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재판장에 천사가 강림했단 소식에 신전 관계자들이 재빨리 달려왔다.
모두가 이미 삐로리를 신의 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하인리드를 비롯한 대신관들이 삐로리의 성력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은 삐로리가 ‘진짜 천사’라고 공인했다.
한 가지 우스운 점은, 모두들 삐로리를 경외하고 있으면서 신전 관계자의 인증을 기다렸단 점이다.
천사를 눈앞에 목도하고도 인간의 판단을 기다리다니, 치욕스러울 만도 하건만 삐로리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마치 이런 일을 예상했다는 듯, 혹은 몇 번이고 겪었다는 듯.
이 일련의 소란은 빠르게 잦아들었고, 나와 카르시안의 도움으로 진정한 루니아가 소란으로 어지러워진 재판장에 외쳤다.
“신의 사자께서 강림하시면서까지 우리의 아둔함을 바로 잡아 주셨다. 디케 신의 뜻에 따라, 죄인들을 사형에 처한다!”
재판장에서 재판관과 재판도 없이 떨어진, 최후통첩이었다.
* * *
아론이 눈을 떴다.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에 도합 세 번의 충격을 받았다.
“제가 엘릭서를 마셨다고요?”
여기서 한 번.
“천사께서 강림하셨다니……!”
여기서 또 한 번.
“황비와 황태자, 황녀가 드디어 죗값을 치르게 되었군요!”
마지막으로 한 번.
몸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 텐데, 갑작스러운 소식을 연달아 알게 되었으면서도 아론은 괜찮아 보였다.
‘저게 엘릭서의 힘일까?’
클로드가 정중하게 아론과 대화하는 동안 라티아의 시선은 빈 엘릭서의 병에 닿아 있었다.
‘일찍이 저걸 썼더라면…….’
어쩌면 레오나르도와 루니아를 더 빠르게 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쯤 루니아의 곁에 서서 아론에게 설명을 해 주는 이는 클로드가 아니고 레오나르도였을지도 모른다.
라티아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다가 이내 스스로 부정했다.
‘아냐,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자.’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두고 가정하고 후회한다고 해서 바뀐다면 이런 생각쯤 얼마든지 하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라티아는 안다.
‘그리고 만약 저걸 썼더라면…… 역으로 아론을 구하지 못했을 거야.’
이것도 사실이었다. 엘릭서는 한 병뿐이었으므로.
문득 라티아는 자신이 너무 ‘원작’에만 갇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작 클로드와 카르시안을 비롯한 인물들은 원작과 달라졌는데도.
‘원작에 나와 있는대로 움직이지 않고, 루니아 황후의 병을 치료할 방법이 바람개비꽃 뿌리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더라면…….’
다시금 쓸데없는 생각이 차올랐다. 라티아는 주먹을 꽉 움켜쥐어 손바닥에 상처를 냈다.
‘생각 그만하자. 그렇지 않아도 앞으로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
따끔한 고통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조금 배어났다. 라티아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것을 본 카르시안의 붉은 눈이 잠시 흔들렸다. 라티아의 상태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신의 사자께서는 다시 디케 신의 품으로 돌아가셨고…….”
클로드가 아론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도중, 카르시안이 조용히 라티아의 곁으로 다가섰다.
“이따가 손 좀 보여 줘.”
라티아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라티아는 괜찮다고 하려고 했지만 힐끔 돌아본 카르시안의 눈이 너무 단호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자신이 정신을 잃었던 동안의 일을 빠짐없이 들은 아론이지만, 그 또한 모르는 게 있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물어본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친자 검사.
이 부분은 클로드가 함부로 말할 수 없기에 뭉뚱그려 넘어갔다. 그래서 아론은 친자 검사를 했는지, 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몰랐다.
아론의 말에 여태 쉬지 않고 말한 클로드는 입을 다물었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루니아는 몸을 의자 등받이에 붙였다.
카르시안의 어깨는 굳었고 라티아는 숨을 조금 집어삼켰으며, 그에 따라 아론의 방엔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안 했군요.”
아론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클로드는 막힌 목을 가다듬듯 몇 번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냥대회니 뭐니, 그럴 상황이 되지 못해서…….”
“못 한 건가요? 안 한 게 아니고요?”
어쩐지 뾰족한 말투였다. 클로드는 조금 당황했으나 루니아는 아론의 마음을 알아들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였던 루니아가 미끄러지듯 일어나 아론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못 한 겁니다.”
“…….”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못 한 거예요.”
루니아의 말에 조금 날이 섰던 아론의 눈동자가 힘을 잃었다.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습니다. 여전히요.”
그러며 루니아는 카르시안의 곁에 바짝 서 있는 라티아를 바라봤다. 라티아보다 살짝 연한 보라색 눈동자에선 온기가 느껴졌다.
아론도 고개를 돌려 우두커니 서 있는 라티아를 바라봤다. 클로드의 말대로 라티아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다.
사실 오르셀 숲에서 암살자들 때문에 자잘하게 다쳤지만, 이건 아론이 걱정할까 봐 조금 전 치료를 해 뒀다.
라티아는 저 두 사람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래서 라티아는 용기를 내어, 앞으로 한 발자국 나가서며 말했다.
“저도, 네. 친자 검사를 해 보겠단 마음엔 변함없어요.”
그녀의 말에 루니아와 아론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클로드가 말했다.
“밖에 하인리드 대신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모셔 오겠습니다.”
카르시안이 재빨리 움직였다. 아론의 방 안에는 아까와 비슷한 듯 다른 조용함이 내려앉았다.
어찌나 어색한지, 클로드가 옅은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할 정도였다. 이윽고 하인리드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넷 중 한 명은 질식사했을지도 모른다.
“피 한 방울씩만 있으면 됩니다.”
?
하인리드의 말에 세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깨끗한 바늘로 손가락 끝을 찔렀다. 라티아의 손바닥에 난 손톱자국을 매섭게 포착한 카르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피에는 마력이 흐르기 마련입니다. 이 마력은 피에서 피로 유전되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만약 세 분께서 같은 마력을 가졌다면, 이 성력이 듬뿍 들어간 성수 안에서 피는 희석되지 않고 한데 뭉쳐질 겁니다.”
하인리드의 설명에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하인리드가 내민 성수가 담긴 수반 위로 손을 올렸다.
똑, 똑, 또옥.
손가락 끝에서 붉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일뿐.
하인리드는 이미 모든 걸 다 안다는 표정으로 느긋해 보였지만, 피를 떨어뜨린 세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채였다. 클로드와 카르시안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염려와 우려가 어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빙글, 빙글…… 빙글…….
물과 다를 바 없는 성수 안에 떨어진 핏방울들이 물에 떨어진 기름처럼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
“아아…….”
루니아가 탄성을 내질렀고, 아론의 몸엔 힘이 빠져 자세가 허물어졌다. 뻣뻣하게 서 있는 사람은 오로지 라티아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라티아의 보라색 눈동자도 눈물로 촉촉했다.
세 사람은 하나로 뭉쳐져 성수의 정 가운데에 떠 있는 하나의 붉은 물방울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윽고 세 사람은 서로를 얼싸안았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희석되는 법 없이, 서로를 단단히 움켜쥔 채 세 방울이 모여 한 방울이 된 모습처럼.
누군가의 눈물이 성수 위에 퐁당퐁당 떨어졌다.
* * *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에메르나의 죄명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그것은 바로 ‘황녀 납치 죄’.
레오나르도가 루니아를 깊이 사랑했음이 다시 한번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 힘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루니아의 눈물에 흑마법으로 건 세뇌가 깨질까!
라티아는 레오나르도와 루니아의 사이에서 생긴 딸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를 안 에메르나가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었다.
에메르나는 산파를 매수했고, 라티아를 납치해 죽이라고 하기에 이른다. 만약 라티아가 카린의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벌어졌을 게 분명했다.
“나는 너를 황녀로 복위시킬 거란다.”
루니아는 그간 안아 주지 못했던 시간을 갚기라도 하듯 라티아를 품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어색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라티아도 한바탕 울고 난 후에는 클로드에게 기대듯 편안하게 루니아에게 안겨 있었다.
훌쩍 자란 라티아는 이제 루니아와 체구가 비슷한데도, 루니아는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병색을 앓은 사람 치고 너무도 단단하게 라티아를 안아 줄 따름이었다.
“드디어 우리 가족이 다 모이는구나.”
루니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아까부터 루니아는 라티아에게 당연히 쥐고 있어야 하는 것을 줄 것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건 라티아에게 하는 건지, 스스로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이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라티아에게 깊은 죄책감을 갖고 있단 것이었다.
‘내가 힘이 없어서 네가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가 그 기저에 깔려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