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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79화 (179/186)

?179화

천사가 강림하는 순간을 상상해 본 적이 있나?

적어도 나는 없었다.

비록 이 세계엔 신과 수호 천사와 관련된 개념이 있다. 실제로 내게는 삐로리라는 수호 천사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 세상에 강림할 거란 생각을 쉬이 하지는 않았다.

디케 신전에도 다녀오고, 아는 대신관도 생기고, 신탁을 후회한다는 말도 듣고, 애당초 내가 책 속에 환생하고, 회귀하고…….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난 단 한 번도 이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라든지, 신이 존재하기에 행해진 일이라든지 따위의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왜냐면 존재하기는 해도 날 도와줄지 말지 모르는 신에게 기댈 바엔 내가 혼자서 뭐라도 하는 게 더 빠르니까.

그래서 난 삐로리에게 어떠한 도움을 바라면서도 금방 포기해 버렸는데.

“아, ……아아아!”

“아아, 신이시여!”

“디케시여!”

지금 내 앞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강렬한 광채, 성스러운 광휘, 눈이 부신 후광 그리고 양옆으로 넓게 펼쳐진 커다랗고 아름다운 날개!

천사였다.

늘 나와 함께 다니던 삐로리의 모습이 변하여, 이 세상에 강림했다.

“디케시여!”

“신이시여!”

“사자께서 강림하셨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른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앞에 강림한 신의 사자에게 예를 표했다. 개중에는 눈물까지 흩뿌리는 이도 있었다.

“모두들 신의 사자께 머리를 조아려라!”

누군가가 외쳤다. 얼어붙었던 나와 카르시안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세상이 적막해지고 답답하던 재판장 내부가 환기라도 된 것처럼 상쾌해졌다. 그러면서 너무도 성스러운 나머지 숨이 다 막히는 기분이었다.

펄럭펄럭하고 거대한 날개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육중하게 들렸다. 그리핀으로 변한 루카오의 날갯짓 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우아하고 묵직했다.

“무서워하지 말라.”

귀로 듣는 걸까? 아니면 저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파고드는 걸까? 분명 ‘들었는데’도 어떤 목소린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겁내지 말라.”

낮은 건가? 높은 건가? 여성의 목소린가? 남성의 목소린가? 더더욱 아리송해졌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풍성한 울림이 있단 것이다.

“나는 금지된 지식을 손에 넣은 자이자 드높은 하늘의 전령이며 떠도는 모든 이들을 긍휼하는 자.”

글자 하나, 하나가. 단어 하나, 하나가 내 머릿속에 새겨져 각인되는 기분이었다.

“디케 신의 신전이나 마찬가지인 이곳에서 감히 진실이 묻히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이 자리에 강림했노라.”

나른한 듯 자애로운 표정으로 우리를 굽어살피고 있는 이.

삐로리였다.

나의 수호 천사이자, 신이 되기 위해 네 명의 아이들을 안전하게 성장시켜 그 잠재력을 손에 넣은 대천사.

삐로리가 지금 자신의 본 모습으로 우리의 눈앞에 강림했다.

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수만 가지의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너, 어쩌려고 이래?!

수호천사는 자신이 맡은 아이에게 정체를 발각당하면?

신이 되기 위해 네 명의 아이를 훌륭히 키워 내는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난 데뷔탕트를 치렀지만 아직 성인이 아니고, 그렇기에 삐로리도 내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본 모습을 드러내서 나에게 스스로 정체를 밝히다니! 대체 어떻게 하려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 마음에선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디케 신의 신전이나 다름없는 재판장에서 진실이 묻히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니.

그렇단 말은…….

“고개를 들라.”

“어, 어찌…….”

“저희가 어떻게 감히…….”

“고개를 들라.”

삐로리의 말에 사람들은 우물쭈물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천천히 들기 시작했다. 나도 어쩌지, 어쩌지 고민하다가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아 오는 카르시안의 온기에 용기를 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슬쩍 실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이 쭈뼛거리며 위용 넘치는 날개를 펄럭거리는 삐로리를 우러러봤다.

“눈을 뜨고 똑똑히 보아라.”

“…….”

“너희들이 눈을 돌리려고 했던 진실을.”

역시!

난 눈이 뜨이고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으며 카르시안의 손을 꽉 쥐었다.

삐로리는 사람들에게 에메르나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 주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힐끔 확인한 에메르나와 그의 자녀들의 얼굴이 희게 질린 때였다.

“……읏!”

“아, 아!”

“세상에, 이것은……!”

한두 명씩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부릅뜨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비틀거리는 이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이건…….”

“……하하.”

그리고 내 옆에 선 카르시안과 클로드도 마찬가지였다. 클로드의 허탈하고 분노 어린 웃음이 유독 이질적이게 들렸다. 게다가 루니아는 의자에 주저앉은 채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이게…… 진실.”

“아아, 이것이 진실…….”

다들 크게 확장된 눈으로 뭔가를 보듯 분주해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 서서히 충격적인 깨달음의 빛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저들의 모습으로 보아, 아무래도 삐로리는 사람들에게 에메르나의 악행을 보여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난 그들을 둘러보다 마구 도리질을 치고 있는 에메르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안, 안 돼, 안, 돼! 안 돼!”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고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갈라져 천이 부욱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옆에 있는 세리나는 입을 꽉 틀어막고 주저앉아 있었다.

“흡……!”

눈동자가 파들파들 떨리며 줄줄 흘러나온 눈물은 입을 틀어막은 손을 하염없이 적시고 있었다. 보고 있는 진실에서 피하고 싶은 건지 고개를 숙이지만 소용없는 듯했다.

세리나 옆의 제네스는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이 몇 번이나 토해진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연다.

“어, 떻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모습은 보는 사람이 다 괴로워 보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피해자와 제삼자는 그런대로 괜찮아 보이는데, 가해자들은 저토록 괴로워한다는 게.

아, 이것이 신의 심판인 걸까? 그런데 왜 나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삐로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아까 같은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넌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

아니, 이건 글자인가? 어쨌든 삐로리는 내가 모든 걸 알고 있기에 굳이 알려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뭐라고 입을 열어도 되는지, 말을 해도 되는지조차 몰랐다.

낯선 듯 익숙한 삐로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앞머리 없는 하얀 장발이 늘씬하고 긴 몸을 비단 실처럼 달라붙어 발목에서 찰랑거렸다. 푸른 핏줄이 보일 정도로 흰 피부인데도 정작 핏줄은 보이지 않았다. 입술은 창백한 분홍색이었고 오뚝하게 두드러진 코뼈는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 같았다. 그리고 속눈썹까지 흰색이었는데, 정작 그 안의 눈동자는 검은색이었다.

검은 깨 같은 눈을 가졌던 삐로리답게.

그러한 신비로운 모습에 요요한 미소가 떠오르니, 삐로리가 정말 천사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저렇게 웅장한 날개가 여즉 펄럭이고 있는데도.

가만히 삐로리를 바라보고 있는 내게, 그가 말했다.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야.]

날 바라보는 시선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이번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게 다 괜찮을 거란 저 말이, 어쩐지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질 거라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자신이 그동안 모은 세 개의 재능을 버리는 대신, 나를 도와주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엿보였으니까.

“……흑.”

“흐윽…….”

하나둘씩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모든 진실을 다 마주한 모양이었다.

“……하아.”

카르시안 또한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난 그제야 우리가 여태 손을 잡고 있었고, 맞잡은 손바닥이 축축해졌단 걸 깨달았다.

“괜찮아?”

어깨를 짚으며 묻자, 카르시안이 내게로 가볍게 기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모습을…… 봤어.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

말문이 막혔다. 내 손을 쥔 카르시안의 손은 멀쩡했지만, 그 반대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선명한 분노가 느껴졌다. 이때였다.

스릉 하고 검집에서 날붙이가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흐악!”

“꺄악!”

제네스와 세리나의 비명 소리가 뒤따랐다. 깜짝 놀란 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랬군.”

서슬 퍼런 목소리가 한두 사람씩 정신을 차리고 있는 재판장에 뚝 떨어졌다. 클로드였다.

“……흐, 후후.”

“그랬었어.”

에메르나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고, 클로드는 그런 에메르나에게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내게 등을 돌리고 있는지라 클로드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어깨와 체념한 에메르나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이샤를 죽인 사람. 바로 너였군.”

클로드는 지금 카르시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을 게 뻔했다.

아까는 삐로리의 성스러움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었는데, 지금은 클로드의 살기 때문에 발을 딛고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클로드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똑같은 진실을 보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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