다 모이는구나.’

그럴 리 없지만 그 말이 꼭 지금을 예견한 것만 같이 느껴졌다.

* * *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하이페디움 황제 폐하 만만세!”

펑! 퍼펑! 펑!

축포가 터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밖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새로 즉위한 황제를 드높이는 목소리가 우렁차게 거리를 울렸다.

그래, 오늘은 즉위식이었다.

나의 오빠, 아론의 즉위식 말이다.

오늘 그는 황제가 된다.

“아가씨, 한 바퀴 돌아보시겠어요?”

“뭘 또 돌아. 귀걸이 하나 바꿨다고 빙글 도는 게 얼마나 귀찮은데.”

“하지만 오늘은 황제 폐하의 즉위식이잖아. 확인해서 나쁠 거 없어.”

메리와 앤이 늘 그렇듯 투닥거렸고.

“메리, 앤! 아가씨가 아니고 황녀님이잖니!”

수잔이 익숙하게 그 둘을 타박했다.

“황녀 저하, 라움디셀 공자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길버트가 황녀궁 시종장의 옷을 뽐내며 말했다.

난 익숙한 이들에게 둘러싸여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곧 나갈 거라고 전해 줘.”

“네, 알겠습니다.”

길버트가 빳빳하게 다림질한 타이를 한 번 만지고 파우더룸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벌써 내년이면 황녀 저하께서도 성인이 되시죠?”

“아직도 일 년이나 남았다니! 카르시안 도련님이 매일 왜소해지고 있다던데, 정말일까?”

“왜소해지긴. 볼 때마다 장성해 계셔서 남자는 성인이 되어도 큰다는 말을 실감하는데.”

수잔, 메리, 앤이 재잘거렸다. 난 거울 속에 담긴 모습을 보며 지난 2년간의 일을 짤막하게 회상했다.

카르시안과 냅다 단둘이 여행을 떠난 건 아주 많이 혼이 났다. 카르시안과 나는 자숙의 의미로 2주간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사이 우리 가족, 그러니까 라움디셀 가문이 아니고 에멜하르트 가문의 가족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기에 그 2주가 길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카르시안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난 이제 라움디셀의 아가씨라는 이름보다 에멜하르트 황녀라는 이름에 더 익숙해졌다. 여기엔 나의 에멜하르트 가족의 도움이 아주 지대했다.

그리고 우리는 2년이란 시간을 평화롭게 보냈다. 아무도 괴롭히는 사람 없이, 물론 아주 바빴지만 그 바쁨마저도 즐거울 정도로 행복하게.

그리고 지난 달, 나의 오빠인 아론은 아버지로부터 황위를 계승했다. 아론은 아직 자신은 부족하다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한적하게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시간을 채우려면 2년 전에 물려줬어도 모자랐을 거라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는 아론은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고.

난 자리에서 일어나 카르시안이 기다리고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황녀궁 정원의 오랑제리 근처 분수대. 카르시안은 늘 거기서 날 기다렸다. 이 분수대는 공작성의 안뜰에서 공수해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카…….”

난 그를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멋들어진 정복을 입은 남자가 분수대 근처에 쭈그리고 앉아 뭔가를 만드는 데에 열정적이었다.

대체 뭘 만들기에 내가 다가가는 것도 모르는 걸까? 궁금해서 슬그머니 다가간 때.

“잡았다.”

“꺅!”

그가 언제 등을 돌리고 있었냔 듯이 불쑥 몸을 돌려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난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는데, 카르시안은 환한 웃음이나 터트리고 있다.

“노, 놀랐잖아!”

“네가 살금살금 오는 게 좀 귀여워야지.”

카르시안이 내 볼을 콕 찔렀다. 이제 이만한 이야기엔 얼굴도 붉히지 않을 만큼, 오히려 기꺼워할 만큼 강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주변의 시선은 더욱 카르시안에게 매서워졌다.

지금도 봐라, 저기 기둥에 서 있는 길버트의 눈에 서슬이 퍼런 것을. 내가 곧장 떨어지지 않으면 길버트는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에게 고스란히 일러바칠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카르시안과 단둘이 여행을 다녀온 게 화근이 된 것 같다.

난 카르시안을 밀어내며 말했다.

“뭘 하고 있었어?”

“화관을 만들고 있었어.”

이런 우리의 사정은 카르시안도 익히 아는지라, 그는 별로 아쉬워하는 기색 없이 떨어졌다. 스킨십을 한 번 짙게 할 바엔 얕게 여러 번 하겠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거기에 나의 의사는 딱히 반영되지 않았지만.

“화관?”

“응, 맞아. 내가 아카데미 가기 전에, 네가 만들어 줬던 거 기억나?”

“아.”

“오늘 아론 황태자 전하께선 황제의 관을 쓰시지. 그런데 네 머리는 허전할 것 같아서.”

카르시안이 꽃밭에 잘 보이지 않도록 숨겨 둔 화관을 꺼내 들었다. 얼기설기 엉킨 것이 어딘가 엉성해 보이긴 해도 그래도 분명한 ‘관’이기는 했다.

카르시안은 내 머리 위로 살며시 화관을 씌워 주며 말했다.

“이제 일 년밖에 남지 않았어.”

“…….”

“지금은 네게 황녀의 화관을 바치지만, 일 년 뒤. 난 여기서 네게 공작 부인의 반지를 바칠 거야.”

“…….”

“그러니까 거절하고 싶거든 지금부터 바쁘게 생각해야 할 거야. 난 네가 거절할 때 쓸 약 29213가지의 말에 모든 반박 거리를 준비해 둔 상태거든.”

“뭐, 뭐야? 그 숫자는…….”

아무튼 그의 말뜻은 알겠다. 나에게 거부권은 없다는 거겠지. 하지만 난 기분이 좀 상했다. 난 내게 화관을 씌워 주고 떨어지려는 카르시안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

내가 이럴 거라고 미처 예상치 못했는지 카르시안이 조금 휘청거렸고, 난 기다렸단 듯 발뒤꿈치를 올렸다.

“……!!!”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크게 뜨이는 게 보였다. 하지만 너무 가까워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맞닿은 우리의 입술은 이토록 선명하니까.

“아악!”

“세상에!”

“어머!”

“핫……!”

뒤에서 길버트와 수잔, 메리와 앤이 나란히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없었다.

난 꾸욱, 아주 꾸우욱. 도장이라도 찍는 것처럼 그에게 입을 맞췄다가 떨어졌다. 그리고는 얼떨떨해 보이는 카르시안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황녀가 공작 부인이 되는 게 아냐. 네가 나의 남자가 되는 거지.”

“…….”

카르시안이 조용히 입을 벌렸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내가 어찌할 새도 없이.

“읍!”

내가 멋대로 입을 맞췄던 그 말캉함이 다시 찾아왔다. 분명 간격은 똑같을 텐데, 아니. 카르시안이 고개를 틀었으니 더 가까울 텐데, 그의 눈동자가 아주 잘 보였다.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향한 욕심과 마음으로 열렬히 타오르며 선명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하고 온몸에 가벼운 전율이 생길 정도로.

난 눈을 감았다. 내가 끌어안는 목을 내 쪽으로 더 당기며, 그 사이로 들리는 대답을 들었다.

“부디 그렇게 해 줘.”

1년 이른 프러포즈였다.

* * *

긴 금발을 발목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린 남자가 성스러운 흰 대리석 바닥을 걸었다. 매끄러운 맨발은 그가 평소 잘 걷지 않는다는 반증이었다.

남자의 등 뒤로 늘어진 흰 날개의 끝엔 붉은색이었다. 그는 기지개를 켜듯 그 날개를 한 번 펄럭거리며 높은 단상 위로 걸어갔다. 그리고 꼬장꼬장해 보이는 동그란 안경을 쓴 노인의 앞에 종이를 내려 뒀다.

[음? 금자 아니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어째선지 중후한 목소리가 들린 착각이 들었다.

[이건…… 개명 신청서? 왜?]

“어차피 모든 능력을 빼앗겨서 더 이상 금자도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 지난 8년간 아무 탈 없이 지냈지 않으냐. 그냥 금자로 살려는 거 아니었어?]

“그러려고 했는데요.”

긴 금발을 가진 남자가 머리칼을 한 번 쓸어넘겼다. 약간의 짜증과 약간의 그리움, 또 속 시원함이 깃든 표정이었다.

“딸까지 저를 ‘삐로리’라고 부를 줄은 몰랐거든요. 그러니 이름을 바꿔야죠. 두 번이나 준 이름인데.”

그에 꼬장꼬장해 보이는 동그란 안경을 쓴 남자의 입가에 빙긋 웃음이 돌았다. 이윽고 남자는 허공에 이름을 적었다.

〈삐로리〉

그것을 확인한 금발의 남자, 삐로리의 얼굴이 체념과 만족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무운을 비마. 그 아이들은 너무도 똑똑하거든. 그래서 기어코 너의 첫 번째 아이가 뒤집어쓴 거짓말의 죄를 벗겨줬잖으냐.]

노인의 말에 삐로리는 피식 웃었다.

“네. 제가 말하지도 않은, 저의 목표를 이뤄 줬죠. 그러니 괜찮습니다, 또 들켜도. 회포나 풀죠. 뭐.”

그렇게 말한 삐로리는 양옆으로 날개를 우아하게 펼쳤다. 이윽고 스스로를 감싸 날개의 고치 속에 숨더니, 이내 작은 새로 변했다.

‘그들’에게 가장 익숙할 그 모습으로, 다시금 친구들을 향해.

ㅡFin

By.[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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