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 * *
카르시안과 여행을 한 지 벌써 이틀째였다. 어제 인질과 납치범은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한다며 들떴던 카르시안은 오늘 아주 우울해 보였다.
“납치인 줄 알았는데…….”
“에이,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우리가 여행하는 건 사실이잖아.”
“하지만 납치범에겐 돌아갈 곳이 없잖아. 이대로 같이 수색대를 피해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충격받을 일이야? 서운해할 일이고?
카르시안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생각을 읽지 못할 적부터 그러긴 했다만.
그러면서도 카르시안은 지난 이틀간 나의 편의를 봐줬다. 내가 멋대로 굴어서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아, 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카르시안에게는 나의 연락이 없던 지난 석 달간이 트라우마를 자극했을 수도 있는데.
사실 내가 갑자기 카르시안을 ‘납치’한다며 그의 마차 안에 수면 가스를 살포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카르시안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카르시안은 나에게 화가 났을까? 나는 그를 어떻게 달래 줘야 할까? 과연 만날 수는 있을까? 어색하진 않을까?
카르시안을 만나기 전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고민들 때문에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다.
“라티아. 여기서 조금 더 가다 보면 마을이 하나 나온대.”
“아, 응.”
지난밤, 이런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들은 카르시안은 나를 ‘바보’라고 한 번 놀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다. 지금도 카르시안이 지도를 보며 우리가 가는 길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고 있다.
그래서 난 창밖만 물끄러미 바라봤는데, 이때였다.
“……어, 어, 어?!”
?
풍경을 잘 볼 수 있도록 느리게 지나가는 마차의 창밖 너머로,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녹색 눈.
남자는 분명 나와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서 급히 몸을 돌리고, 마차와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카르시안, 잠깐만! 마차를 세워!”
“뭐?”
내 외침에 카르시안은 놀라면서도 마부와 연결된 내부 종을 흔들었다. 마부가 놀라 마차를 멈춰 세웠고, 난 기다렸다는 듯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어젠 하녀나 다름없는 옷을 입고, 허름한 마차를 탔지만 오늘은 아니다.
내가 자는 사이 카르시안이 마차를 새로 수배하고, 살에 닿는 천이 보드라운 드레스를 사 온 것이다. 그래서 난 지금 영락없는 귀족 영애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내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달리니.
“세상에!”
“다들 비켜 드려!”
길가를 메운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 줬다. 덕분에 나는 방해하는 사람 없이 내가 쫓는 사람을 따라갈 수 있었다.
“라티아!”
뒤에서 카르시안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난 빠르게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외쳤다.
“저분을 잡아야 해!”
카르시안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곧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졌다. 나의 뒤에 있던 카르시안이 어느새 나를 앞지르고 있었다.
“흔적을 남겨 줘!”
“알았어.”
대답한 카르시안은 모퉁이를 돌 때마다 내가 잘 따라올 수 있도록 안내도 해 줬다.
붉은 손바닥 자국.
그가 남긴 흔적 덕분에 난 몇 개의 모퉁이를 만났어도 망설이지 않았는데, 문득 그 흔적을 무엇으로 남겼는지 깨달았다. 동시에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이건 피였다.
너무 놀랍고 화가 난 나머지 온몸에 열이 확 돌았다.
흔적을 남기라고 했지, 누가 손바닥에 상처를 남기라고 했어!
“카르시안, 이 바보!”
난 그를 탓하며 다리를 움직였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지금 그는 느닷없는 나의 부탁 때문에 한 괴한을 쫓고 있다.
무엇하나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은…….
그래, 이 방법밖에 없겠지!
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놓치기 싫은 사람이긴 했다. 놓치면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카르시안을 다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양가적인 마음 때문에 또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카르시안은 정말 나에게 헌신을 다 하고 있구나.
글라델리스 후작저에서 살 때도. 공작성에서 지낼 때도. 그가 아카데미로 갔을 때도. 황도 봉쇄령이 내려져서 그에게 멋대로 편지를 뚝 끊었을 때도. 에메르나 황비와 제네스를 공격할 때도. 지난 석 달간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카르시안은 한시도 빠짐없이 나를 최우선으로 대하고, 나의 뜻을 이뤄 주기 위해 노력하고 따라 주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고 깨달은, 그래서 계속해서 곱씹던 이 사실을 그의 손바닥이 남긴 자국을 보며 다시금 생각하자 불현듯 가슴이 뭉클 차올랐다.
“헉, 허억…….”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을 때, 난 무릎을 짚었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고 옆구리가 찢어질 듯 아팠고, 갈비뼈가 깨질 듯 숨이 찼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게, 어릴 적보다 훌쩍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똑같은 목소리로 카르시안이 말했다.
“잡았어, 라티아.”
목이 탔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자 카르시안도 조금 숨을 몰아쉬며 한 남자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밝기만 했다.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하지만 난 그를 마주하는 대신 늘어뜨린 손을 바라봤다.
똑…… 똑…….
몇 번의 모퉁이를 짚어도 선명한 손자국을 낼 만큼 깊게 낸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흔적을 남기라고 했지, 누가 다치라고 했어?”
내가 도끼눈을 뜨고 묻자 카르시안의 붉은 눈이 어렴풋이 흔들렸다.
“그치만…….”
웅얼웅얼 변명하려고 하지만 난 들어주지 않았다.
“일단 지혈하고 있어. 이따가 치료해 줄게.”
“응, 알았어.”
그리고는 다가온 내게 얼른 쥐고 있는 남자의 손목을 건넸다. 난 고개를 가로젓고 지저분한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는 남자의 앞에 섰다.
“괜찮아, 카르시안. 놓아드려.”
“하지만…….”
“정말 괜찮아. 아니, 지금 이렇게 불경하게 잡고 있는 게 더 안 괜찮아.”
내 말에 카르시안은 손수건을 찢어 상처를 지혈하면서도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난 그런 카르시안에게 보란 듯이 남자의 후드를 젖혔다.
쨍하게 부서지는 오후의 햇살에 은빛 머리칼이 빛났다. 산산이 부서지는 빛에 눈이 다 시릴 지경이었다. 아무렇게나 기른 은발은 귀밑에서 찰랑거렸고, 긴 앞머리는 대충 쓸어 넘겨져 있었다.
“다, 당신은……!”
지혈하던 카르시안이 깜짝 놀라 입을 벌렸고, 난 남자의 체념한 녹색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뵙네요, 황제 폐하.”
나를 보자마자 도망친 괴한. 그는 다름 아닌 죽었다던 레오나르도 황제였다.
* * *
한 남자가 강가에 쓰러져 있었다. 마침 그 길을 지나던 낚시꾼이 그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체온증으로 수 시간 내에 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이를 두고 그를 구한 낚시꾼은 하늘이 돕고 있다고 했지만,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하늘이 그를 돕고 있다면, 왜 그의 기억을 앗아갔을까?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소?’
‘…….’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에메르나의 수하가, 기절한 남자를 조금 더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버렸다면 또 모른다.
그가 국장이 치러진 이 제국의 황제, 레오나르도라는 걸 알아봤을지도.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은 국경이며, 엄밀히 따지자면 하이페디움의 영향력보다 이웃 나라의 영향력이 더 강한 마을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이곳에 기억을 잃고 흘러 들어온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기실 알아봤다 하더라도 ‘에이, 설마.’ 하고 넘겼을 것이다.
황제는 이미 장례식을 치른 후였으므로.
남자는 기억을 잃은 채 살아갔다. 마을의 잡역부가 되어 노인들의 고충을 해결해 주고 그날의 식사를 제공받았다.?
기억을 잃기 전 대체 무슨 일을 했던 건지, 남자는 아주 힘이 좋았고 또 영특했다. 덕분에 남자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일꾼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부탁에 고단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건 기쁜 법이다.
남자는 매일을 충만하게 보냈다. 얼마 전, 하이페디움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라움디셀 공작가의 아가씨가 사실은 황녀였고 이를 천사가 강림해서 진실임을 입증했다는 소문을 듣기 전까지는.
그날 이후로 남자의 일상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때때로 환각을 보는가 하면 환청이 그를 뒤덮고, 끝내는 악몽으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아, 그건 정말 지독한 꿈이었다.
노인뿐인 마을에서 쓸모를 다하며 잡역부로 사는 남자가 황좌에 앉다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잊어버리고, 딸을 잃어버린 것조차 잊어버리다니.
그 소중한 추억을 앗아 간 여자에게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이며 조종당하다니.
남자는 잠에서 깰 때마다 항상 헐떡거렸고 땀으로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흠뻑 젖어 자신을 더듬어야 했다. 그리고 생각한다.
‘휴, 싸구려 옷이라서 다행이야.’
하지만 그것도 당장 조금 전까지의 일상.
“귀족의 마차가 왔대.”
“이런 시골 마을까지 대체 무슨 일이지?”
남 말 하기 좋아하는 노인들의 이야기에 조금 호기심이 동한 게 잘못이었을까?
사람들 틈으로 섞여들어 우아하게 관절을 굽히며 마차를 모는 말을 구경할 때였다.
“……!”
“……!”
마차 속에 타고 있는 고귀한 영애와 눈이 마주쳤다. 그 보라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남자는 모든 것을 깨닫고 말았다.
단순히 지독한 악몽이라 치부했던 진실이, 그 순간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