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사람이 전부 빠져나가고도 상당 시간이 흐른 후.
관중석에서, 한 여인이 홀연히 일어났다. 그녀는 망가진 관중석에서 그 누구보다 빨리 대피해야 할 만큼 높은 사람이었으나, 일부러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자신은 다치지 않을 거란 확신, 그리고 모두가 ‘안전하게’ 대피한 이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여 민심을 얻을 생각인 게 분명했다.
그녀는 마법사들이 재빨리 관중석을 복구하는 사이로 조용히 걸어나갔다.
에메르나였다.
커다란 소동이 일어난 아수라장과 어울리지 않게 느긋하고 흡족한 걸음걸이였다.
그래서일까?
두드러질 정도로 눈에 띄는데, 오히려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지 못했다. 지금 에메르나는 태풍의 눈 같았다. 세찬 주변을 감싼 거센 바람과 달리 고요하기만 한 그 눈.
금사를 곱게 빗어 늘어뜨린 것 같은 금발이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다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통로로 사라졌다.
“후후…….”
동굴 같은 통로에서 웃음소리가 샜다.
“후후후후…….”
도무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종국에는 입을 악 다물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에메르나가 이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다 죽었구나.’
카르시안과 라티아의 확실한 죽음.
‘오르셀 숲으로 보내 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아무리 뛰어난 기지와 실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탈출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오르셀 숲은 말 그대로 독이 되어 라티아와 카르시안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었다.
‘외부의 도움을 받고 싶어도, 지금 그 도움을 줄 관중석은 아수라장이지.’
외부의 조력자가 죽었는지, 다쳤는지는 모르겠지만 혼비백산해서 미처 카르시안과 라티아를 돕지 못하리라.
‘애당초 연락도 제대로 안 될지도 몰라.’
비행형 송출 마도구의 화면 송출을 막았단 것은 그 외의 통신 장비도 포기한단 소리일 테니. 마도구는 결국 ‘마력’으로 움직이는 거다. 그리고 이쪽 마력은 차단하고 저쪽 마력을 운용할 수 있는 방법 건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그러니 라티아와 카르시안은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
에메르나는 환하게 웃는 얼굴을 감추지 않고 관중석을 떠났다.
그런데 이때였다.
“저기다.”
“나왔어.”
“뻔뻔하기도 하지…….”
“세상에 어쩜…….”
정신없이 도망쳤던 관중들이 관중석의 출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감히 에메르나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우, 우리는 상관없어요!”
“난, 나는 무, 무서워서 따랐던 거예요!”
“그 사람들을 매수해서 라움디셀 공자님을 공격할 줄은 몰랐다구요!”
그리고 그중에는 에메르나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던 시녀와.
“황후 폐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에메르나를 호위하던 기사들도 있었다.
에메르나는 느닷없는 하수인들의 배신에 눈을 부릅떴다. 우아하게 늘어뜨린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는 주먹이 쥐어졌다. 하얗게 질린 뼈마디가 잘게 떨렸다.
“지금 이게, 이게 무슨 짓이냐!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손가락을 들이대는 거야!”
잔뜩 분노한 에메르나는 성큼성큼 걸어 에메르나와 선을 긋던 시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황비의 시녀인 만큼 이름 있는 귀족의 여식이건만, 지금 에메르나의 눈에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흐, 흐윽!”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따위 모독을 하는 거야, 알페든 경!”
에메르나가 늘 자신의 근처에 서 있던 호위기사를 불렀다. 그리고는 시녀의 머리채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쏘아보며 외쳤다.
“저것들에게 황족모독죄의 무서움을 알려 주도록 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찢어졌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에메르나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녀의 곁을 지키던 기사 알페든이 지금 누구의 곁에 있는지.
“황족모독죄라고?”
“누가, 우리가?”
“뻔뻔하기도 하지!”
모여 있는 이들 중 부채를 팔랑거리고 있는 귀부인들의 눈에 얼마나 짙은 혐오가 드리워져 있는지.
“지금 당장 이 손을 놓지 않으면 귀족 재판에 기소할 겁니다.”
그녀에게 제 여식을 시녀로 붙이기 위해 온갖 알랑방귀를 뀌던 공작이 어찌나 분노하고 있는지.
에메르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관중석 근처에 있는 가판대의 음식을 노리고 모여든 새들이 지저귀었다. 그 기묘한 적막 속에서 혼자 노발대발하며 떠드는 사람은 오히려 에메르나뿐이었다.
고요가 주는 공포를 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든, 어떤 짓을 하든, 소리를 쳐도, 패악을 부려도,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그 철저한 무관심으로 인한 공포는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만든다.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기분, 아무도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기분.
외로움이나 소외감엔 비견할 수조차 없는 지극한 고독.
지금 이 순간 에메르나는 그걸 느꼈다.
“왜, ……왜?”
불도 장작이 있어야 타는 법. 장작을 넣어 주긴커녕 불이 탈 산소조차 없애 버리니, 불은 혼자 사그라들 수밖에.
“왜들, 그런…… 날…… 왜…… 네들이 뭔데, 감히…….”
에메르나는 횡설수설했다. 그러는 순간에도 한 공작은 에메르나의 손가락을 억세게 펴서 딸을 풀어줬다. 공작은 에메르나에게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에메르나에게서 권력이 떠나가는 모습 같았다.
에메르나가 옆을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에메르나를 적대시하듯 그녀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단연 돋보이는 이는 바로 중앙에 서 있는 루니아였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순간, 에메르나는 두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왜냐면 루니아 황후의 옆에 그녀가 죽인, 아니. 죽었을 거라고 그토록 확신했던.
“라티, 아…….”
라티아와 카르시안이 있었으니까!?
그제야 에메르나는 지금 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루니아 황후가 입을 열었다.
“선대 황제 폐하께 사특한 주술을 걸었으며 시해했고.”
그녀의 눈에 습윤한 슬픔이 차올랐다.
“이 나라의 황후인 나에게도 흑주술로 저주를 걸다 못해.”
루니아의 곁에 선 클로드의 붉은 눈이 번득였다.
“라티아 글라델리스와 카르시안 라움디셀을 해치기 위해 암살자를 사주한 저, 간악한 마녀.”
그런 루니아를 지키듯 카르시안과 라티아가 무거운 표정으로 에메르나를 형형하게 쏘아봤다.
루니아는 곁에 선 이들을 느끼듯 깊게 심호흡을 한 후, 최후통첩을 날렸다.
“에메르나 이플란트를 당장 잡아들여라!”
에멜하르트라는 황족의 성을 빼앗은 이름을 외치며.
* * *
에메르나는 발악 한 번 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갔다. 그런 에메르나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 사냥대회를 급격히 중지한 루니아 때문에 제네스가 벌레라도 씹은 것 같은 얼굴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의 오만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까부터 사방에서 재생되고 있는 전광판의 영상 때문에.
[황비님을 뵌 순간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황비님은 제게 라티아와 카르시안을 죽이라고……]
[성력과 성수로 가려내 본 결과, 바람개비꽃 뿌리에 흑주술을 해주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에 대한 연구는 계속해서……]
[에메르나 황비님께 키오르게의 잎을 유통한 사람이 접니다. 전 키오르게의 잎이 흑마법의 재료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이, 이게 대체…….”
영상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에메르나가 흑마법 또는 흑주술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녀라고 지목하고 있었다.
제네스는 고개를 휙휙 돌리다 못해 그 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정신없게 충격적인 진실을 쏟아 내는 전광판을 바라봤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에메르나 황비는 선대 황제 폐하를 흑주술로 세뇌했고요. 바람개비꽃 뿌리를 드신 후 세뇌가 깨져 루니아 황후 폐하와 오해가 풀린 게 그 증거예요.]
[바람개비꽃 뿌리를 먹고 내 병이 나았다는 말은, 내가 흑주술이나 흑마법으로 인한 병에 걸려 있었단 증거지요.]
[오르셀 숲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한 암살자들에게 바람개비꽃 뿌리를 먹이자 세뇌에서 깨어나더군.]
라티아와 루니아, 카르시안의 진술로 인해 에메르나 황비가 아이샤 라움디셀을 죽였고 레오나르도 황제까지 시해했다는 것이 낱낱이 밝혀졌다.
제네스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라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로써 모든 게 망했다는 것이다.
‘안 돼.’
에메르나는 제네스의 친모였다. 아무리 서로가 서로를 버리려 했다 할지라도, 그건 서로의 일일 뿐.
세상에선 둘을 가족관계로 묶어 한 패로 보고 있다.
그러니 에메르나가 이 숱한 악행을 저지른 마녀로 지목되었단 소리는.
“제네스 에멜하르트를 잡아라!”
루니아 황후가 외쳤고, 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제네스에게 달려들었다.
“무엄하다! 내가 감히 누군 줄 알고, 큭! 너!”
제네스는 반항했지만 노련한 여럿의 기사를 한 번에 이겨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제네스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창 줄기 사이에 목이 끼워졌다.
완전한 반역자 취급이었다.
그의 앞으로 황후 루니아가 우아하게 걸어 나왔다.
“제네스 에멜하르트.”
루니아는 일부러 그의 미들네임인 ‘레오나르도’를 제했다.
그녀는 제네스에게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황족모독죄, 황족시해죄, 수많은 죄를 짊어진 친모 에메르나 이플란트와 함께 귀족 재판에 기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