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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81화 (181/186)

?181화

* * *

그날 밤, 난 황녀의 방에 누워 있었다.

낯선 침대에 누워 낯선 천장을 보고 있는 게 불편할 법도 하건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정말 집이라도 온 것처럼.

“집이라니…….”

혼자 생각해 놓고 웃겨서 피식 웃으며 몸을 모로 돌린 때였다.

바스락, 바스락. 테라스 너머의 나뭇잎이 유독 소란스럽게 비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절그럭거리며 잠긴 창문을 열려는 소리도.

침입잔가?

난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탁자에 풀어 둔 총도 찾아 쥐었다. 그런데 창가엔 침입자보다 더 충격적인 사람이 있었다.

“카, ……카르시안?!”

다름 아닌 라움디셀의 타운 하우스로 돌아갔을 카르시안이 있었다.

“쉬잇.”

그는 자신의 붉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는 반대 손으로 잠긴 창문 걸쇠를 쿡쿡 가리켰다. 마치 문을 열어 달라는 것처럼.

난 깜짝 놀라 어버버 거리다가 얼른 창문을 열어줬다.

“무슨 일, 아니.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분명 카르시안은 조금 전 저녁 식사를 마치고 클로드와 함께 돌아갔다. 그리고 여긴 황녀궁이다. 황후가 직접 배치한 사람들로 인해 철통같은 보안이 되어 있는 곳.

그런데 여기에 어떻게, 카르시안이?!

심지어 머리카락에 나뭇잎이 묻어있는 걸 보니 나무를 탄 모양이다.

“설마 몰래 침입한 거야?”

난 카르시안이 방으로 전부 들어온 걸 확인하고 창문을 닫으며 물었다. 그러자 카르시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날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어.”

“그렇겠지. 그들 눈을 피해서 왔을 테니까.”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답하자, 카르시안이 쿡쿡 웃었다.

“여기가 라티아의 방이구나.”

그가 내 방을 빙글 둘러보며 말했다. 난 좀 뻘쭘해져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더라.”

이 방을 쓴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텐데, 여기엔 없는 게 없었다. 어린아이의 책상부터 성인이 쓸 법한 책상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마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아이의 성장을 덧그린 부모가 준비해 둔 것처럼.

이런 방에서 나와 카르시안은 훌쩍 어른이 된 모습으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뭐 좀 줄까? 물 같은 거라면 나도 준비해 줄 수 있어.”

“메리와 앤이 아쉬워해.”

“가능하다면 데리고 들어올 생각이야.”

난 물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컵에 씌인 천을 벗겨 내는데, 어느새 나의 뒤로 온 카르시안이 그런 내 손등을 잡았다.

“역시 그렇겠지.”

뒤에서 훅 끼치는 체향이 낯선 듯 익숙했다. 나무를 오르느라 열을 낸 건지, 등에 닿은 남자의 가슴이 유독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가장 뜨거운 건 아직도 내 손등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인가?

몸이 흠칫 굳었다.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까.”

음절 사이에 숨이 섞이며 날 간지럽혔다. 뭔가 오싹하면서도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카르시안은 그대로 내 손을 잡아 올려 손가락 두 번째 마디에 입술을 문질렀다.

뜨거우면서도 조금 촉촉한 감촉이 느껴지자 기분이 몽롱해졌다.

“그러면 나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손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느낌이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카르시안의 반대쪽 손이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라티아, 나는?”

목소리가 무겁다. 어깨가 묵직해진다. 카르시안이 내 어깨에 턱을 괴었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카르시안이 나에게 하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으니까.

그런 나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그는 여전히 내 손가락에 입술을 누른 채 말했다.

“나도 데리고 들어와 줄 거야?”

“……뭐?”

“그럴 마음은 있어?”

손가락을 덧그리는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정신 차렸을 때 그의 입술은 약지에 있었다. 난 그제야 카르시안에게 붙잡힌 손이 왼손이란 걸 깨달았다.

“나를 어떻게 할 거야, 라티아?”

“난…….”

말문이 막혔다. 숨통이 콱 조여든다. 우린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 그런데 말하기가 어렵다. 어째서일까?

난 이미 오래전에 그에 대한 마음을 자각했는데. 그가 나와 같은 열기를 품고 있단 것도 이미 익히 알고 있는데.

어째서일까?

왜 이렇게나 심장이 뛰고 입을 한 번 떼기가 어려운 걸까? 왜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내 등이 맞닿아 있는 카르시안의 가슴 속에서 뛰는 심장 박동은 나보다 빠르고 강하면 그러했지, 결코 느리고 약하지 않았다. 이것이 또 다른 증거다. 그리고 나에게 확신을 담아 말하라고 종용하고 있다.

그런 카르시안에게 나는…….

“나는―”

내가 간신히 목구멍에 콱 틀어막힌 부끄러움을 삼키고 입을 연 때였다.

“역시 여기에 있었군, 이 수작꾼.”

분명 잘 닫았을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클로드가 나타났다.

“칫.”

카르시안이 아쉽게 됐다는 듯 혀를 찼고 난 입을 떡 벌렸다.

“고, 공작님?!”

심지어 클로드도 나무를 타고 온 모양인지, 그의 어깨에 여린 새순이 매달려 있었다. 난 정신이 다 혼미해졌다. 그리고 지금 나와 카르시안의 자세가 자각됐다.

앗, 안 돼! 카르시안 고소당하겠어!

“어, 어! 공작님 이건……!”

“아니, 라티아. 비호하기엔 이미 늦었어. 지금도 보고 있으니까.”

클로드가 칼같이 잘라 말하고는 척척 걸어와 카르시안의 귀를 콱 잡아당겼다.

“윽!”

그 바람에 카르시안은 내게서 떨어져야 했고, 클로드 쪽으로 조금 질질 끌려갔다.

“이 몹쓸 도둑고양이.”

클로드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하나뿐인 아들이자 라움디셀 공작가의 후계자에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고,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길 수 없지.”

졸지에 카르시안은 참새와 고양이가, 난 방앗간과 생선 가게가 되었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조용히 따라 나와.”

“아픕니다.”

“아프라고 잡은 거니까.”

카르시안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클로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부자는 벙찐 나를 두고 들어왔을 때처럼 테라스 창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마치 떨어뜨리는 모양새로 카르시안을 나무 쪽으로 밀었다.

“앗!”

“걱정 마. 나무는 내려가는 것보다 올라오는 게 더 힘드니까.”

내가 작게 비명을 지르자 클로드가 손을 내저었다.

그 힘든 나무타기를 했으니 카르시안은 문제없을 거란 뜻이었다.

“아, 그럼 다행…….”

아니, 다행인가? 난 말을 하려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 말에 픽 웃은 클로드가 내려가려다, 테라스 난간에 매달린 모습으로 말했다.

“내일 보자꾸나. 오늘은 푹 쉬도록 해. 힘든 일이 많았잖아.”

“아, 네…….”

“문단속 철저히 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절대로 문 열어 주면 안 돼. 내일 문단속에 대해 다시 가르쳐야겠어.”

클로드가 아래쪽을 눈짓하며 예민하게 말했다. 난 아하하, 어색하게 웃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카르시안은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었는걸요.

무엇보다 카르시안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칭하는 클로드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잘 자거라.”

“아, 네. 공작님도요. 좋은 밤 되세요.”

“그래.”

클로드는 그렇게 훌쩍 시야에서 사라졌다. 난 텅 빈 방 안을 돌아보다가 클로드에게 멍청한 인사를 했단 걸 깨달았다.

아이샤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된 날인데, 좋은 밤이 될 수가 없잖아!

이런 상투적인 인사 말고 좀 더 제대로 된 위로를 건네야 했는데! 끙, 스스로가 조금 창피해졌다.

난 클로드의 당부대로 문을 꼭꼭 잠그고 발을 질질 끌듯 걸어 침대로 향했다. 아까 누워 있던 침대로 몸을 던지자, 조금 전엔 느껴지지 않던 피로가 덮쳐 왔다.

우스운 일이다. 내 방이 아닌데도 익숙하게 느껴졌던 방이었는데. 클로드와 카르시안이 들어왔다 나가자 이보다 더 낯설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이건 꼭 클로드와 카르시안이 있어야만 내게 익숙한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그런 모종의 경고 같기도 했다.

난 푸스스 웃으며 몸을 모로 돌렸다. 뺨에 닿는 이불은 무척 부드러웠지만 그게 다였다. 아까 생각했던 ‘아, 내 집이구나.’ 하는 감상은 전부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난 여행지의 숙소에 누운 사람처럼 고단한 몸이 안락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게 어찌나 간절한지, 조금 전 카르시안과 나눈 대화의 일부가 잊힐 정도였다.

* * *

다음 날, 클로드는 정말로 찾아왔다. 앤과 메리를 데리고서.

“오, 이 둘이 라티아의 전속 하녀군요.”

이른 아침부터 황녀궁으로 찾아온 루니아 황후가 기쁜 마음으로 앤과 메리를 황녀궁의 시녀로 들여 줬다.

하녀에서 시녀로 훌쩍 신분 상승을 한 두 사람은 조금 얼떨떨해 보였지만 이내 적응하고 시녀복으로 갈아입으러 갔다.?

“정말 괜찮은 건가요? 그, 일단은 트라이던트 해적단 출신이거든요.”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루니아가 빙긋 웃었다.

“네게 소중한 사람들이잖니.”

루니아는 아론에겐 황자라고 부르며 존댓말을 쓰지만 내겐 꼬박꼬박 라티아라고 불렀다. 정말 모녀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아침 일찍부터 내가 에클레어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손수 가져온 루니아가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물론 카린 때와 달리 친모를 앞에 두고도 애틋한 생각이 들지 않아 기묘한 느낌이긴 하지만. 이를 두고 클로드는 내게 ‘아직 실감 나지 않아서’일 거라고 말했다.

실감 나지 않아서, 그래. 예상하고 있던 것과는 별개로 난 아직 내가 가족을 찾고 황녀가 되었단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클로드가 현실감을 제대로 일깨워 줬다.

“라티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네, 무엇인가요?”

난 별생각 없이 산뜻하게 물었는데, 클로드는 아주 힘겨운 이야기를 하듯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삐로리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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