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라움디셀 공작성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여행 갈래?]
달랑 한 줄뿐인 내용이었지만, 그 편지는 공작성에 그야말로 봄을 가져왔다.
“여행 준비를 하죠!”
“짐 마차를 닦아 두겠습니다!”
하인들은 벌써부터 어떤 말을 데려가네, 마차는 몇 개로 하네, 말이 많았다.
“가방은 여섯 개면 될까요?”
“혹시 모르니 라티아 아가씨의 짐도 정리해 둘게요.”
“어머, 그 드레스를 챙기는 게 좋겠어!”
하녀들은 편지를 받은 사람보다 라티아의 짐을 더 열심히 챙겼다.
“호위 기사는? 기사는 안 필요하대?”
“부리기 편한 시종이 있으면 더 즐거운 여행이 될 텐데!”
헥터와 길버트도 신이 난 눈치였다. 저쪽에서 혼자 큼, 큼! 하고 헛기침을 하고 있는 버틀러의 얼굴엔 애매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 편지를 받은 주인공.
“일단 황도로 간다. 짐은 나중에 알아서 부쳐.”
카르시안은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편지를 확인한 지 불과 5분여 만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카르시안이 멀끔한 얼굴로 인사하고 몸을 돌린 때였다.
“잠깐!”
공작성이 한차례 어수선해진 후에야 라티아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단 소식을 들은 클로드가 다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오며 외쳤다.
“공작님, 체통을……!”
이에 버틀러가 기겁했으나, 클로드의 귀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편지를 다시 확인해 봐야겠다.”
클로드는 진지하게 말하며 카르시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라티아가 카르시안에게 보냈다는 편지엔 달랑 한 줄이 적혀 있었고, 수신자는 카르시안이었다. 거기에 클로드에 대한 안부나, 그도 함께 하자는 말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사칭일 수도 있어.”
“제가 라티아의 필체를 못 알아볼 리가 없습니다.”
카르시안이 턱을 쳐들며 오만하게 말했다. 그는 황도 봉쇄령이 내려졌을 당시 라티아가 보낸 몇 안 되는 편지를 분석하다시피 매일 읽었던 사람이다.
“요즘 사칭범들은 아주 교묘하다더군.”
“사칭해서 쓸 만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내 이야기가 없지?”
“함께 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죠.”
클로드가 으르렁대자, 카르시안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 없어. 그리고 첫 편지가 너에게 간 것도 이상해. 응당 가주인 나에게, 아빠인 나에게 와야지.”
“명예 부녀가 언제적 이야기인데요.”
카르시안이 한 마디도 지지않자 클로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일단 줘 봐. 다시 확인해야겠으니까.”
“안 됩니다. 출발이 늦어질 겁니다.”
“그럼 편지를 두고 가면 되잖아.”
“파티에 어떻게 초대장 없이 갑니까?”
“가지 말라는 소리를 왜 못 알아듣지?”
“싫습니다.”
카르시안이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품에 고이 넣어 둔 편지를 들어 보였다.
“라티아가 저만 초대해 준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어도 갈 겁니다.”
그리고는 다시 쏙 집어넣는다.
그 모습을 본 클로드는 이제 바닥을 구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나도 같이 가!”
“아버지껜 초대장이 오지 않았잖아요.”
“원래 모든 초대장은 파트너의 몫까지 2인이 정석적이지.”
“하지만 아버지가 제 파트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전 이미 라티아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트너가 있으니까요.”
“안 돼. 너희 둘만 어떻게 여행을 보내? 보호자로서 절대 안 돼. 라티아는 아직 미성년자야!”
“황도에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어쩌면 황태자 전하나, 황후 폐하께서 동행하실지도 모르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카르시안은 클로드가 말할 틈도 없이 훌쩍 몸을 돌려 마침 대기중인 마차에 올라탔다.
“잠깐, 내려! 카르시안!”
“출발해.”
클로드가 매달렸으나 카르시안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마부 또한 클로드보다 카르시안의 말을 우선시 했다. 그도 지난 석 달간 혹한 같던 공작성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기에.
“카르시안, 카르시아안!”
하여, 쏜살같이 멀어지는 마차 뒤에는 클로드의 외침이 메아리칠 뿐이었다.
* * *
카르시안의 마차가 공작령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
“비켜라, 이 마차에 타고 계신 분이 감히 누군 줄이나 알고 마차 앞을 가로막는단 말이냐!”
약간의 소란이 생겼다. 카르시안은 여기로 보나, 저기로 보나 라티아의 필체가 분명한 편지를 뜯어보고 있었다. 글씨를 살며시 쓰다듬은 카르시안이 눈가를 찌푸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때였다.
“확인했습니다. 수송하겠습니다.”
카르시안을 확인한 괴인 무리들이 순식간에 마차를 둘러쌌다. 카르시안은 재빨리 검을 쥐려고 했지만, 픽!
소음기를 찬 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 창문이 깨지고 내부엔 자욱한 수면 연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큭……!”
카르시안이 재빨리 망토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으나 소용없었다. 벌써부터 아득해지는 정신 너머로, 카르시안은 편지를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감각이 둔해진 손바닥에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감촉이 느껴지자, 카르시안은 그제서야 정신을 놓을 수 있었다.
* * *
덜컹, 덜컹, 덜컹…….
마차가 흔들리고 있었다. 떨림을 최소화하기 위해 갖은 노력과 예리엘 만물 상단주의 마법까지 들인 마차인데도. 그렇다면 이유는 둘 중 하나다.
길이 엄청나게 험하거나.
‘내 마차가 아니거나.’
카르시안은 눈을 번쩍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어둠이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천천히 시력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어, 일어났어?”
그의 앞엔 아주 반가운 사람이 앉아 있었다.
“라, ……!”
칼칼한 목이 갈라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주 반가운 사람, 라티아는 웃으며 그에게 물통을 건넸다. 카르시안은 제가 묶이지 않은 걸 그제야 깨달았다.
“고마, ……큼.”
카르시안은 볼품 없는 목소리로 대답할 바엔 그냥 물을 마시기로 했다. 따갑도록 건조했던 탓에 물이 넘어가는 느낌이 고스란히 났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을 마시는 동안 생각하고 있을 때, 라티아가 말했다.
“카르시안.”
“응?”
“넌 지금 납치당한 거야.”
“……응?”
“우린 지금 국경을 넘고 있어.”
“……응?!”
너무 놀란 나머지 물통을 떨어뜨렸다. 꼴꼴꼴, 물이 흐르는 소리에 얼른 물통을 집어 들었으나 벌써 반이나 흘러 버리고 말았다. 그걸 본 라티아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마른 천을 꺼내 바닥을 닦았다.
“내가 할게.”
“아냐, 다 했어.”
라티아의 말대로 바닥에 흐른 물은 금방 정리되었다. 카르시안은 물통을 어디에 두지도 못하고 멍하니 쥔 채 라티아만 바라봤다.
이제 보니 라티아는 황녀나 공작가의 아가씨가 입을 법한 옷이 아닌 하녀나 잡부가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있었다. 밀빛 머리칼도 질끈 묶은 채였다. 물론 그마저도 아주 잘 어울려서 귀여웠지만.
“신고할 거야?”
“뭐?”
“나, 너 납치했다니까?”
라티아가 보라색 눈을 깜빡거렸다. 카르시안은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왜?”
“넌 납치된 건데?”
“넌 아직도 날 몰라.”
카르시안이 보란 듯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결연하게 말했다.
“난 언제나 네게 납치되고 싶었어.”
“……뭐?”
“넌 항상 바빴잖아. 너무 바빠서 날 내팽개칠 정도로 바빴지. 그 속에서 난 이미 사로잡힌 포로처럼, 양식되는 물고기처럼 너만 하염없이 기다렸어. 그럴 바엔 네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도망가길 바랐어. 겸사겸사 날 챙겨 주면 더 좋고.”
씩 웃는 얼굴에 거짓이나 농조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상황은 카르시안에게 너무도 즐거운 상황이란 것이다.
라티아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묶지는 않아?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옆에 꼭 붙어서 감시해야겠다, 그치? 납치범이 행선지를 말하는 경우는 없으니 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네? 그러니까 난 하루 종일 너만 보고 있으면 되겠어. 경계라는 명목으로.”
그러거나 말거나 카르시안은 즐거운 표정으로 떠들어댔다.
“환복을 할까? 난 벗고 있어도 돼.”
어쩐지 라티아보다 더 납치극에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그간 떨어져 있던 석 달이 카르시안을 조금 바꾼 것 같다. 해서, 라티아는 농담이었다는 진실을 알려 주지 못했다.
카르시안이 납치라는 말이 장난이었단 걸 안 것은 그날 밤,
“범인과 인질은 한 몸이지.”
라며 같은 방을 쓰자고 수작을 부릴 때였다.
* * *
카르시안이 탄 황도행의 마차가 습격당했다.
여기에 놀라거나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아서 잘 갔겠지.”
“클로드, 너 아직도 삐져 있냐?”
“신경 꺼.”
클로드와 헥터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라티아가 탄 여행용 마차가 사라졌다.
여기에도 놀라거나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 동생이 또 재미있는 일을 꾸미나 보네요.”
“내 딸이 하는 일이니 문제는 없겠지만,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
지난 석 달간 라티아는 정말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아론과 루니아를 놀라게 했으므로.
그러나 그 두 개의 소식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황성과 공작성은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잠깐만.”
“지금 라티아와 카르시안이 함께 있다는 소리잖아!”
“라움디셀 공작과 함께 움직이지 않는 게 확실합니까?”
“내가 확인했어요. 라티아와 카르시안 공자는 단둘이서 움직이고 있어요!”
클로드와 헥터, 아론과 루니아는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국경 너머에 있는 작은 강가 마을.
하이페디움 제국엔 전쟁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