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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83화 (183/186)

?183화

그 시각, 라움디셀 공작성에서는.

“하아아…….”

“길버트. 한숨 좀 그만 쉬, 후우우…….”

“그러는 버틀러 집사장님이야말로 한숨 쉬지 말, 휘유우우…….”

잇따른 한숨이 발치에 쌓이는 궐련 꽁초처럼 쌓이고 있었다. 이렇게 두서없이 한숨을 내쉬는 이들은 비단 버틀러와 길버트뿐만이 아니었다.

“휴…….”

“하…….”

“에휴…….”

바닥을 쓸고, 창틀을 닦고, 계단의 카펫을 정리하는 하녀들은 물론이고.

“휴우…….”

“스으읍…….”

“휘유…….”

말에게 먹이를 주고, 정원을 가꾸고, 분수대를 정리하는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쯤 되니 라움디셀 성은 하나의 거대한 한숨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연달아 한숨을 내쉰 지는 벌써 한 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라움디셀의 아가씨, 클로드의 명예 따님이자 예비 공자비인 라티아가 황녀궁에 머문 지도 한 달이 되어 가고 있었고 말이다.

“언제쯤 돌아오실까?”

“돌아오시긴 하나?”

“공작님과 공자님은 왜 데리고 오지 않으시는 거지?”

“설마 이대로…… 아예 돌아오지 않으시는 건 아니겠지?”

“히익!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이 한 달간, 얼마나 무서웠는데!”

“맞아, 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고!”

하녀들이 쑥덕거렸고.

“하녀들이 그러는데, 이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으실지도 모른대.”

“그게 정말이야? 이런…….”

“그럴 줄 알았어. 라티아 아가씨께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말씀을 하셨으니까 저 두 분이 이렇게 조용한 거 아니겠어?”

“난, 난 다른 일자리를 찾아봐야겠어.”

“나도, 나도! 내가 왜 공작성 밖에서 이렇게 한숨을 쉬는데!

“맞아, 성안에서는 숨도 제대로 못 쉬어서 그런 거란 말이야! 한숨이 아니라 심호흡이었다고!”

하인들은 지레 겁을 먹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네, 일전의 거길 알선해 주네 마네 떠들어 댔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엔 공작성 외부의 일.

내부는 하인들과 하녀들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적막하기만 했다.

“큼, 크흠…… 어흠. 크! 켁, 콜록, 콜록, 콜록!”

“헥터.”

“콜록, 콜록, 컥, 응? 쿨럭.”

“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콜록, 콜록…….”

“되도 않는 가짜 기침 그만하고.”

“아니, 콜록. 이건 진짜 사레들린, 헛기침하다가, 사례가, 콜록.”

헥터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목을 부여잡고 켈록거렸다. 그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붉어진 후에야 가까스로 기침 소리가 멎었다. 그러는 동안 클로드는 다섯 장의 서류를 검토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헥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안 가?”

“어딜.”

“황도에.”

“왜.”

“그야 황녀궁에 있는…….”

“있는?”

클로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헥터는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클로드의 표정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온화한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헥터는 그런 클로드가 그 누구보다 무서웠다.

‘왜, 왜 그런 깨달음을 얻어 달관한 표정을 짓는 거야, 또!’

헥터는 알고 있었다. 클로드는 극에 달하면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 둔다는 것을. 그래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객관성을 찾을 때까지 방관자로 지낸다는 것을.

그리고 이 시기의 클로드는 가히 ‘미쳐 있다’고 표현할 정도라는 것을!

헥터는 아랫입술을 꽉 감쳐물고 도리도리, 마구잡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 어! 나는 이제 나가 볼게! 뭐, 뭐, 해야 하거든!”

헥터는 혹시나 클로드가 저를 붙잡고 말실수를 꼬치꼬치 캐물을까 봐 겁에 질려 후다닥 도망쳤다. 그러나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다음.”

“허억, 허억……. 으악!”

“다음.”

“으, 으흑……. 제발, 자비, 를…… 아악!”

“다음.”

헥터의 걸음이 닿은 연무장에서 카르시안이 트라이던트 기사단을 학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한편엔 널브러진 기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헥터는 심란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갈 곳이 없는 건, 정말 슬픈 일이구나.’

헥터는 단 한 번도 길을 잃은 적이 없었다. 드넓은 바다에 표류하게 되었을 때도 고향이 없었기에 그는 자신이 조난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 바람과 해류만 있으면 못 갈 곳이 없었기에, 오히려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과거가 무색하게, 지금 헥터는 엉덩이 붙일 공간이 없는 것이 무척 슬퍼졌다.

“크하악!”

“다음.”

헥터가 이러한 감상에 빠져 있는 와중에도 카르시안은 무심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우두커니 선 헥터를 발견한 그의 붉은 눈동자에 총기가 깃들었다.

‘아차!’

헥터는 뒤늦게 후회했으나.

“헤, 헥터 대장님께서 오셨다!”

“대장님! 살려 주십쇼!”

이미 그를 발견한 기사들 때문에 도망치지도 못했다. 헥터는 클로드와 함께 있는 집무실과 카르시안과 함께 있는 연무장 중 어느 쪽이 더 지옥 같은지 가늠하며 검을 들었다.

물론 가장 강렬하게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라티아, 돌아와!’

* * *

두 달이 더 흘러, 라티아가 황녀궁에서 나오지 않은 지 석 달이 지났다.

아론과 루니아, 라티아의 사이는 부쩍 가까워졌지만 그게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 아침, 결국 아론이 말했다.

“라티아.”

“네, 오라버니.”

“이건 명령이야. 잘 들어.”

“네, 알겠어요.”

빵을 찢어 수프에 찍어 먹던 라티아가 냅킨으로 손을 닦으며 아론을 바라봤다. 아론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궁금한 표정이었는데, 루니아는 이미 알고 있는 듯 개의치 않았다.

아론이 아주 진중하게 말했다.

“라움디셀 공자와 여행을 다녀와.”

“……네?”

라티아는 저도 모르게 덜그럭거리고 말았다. 라티아가 양순하게 눈을 깜빡이자 아론이 다시 한번 힘 있게 말했다.

“여행을 다녀오도록 해.”

“아니…….”

라티아는 저도 모르게 반박하려다가 합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큼, 말을 정리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여행을 다녀오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카르시안과? 라티아가 미처 끝마치지 못한 물음이지만, 이미 아론을 알아들은 듯했다.

“언제까지 흐지부지 끌고만 있을 거니? 난 라움디셀의 타운하우스와 공작성에 있는 네 방을 치우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네가 치우길 바란다면, 그렇게 말하도록 해. 이번 여행에서.”

라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라움디셀의 타운하우스와 공작성에 있는 방, 그건 라티아의 방이 아니었다. 라티아‘와 삐로리’의 방이었다.

라티아는 지난 석 달 동안 삐로리가 생각나서, 삐로리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 카르시안을 찾지 못했다.

‘카르시안을 보면…… 삐로리가 떠오를 거야.’

늘 삐로리에게 빵 조각과 과일을 먹이던 이가 카르시안이었다. 삐로리는 라티아의 어깨에 있는 것만큼이나 카르시안의 팔뚝에 있는 걸 좋아했다.

조금 투닥거릴 때도 있긴 했지만, 두 사람은 무척 사이가 좋았다. 그러니 카르시안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삐로리가 떠오를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간 피해 왔던 건데…….’

클로드를 만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래서는 안 되는 모양이다. 모든 걸 알고 있을 아론이 저렇게 말하고, 루니아도 아론을 말리지 않는 걸 보니.

‘석 달…… 인가.’

삐로리를 잊기엔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이었지만, 슬픔이 약간 추슬러지긴 했다. 물론 그 슬픔은 카르시안을 만나 삐로리를 상기하는 순간 다시 흘러넘치겠지만.

하지만 라티아는 아론의 말에 잠자코 따랐다.

“우리 모두 너의 슬픔을 알아. 배려하고 싶어. 하지만 어떠한 언질조차 없이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이들의 슬픔도 알아주길 바라.”

아론의 말은 틀리지 않았으니까.

그간 라티아는 삐로리를 안 좋게 떠나보낸 것에 대한 슬픔으로 자신을 추스르기 바빠, 클로드와 카르시안에게 어떠한 편지도 하지 않았다. 정신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때때로 그 둘을 추억한 적도 있었다.

“알았어요. 편지…… 할게요.”

“그래. 여행은 꼭 같이 가지 않아도 좋아.”

라티아가 대답하자마자 루니아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아론이 루니아를 쳐다봤지만, 루니아는 오로지 라티아만 볼 뿐이었다.

“넌 아직 미성년자니까.”

아론은 그제야 입을 조그맣게 벌렸다. 라티아가 너무도 어른스러운 나머지 때때로 그녀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단 사실을 잊는다.

“큰일 날 뻔했네…….”

아론이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루니아가 바로 아론의 말을 가로막지 않은 건 그가 황제 즉위를 앞둔 황태자이고, 루니아는 라티아에게 이런 말을 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런 가족들의 말에, 라티아는 어이없게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하하!”

라티아가 깜짝 놀랄 정도로 밝게 웃자, 루니아와 아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티아는 두 사람의 얼떨떨한 표정을 보고 또 한참이나 웃다가 말했다.

“아, 정말……. 알았어요. 편지 해 볼게요. 물론 여행 이야기는 빼놓고요.”

“음, 그런데 만약 네가 여행을 가고 싶다면…… 라움디셀 공작과 함께 가는 건 어때?”

루니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사실 그녀도 라티아가 여행을 하며 기분을 전환시키는 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함께 가면 너무 좋겠지만…….”

루니아가 뜸을 들였다. 루니아라면 모를까 아론은 식사할 틈조차 내기 어렵다. 그렇다고 루니아가 라티아, 카르시안과 함께 여행을 가자니, 카르시안이 불편해할 게 뻔했다.

‘그럼 여행의 목적이 없어지니까.’

그래서 루니아는 슬쩍 클로드의 이야기를 꺼냈다. 순간 라티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 모습을 본 루니아는 속으로 라티아의 짐가방을 챙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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