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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82화 (182/186)

?182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클로드는 나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위로를 하거나 구차한 말을 덧붙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욱 빠르게 현실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내가 황녀가 됐다는 건, 세상의 모든 진실이 풀렸다는 건, 그 과정에 삐로리가 있었다는 건.

“……그렇군요.”

이런 결말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난 뭔가로 틀어막힌 것 같은 목울대를 울리며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럴 것 같았어요. 삐로리가 강림……했을 때도 생각했던 일인 걸요. 음, 역시 그렇게 됐구나.”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

“미안해서 어떡하지? 나 때문에 그동안 해 온 게…… 엄청 노력했을 텐데,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 되어서…….”

이제는 바들바들 떨린다.

“제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건 모두 삐로리의 도움 덕분이었는데, 정작 저는…… 저는…….”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달래 주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렇겠지. 지금 날 달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르시안마저도 클로드의 곁에 선 채 아무것도 못하지 않나.

그는 주먹을 다 잡고 몸을 들썩거리면서도,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곁에 선 루니아의 입술 새로 안타까운 한숨만 연거푸 쏟아졌다.

삐로리가 나의 수호천사라는 걸 몰랐을 텐데도, 남이 보기엔 그저 아끼는 새가 도망쳤을…… 아니. 삐로리의 강림을 목도했으니 어쩌면 그가 나의 수호천사로 있었던 걸 눈치 챘을지도 모르겠다.

볼을 타고 흘러내려 턱에 맺혔다가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바닥에 고였다. 난 내가 울고 있는 것도 이제야 깨달았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흐흡, 하고 숨이 먹히는 소리가 들렸다. 난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자.”

곁에 선 루니아가 손수건을 건네줬다. 보드랍고 따듯했다. 나에게 주고 싶어서 오랫동안 쥐고 있었던 모양이다.

“감, 감사합니다.”

난 손수건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리고 얼른 얼굴을 닦았다. 하지만 마른 손수건이 축축해질 때까지도 내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결국 난 앤과 메리도 물린 채 먼저 방으로 돌아왔다.

이미 추태는 다 보였지만, 창피한 모습을 더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늘어졌다. 난 축축하고 힘겨운 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러 침대 위로 무작정 엎어졌다.

푹신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이불이 눈물로 찝찝해진 내 얼굴을 그대로 받아 줬다. 난 천천히 얼굴을 문질렀다. 삐로리의 보드랍던 깃털이 떠올랐다. 햇빛을 잔뜩 머금은 것 같던 그 냄새도.

그러고 보니 잘 가란 말도 못 했네. 어제 그렇게 정신이 없었고…… 모습을 감춘 삐로리가 어디에 있는지 신경도 못 썼고…….

나를 괘씸하다고 여길까? 서운해할까? 다 도와줬더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다고 어이없어 할까?

아니, 삐로리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거, 봐! 내 말대로 모든 일이 다 잘됐지?’

그렇게 말하며 의기양양하게 웃었을 것이다. 날개를 양쪽으로 넓게 펼치고, 꼭 사람이 허리춤에 손을 올린 것처럼 기고만장해했을 것이다.

검은 참깨 같은 눈이 가늘어지며 조잘조잘거리는 부리를 한껏 벌려 웃을지도 모른다.

“흐…….”

이렇게 행동과 말투까지 예상이 될 정도로 나의 곁에 있는 게 당연했던 삐로리가, 이제 없다. 영영, 다시는 볼 수 없다.

나는 수호천사가 왜 성인이 되어서야 떠나가는지 깨달았다.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에게 친구를 잃는 경험은 너무도 뼈아프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슬프다.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 동고동락한 친구라면 더더욱.

나는 내가 아직도 어리단 걸 새삼 실감했다.

이 와중에 이불이 꼭 삐로리의 품 안 같아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나의 소중한 친구의 포옹 같아서, 나는 또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울었다.

* * *

라티아가 떠난 응접실엔 적막만이 내려앉았다. 사람은 많은데,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따금 답답한 한숨과 막막한 신음이 흐를 뿐이었다.

그러길 한참,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클로드였다.

“한동안 기운을 차리지 못할 겁니다.”

“……네. 그렇겠지요.”

루니아가 꽉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큼큼, 뒤늦게 목을 가다듬었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목을 푸는 것을 포기한 루니아가 한숨처럼 말했다.

“라티아를…… 라티아를 데려가세요.”

“…….”

“여기에 있는 것보단 익숙한 곳에 있는 게 더 마음에 위안이 될 거예요. 추억하기도 좋겠죠.”

루니아의 표정은 무척 씁쓸했다. 라티아의 집은 황녀궁이다. 하지만 황녀궁은 라티아의 집이 아니다. 라티아가 있어 줬으면 하는 곳이지, 라티아가 있을 때 행복한 곳이 아니다. 루티아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클로드는 잠시 망설였다. 루니아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곳일 테지.’

여기선 분명 마음을 추스르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해서, 클로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는데.

“아뇨.”

그걸 카르시안이 막아섰다.

“라티아는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루니아의 앞에선 늘 클로드의 말에 따르던 카르시안이, 처음으로 고개를 가로저은 것이다.

“하지만 라티아는…….”

루니아가 걱정스러운 듯 운을 뗐지만 카르시안은 확고했다.

“힘들겠죠. 마음을 추스르기 더 어려울 겁니다.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할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라티아가 라움디셀의 타운 하우스로, 공작성으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삐로리는 없으니까요.”

클로드는 잠자코 카르시안의 말을 기다려줬고, 루니아는 경청했다.

“삐로리의 흔적을 계속해서 찾다 보면, 라티아는 멈추고 말 겁니다. 기껏 만난 가족과의 재회를 후회하는 지경에 이를지도 몰라요. 제가 라티아는 아니지만…… 제가 아는 라티아는 분명 재판장에서 궁지에 몰린 순간 삐로리의 도움을 바랐을 테니까요.”

루니아가 천천히 호흡했다.

“친한 친구고, 가족이나 다름 없으니까 힘든 때에 기대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기댐이, 이별로 돌아왔지 않습니까.”

“라티아가 자책할 거란 말이냐? 삐로리의 흔적을 더듬으며?”

클로드의 말에 카르시안이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아예 떨어뜨려 놓는 게 나을 거예요. 그리고 황녀궁은 어차피 라티아의 집이 될 겁니다. 아무리 내키지 않고 낯설다 하더라도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단호하게 말하던 카르시안이 잠시 말을 골랐다. 그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라티아와 라움디셀을 떨어뜨려 놔야 합니다.”

그 말을 하는 카르시안은 마치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사람처럼 고통스러워 보였다.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정도로.

클로드와 루니아는 카르시안이 지금 얼마나 힘겨운 결정을 내렸는지 알아차렸다. 라티아에게서 라움디셀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자신 또한 라티아의 곁에서 떨어뜨린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카르시안, 너…….”

클로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말을 끝마치진 못했다.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카르시안의 흰 주먹이 얼마나 바들바들 떨리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카르시안은 지금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조금 전에 한 말을 취소하고 싶을 터.

“……네 생각이 그리하다면 나도 그렇게 하마.”

클로드의 말에 카르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가 루니아를 보며 말했다.

“라티아를 잘…….”

순간적으로 잘 부탁한다고 할 뻔했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라티아의 진짜 가족은 루니아인데, 그녀가 바로 친모인데.

제가 뭐라고 잘 부탁한다고 말한단 말인가.

클로드는 입가에 피어오르려는 쓴웃음을 간신히 삼키며 그저 고개만 숙였다. 루니아도 그의 마음을 아는지,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인사를 받았다.

라티아가 라움디셀 부자가 공작령으로 돌아갔단 이야기를 들은 건 다음 날 정오쯤이었다.

라티아는 황녀궁에 남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 * *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에메르나와 제네스, 세리나의 결말은 모두가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그 속에서 라티아는 당사자이면서 동시에 방관자로 묵묵할 뿐이었다.

황태자로 복위된 아론은 본격적으로 황제로 즉위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녀로 복위된 라티아와 우애를 쌓을 시간도 없었다. 루니아는 황후로서 그간 에메르나 때문에 황폐해진 제국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식사를 거르는 일은 일상다반사라고 한다. 이렇게 바쁜데도, 두 사람은 하루에 세 번씩 라티아의 안부를 물어 왔다.

그때마다 라티아의 대답은 같았다.

‘아주 좋아요.’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라티아는 점점 밝아지며 슬픔을 떨쳐 낸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측근이라면 다들 알고 있었다.

라티아가 정말로 괜찮지 않다는 것을.

무려 12년을 함께 산 친구이다. 고작 30일만에 괜찮아질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다들 라티아의 노력이 갸륵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라티아가 정말로 괜찮아지면 ‘어떠한 말’을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그 말’이 없었니?”

“네…….”

루니아의 물음에 메리가 죄를 지은 듯 숙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니아는 들고 있던 종이를 놓고,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벼운 한숨이 샜다.

“언제쯤 라움디셀 공작과 공자를 보고 싶다고 말할까.”

라티아가 정말로 괜찮아지면 할 말, 그건 클로드와 카르시안을 만나겠다는 소리였다.

지난 한 달간, 라티아는 단 한 번도 라움디셀 부자를 찾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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