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78화 (178/186)

?178화

“기소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니.”

“아니, 이렇게 뚜렷한 증거와 피해가 있는데도요?”

“순순히 잡혔잖아요. 그럼 시인한 거 아닌가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재판장은 순식간에 시끄러운 시장터가 되었다. 이들을 조용히 시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이에서 에메르나는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사악하게 웃었다. 하지만 누가 볼 새라 황급히 표정을 감췄다. 그 무시무시하던 웃음을 본 사람은 나밖에 없으리라.

순간 에메르나와 눈이 마주쳤다. 에메르나는 나에게 보란 듯이 한쪽 눈썹을 까딱거렸다.

‘어떡하니?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것 같은데.’

에메르나의 표정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라티아?”

그리고는 날 부르는 클로드의 말을 뒤로한 채 청중석에서 내려와 서기관의 앞에 섰다.

“대체 어떤 이유로, 무엇 때문에 기소가 되지 않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그 자리에 꼼짝없이 얼어붙은 루니아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명백한 피해자도 있고, 그 피해자가 어떤 수법으로 어떻게 괴롭힘을 당했는지도 밝혀졌어요. 게다가 그 방법이 무려 흑주술, 흑마법이라고요! 혐의는 충분하잖아요! 증거도 있고요!”

난 그렇게 주장했으나 서기관의 표정은 난처할 따름이었다.

“그게…….”

서기관이 입을 달싹거리자 조금 전까지 술렁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봤다. 짙은 호기심과 궁금증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서기관이 하얀 면장갑으로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증,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네?”

“모든 건 다 진술뿐이잖습니까. 다 정황상의 증거고요. 명확한 물증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명확한 물증. 있잖아요! 바람개비 꽃 뿌리라는―”

“예. 대주교님과 대신관님이 바람개비꽃 뿌리에 흑마법이나 흑주술을 푸는 힘이 있다는 걸 증명해 주셨죠. 그런데 그게 전부이지 않습니까?”

“네?”

“그것만으로는 피고인이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 흑주술이나 흑마법을 걸었단 증거가 되지 않는단 겁니다. 주술을 거는 걸 본 사람도 없고, 두 분이 흑주술이나 흑마법에 걸렸단 기록도 없잖습니까?”

나도 모르게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서기관은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이때 카르시안이 나섰다.

“하지만 바람개비꽃 뿌리 덕분에 두 분은 세뇌에서 풀리고 병이 나았잖습니까?”

그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서기관에게 물었다. 마치 나와 함께 있어 주겠다는 것 같아서 마음이 든든했다.

그런데 서기관은 여전히 난처한 기색이다.

“그게 아니라면요?”

“……네? 그게, 아니라니요?”

벌써 몇 번째 당황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되물었고 카르시안이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짧게 침음했다.

“선황제 폐하께서 세뇌에 걸려 있었다고 가정했을 때, 선황제 폐하께서 정말 바람개비꽃 뿌리를 먹고 세뇌에서 풀렸더라면 언제 그걸 먹었단 말입니까?”

“네?”

“아무도 선황제 폐하께서 바람개비꽃 뿌리를 드시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야 당연했다. 내가 에메르나와 함께 했던 만찬에서 하나 몰래 준 거니까.

“그리고 정말 바람개비 꽃 뿌리 때문에 세뇌가 풀린 거라면, 황후 폐하께서 사산하셨던 황녀님은 어떻게 가지셨고요?”

이 이야기를 할 때 서기관은 목소리를 낮췄다.

난 나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나의 이야기였으니까.

“그건…….”

“그때도 바람개비꽃 뿌리 덕분에 일시적으로 세뇌가 풀린 거라면, 왜 다시 세뇌에 걸렸으며 그간 바람개비꽃 뿌리를 먹지 않으신 겁니까?”

서기관은 나에게 묻는 게 아니었다. 정보를 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난 나의 빈틈을 사정없이 찔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존재가, 나를 가로막고 있다.

“황후 폐하의 병증도 그렇습니다. 바람개비꽃 뿌리 덕분에 많이 호전되신 것은 사실이나.”

“난 완치되었습니다. 바람개비꽃 뿌리 덕분에요.”

루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서기관은 눈치를 보듯 비굴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그 전에 별다른 치료를 시도해 보지 않고, 처방을 받지 않으신 건 아니잖습니까.”

앞선 치료가 뒤늦게 효력을 발생시킨 걸 수도 있다고.

“그건…….”

루니아가 반박하려 했으나 그녀는 끝내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며 갖다 댈 증거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루니아는 여러 방면에서 약을 구했는 데에 비해, 바람개비꽃 뿌리를 복용한 건 꽤 비밀스러웠다.

에메르나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가슴이 답답해졌다.

서기관이 나를 포함한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재판은 개정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게 재판장님의 의견입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에메르나가 흑마법이나 흑주술을 사용한다는 증거가 없으니, 그녀가 암살자를 고용해서 세뇌했단 증거도 없는 것으로 사료된다고 했다. 아무리 암살자가 직접 증언한다 하더라도 그 또한 증거가 없다.

“게다가 증인으로 서려던 시녀들이 하나둘씩 증언을 번복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법정은 이만 폐정하라는 것이 재판장님의 마지막 전언입니다.”

서기관이 슬그머니 카르시안과 나의 눈치를 봤다. 우린 암살자 때문에 죽을 뻔했다. 당장 어제!

그런 우리를 앞에 두고 ‘아무 증거도 없다’고 말하는 게 도의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난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발뒤꿈치에 힘을 주고 버텼다. 하지만 루니아는 비틀거리고 말았다.

“황후 폐하.”

“폐하.”

사람들이 얼른 루니아를 부축했다. 루니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먹만 움켜쥐고 있었다.

다 잡은 물고기였다. 구석으로 다 몰아놓은 상태였다. 그물만 들어 올리면 된다. 그러면 에메르나라는 악의 뿌리를 걷어 낼 수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눈앞에서 스러졌다.

이제 에메르나를 잡는 건 영영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더욱 꼼꼼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숨길 테니까.

어쩌면 다시 루니아를 향해 그 사악한 손을 뻗을지도 모른다. 바람개비꽃 뿌리에도 통하지 않는 다른 못된 방법을 고안해내서.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에메르나를 여기까지 몰아넣었음에도 결국 그녀를 내치지 못한 루니아를 보며,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무능한 황후’라고.

아론은 쓰러졌고 루니아는 숙적조차 제대로 쳐내지 못하는 팔푼이로 비춰진다면.

“에메르나의 세력이 더욱 커질 거야. 더 견고해지기도 하겠지.”

난 카르시안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비통한 침음을 흘렸다.

“……이건, 말도 안 되는…….”

루니아가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그녀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

카르시안이 내게 물었지만 나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좋은지. 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아까부터 클로드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한 곳만 쏘아보고 있었다. 그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곳엔 슬며시 웃고 있는 에메르나가 있었다.

이제 에메르나는 웃음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뭐 해? 못 들었어? 재판 자체가 안 된다잖아! 우린 다 무혐의라고!”

보란 듯이 거만하게 명령을 내리는 제네스의 얼굴에선 승리의 기쁨마저 엿보였다.

나와 카르시안을 보는 눈동자에서는 일말의 살기마저 느껴졌다. 제네스는 이제 우리를 제대로 노릴 것이다.

아직 엘릭서를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는데.

“젠장, 새벽에 겁박을 줘서라도 엘릭서를 숨겨 둔 곳을 알아낼 걸 그랬나.”

“아니, 그랬더라면 아직 재판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겁박한다며 역으로 우리를 물고 늘어졌을 거야. 그리고 지금 우리를 되레 황족모독죄로 꿇어앉혔겠지.”

카르시안의 말에 난 조용히 대답했다.

생각을, 머리를 써야 할 때다. 하지만 아무리 이리저리 생각하며 방도를 찾아봐도 모르겠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지?

머리에 쥐가 나도록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황성 기사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네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죄인처럼 묶어 둔 손발을 자유롭게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저게 풀리면 상황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될 거다.

이젠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화가 났다.

원작에 다 나와 있었는데! 에메르나가 범인이라고, 작가가 다 써 놨는데!

그런데 등장인물에 환생한 나는 이걸 증명할 길이 없었다. 난 발을 동동 구르는 심정으로 카르시안의 어깨에 앉은 삐로리를 올려다봤다.

뭐든 좋으니까 제발 도와줘.

어린 시절에 베티를 몰아냈을 때처럼. 늘 나에게 지혜를 빌려줬던 때처럼.

나 아직 성인 아니니까, 성인이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날 더 도와줘.

“삣…….”

난처한 듯 삐로리가 부리를 달싹거렸다. 마음이 절절 끓었다.

하지만 사실 난 삐로리가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왜냐면 삐로리는 결국 새의 모습이니까.

아무리 예리엘 만물 상단의 동물어 번역기로 사람과 능숙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지만, 결국엔 새니까. 새의 말을 그 누가 믿어 줄까.

그래, 물러서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한 걸음 물러서서 다시 때를 기다리면…… 그런데 그때란 대체 언제지? 그때가 오기는 할까?

원작과 너무 달라져 버린 지금, 원작과 캐릭터성마저 달라져서 카르시안의 표정조차 읽지 못하는 지금.

카르시안이 더 이상 ‘남자주인공’으로서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지금.

우리에게 승산이 있기는 한 걸까?

촤르르륵…….

결국 에메르나와 제네스, 세리나의 손목을 동여맨 얇은 수갑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저 모습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