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 * *
난 기사들에 의해 멀어지는 제네스를 가만히 바라봤다. 에메르나와 제네스가 사라진 후, 많은 사람들이 내게 다시 돌아왔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체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하셨습니까?”
“언제부터 에메르나 황비…… 이런, 이젠 황비라고 부르기도 싫군요. 그 사악한 마녀가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는지 아신 건가요?”
여기에 있는 이 사람들은 내가 예리엘 만물 상단주의 도움으로 관중석 밖에 설치한 전광판에 띄운 영상을 전부 봤다.
오르셀 숲에서 포박해 온 암살자에게 바람개비꽃 뿌리를 먹여 세뇌에서 깨어나게 했고, 진술케 했다.
에메르나의 모든 짓을.
동시에 난 하인리드에게 부탁해서 바람개비꽃 뿌리가 흑주술, 흑마법에 대항하는 힘이 있다는 걸 증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증명되자 레오나르도 선황제에게 걸린 세뇌와 루니아 황후가 앓던 병이 나은 이유도 설명되었다.
모두,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에메르나의 짓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진술을 시엘이 개발한 전광판에 띄워 관중석에서 도망쳐 나온 이들에게 똑똑히 알려줬다.
에메르나의 그 잔혹하고도 끔찍한 이면을.
“정말 대단합니다.”
“이런 대단한 일을 이렇게 어린 영애 혼자 해내셨다니.”
“과연 라움디셀의 명예 따님다우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송했다. 난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는데, 이런 나와 달리 클로드의 어깨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았다.
“흠, 뭐. 내가 딸을 잘 뒀지. 투자도 잘했고.”
마치 날 향한 칭찬이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드높이는 칭찬인 것처럼 말이다.
“라티아가 대단한 게 어디 하루 이틀입니까.”
그런 클로드를 타박하는 카르시안의 얼굴에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뿌듯한 자랑스러움이 들어차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똑 닮은 부자는 나를 보고 아주 흐뭇해했다.
헥터와 버틀러, 길버트 등 라움디셀 공작가 사람들의 몸에도 바짝 긴장감이 돌았다. 으스대는 모습이었다.
“다음에 꼭 저희 저택에서 식사를 한번…….”
“티 파티 초대에 꼭 응해 주세요. 영애와는 예전부터…….”
“저를 기억하시겠지요? 우리 함께 티 파티를 즐겼던……!”
다들 내가 황도 접근 금지령을 받았고, 선황제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해서 나를 사교계에서 제하듯 굴었던 건 잊은 모양이다.
이번 일을 더 자세하게 듣고 싶은 건지,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초대하려고 안달이었다.
난 영 걸쩍지근한 기분을 느끼며 어색하게 사람들만 둘러봤는데, 그런 나를 빼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잠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어요.”
루니아 황후였다.
“네, 좋아요.”
난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루니아와 함께 관중석의 뒤쪽으로 난 산책길을 걸었다.
클로드와 카르시안과 그의 어깨에 앉은 삐로리가 이쪽을 보고 있는 게 시야에 걸렸다. 난 그들에게 괜찮단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나와 루니아 황후는 한동안 말없이 조용히 걸었다.
사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친자 검사에 대해서? 아론에 대해서? 그도 아니면 내가 어떻게 에메르나의 행적을 전부 꿰뚫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봐도 루니아가 물어봐야 하는 내용이고, 설령 루니아가 궁금해한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대답해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묵묵히 걷기만 하던 때였다.
“전부, 알고 있었나요?”
정확히 무엇을?
난 가만히 루니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역시 생각이 읽히지 않았다.?
내 시선을 받은 루니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에메르나가…….”
하지만 그 말은 끝내 끝마쳐지진 않았다. 그래도 난 그만하면 다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는 아니에요.”
“하지만 어떻게?”
“음…….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시간이 해결해 줬다고밖에는…….”
“시간이 해결, 해 줘요?”
난 애석하다는 듯 웃었다. 루니아는 도저히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지금이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후우, 난 심호흡을 했다.
“믿기지 않을…… 이야기를 하나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내가 이해하는 데엔 더 오래 걸릴 거예요.”
루니아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걸렸다. 마침 그녀의 뒤에 벤치가 하나 보였다.
“그럼 저기로 가요.”
“좋아요.”
나와 루니아는 벤치로 가서 앉았다.
아까 생각했던 대로 지금이 때다. 그때가 왔다. 나의, 라티아의 친모일지도 모르는 루니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가.
손이 잘게 떨렸다.
이걸 고백하는 건 처음이다.
사실 이걸 고백해도 되는지조차 의문이다. 고백한다고 해도 믿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작’을 말하지 않으면 루니아에게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다.
언젠가 클로드와 카르시안에게도 솔직하게 말할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결국 생각만 하고, 끝내 말하지 못한 이유는…… 그래.
나의 ‘시작’을 고백하게 되면 난 필수적으로 나의 친부일지도 모르는 레오나르도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걸 토로해야 한다.
루니아가 평생을 사랑한 사람의 죽음을, 내가 포기했다고.
그게 무서웠다. 날 비난할까 봐. 선택적으로 군 걸 힐난할까 봐. 결국 레오나르도를 지키지 못한 날 비겁하다고 할까 봐.
그래서 난 더더욱 루니아에게 사실을 고백하고자 한다. 우리가 정말로 가족이라면, 해야 하는 일이다.
비록, 레오나르도가 원작과 다른 방법으로 죽어…… 지금은 시체조차 없어서,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무것도 안 한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난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마치 토해 내듯 말했다.
“전 회귀를 했어요.”
* * *
그다음 날, 황비였던 에메르나와 황태자였던 제네스, 황녀였던 세리나가 재판장에 섰다.
세리나는 얼떨떨해 보였지만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 듯 마음을 다잡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피고인들이 자리한 곳 맞은편엔 루니아 황후가 홀로 서 있었다.
“정말 저희가 곁에 있어 드리지 않아도 돼요?”
“황후 폐하께서 혼자 계시겠다고 하셨으니…….”
나와 클로드가 속닥거렸다. 우리의 말대로 루니아 황후는 자의로 곁을 모두 물렸다.
어제 우리는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루니아는 그중 일부만 이해했다.
일단 내가 회귀를 했다는 것, 그래서 내가 미래를 약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보다 더 먼 미래는 ‘원작’을 통해서 알고 있다는 것.
루니아가 이해하지 못한 일은 당연히 이 세계가 ‘로맨스 판타지’ 속 세상이고, 난 그것을 읽은 독자였다는 것이다.
루니아는 이 부분에선 작게 웃음까지 터트렸으니 말 다 했다.
‘예언서를 너무 어렵게 설명하시군요.’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했다.
내가 어째서 흰뿔 산을 지켰고, 바람개비꽃 뿌리가 루니아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라는 걸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이해했으니까 그 외의 것은 상관없을 듯했다.
내가 레오나르도를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 루니아는 숨을 멈췄다.
‘…….’
‘…….’
아주 고요한 적막이 흘러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니아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운명이라는 게 있어요. 태어나고 죽는 건, 그런 일인 거죠.’
‘하지만 전 황후 폐하를 지켰어요.’
‘날 지킬 방법이 예언서에 있었잖아요. 하지만 레오는 아니었던 것 뿐이에요.’
루니아는 선황제를 일부러 ‘레오’라고 가깝게 불렀다. 내가 황제를 일부러 해한 게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운명을 미처 막지 못한 것이라는 듯.
우리가 대화를 마쳤을 땐 해가 살짝 기운 후였다.
다시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우리는 오늘 있을 재판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클로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걱정이 되긴 하는군. 황자 저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난 그의 말에 씁쓸히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 꿋꿋하게 서 있는 루니아를 바라봤다.
이윽고 재판장이 들어와야 하는 때.
하지만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고고한 자세로 허리를 펴고 앉아 에메르나를 쏘아보던 루니아도 조금 당혹스러운 듯 보였다. 재판장이 한참 술렁거리던 때, 한 서기관이 들어오며 말했다.
“재판을 취소합니다!”
그건 너무도 충격적인 말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뭐?!”
“뭐라고?”
“재판을 취소한다니!”
심지어 이 재판은 그냥 재판도 아니고 흑마법과 흑주술을 사용하여 숱한 악행을 자행한 에메르나를 기소한 재판이다. 다름 아닌 황후 루니아가!
날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루니아를 향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루니아가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서기관에게 말했다.
“어떠한 연유에서 재판을 취소한다는 것인지, 재판장의 뜻을 알려 줄 수 있겠는가.”
재판장의 주인은 오로지 정의의 여신뿐.
황후마저도 공손해야 하는 이 공간에서, 서기관은 난처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이…… 기소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립이…… 되지 않는다니?”
루니아가 놀라 되물은 순간, 난 보고 말았다. 에메르나의 입가에 고요히 핀 비웃음을.
어쩐지, 이렇게 순순하게 기소되더라!
분명 뒤에서 다른 꿍꿍이를 펼치고 있던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