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만약 라티아가 세운 가설이 사실이라면, 처음부터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카르시안이 힘으로 베어 가른 옷 안을 보아하니 갑옷이 덧대어져 있었지만, 다행히 적들의 눈은 드러나 있었다.
“카르시안! 할 수 있겠어?!”
라티아는 리볼버에서 마법 탄환을 빼고 일반 탄환을 장전하며 외쳤다. 목적어가 없었지만 카르시안은 알아들은 듯 씩 웃었다.
촤아악!
카르시안이 벤 암살자의 목에서 붉은 분수가 터져 나왔다. 그 혈우(血雨) 속에서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무척이나 잔인하고 두려운 순간이지만, 라티아는 이보다 든든할 수가 없었다.
“좋아. 날 엄호해 줘!”
검으로 싸우는 건 확실히 체력이 많이 든다. 제아무리 남자주인공인 카르시안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체력이 동나고 말 것이다.
‘열 명을 죽였는데 열 명이 충원되었어.’
이 넓은 오르셀 숲에 대체 얼마나 많은 암살자가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이러다간 끝이 없어. 일단 이 자리를 재빠르게 해결하고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부정적인 생각이 필수적으로 따랐지만 일단은 지금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카르시안에게 달려드는 남자의 눈을 겨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크허억!”
눈동자를 정확하게 꿰뚫린 암살자는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카르시안이 근처 암살자의 손목을 비틀어 그가 스스로 제 목에 검을 쑤셔 넣도록 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명사수네.”
“고마워.”
라티아의 옆에 있던 한 암살자가 독침을 불었다. 카르시안은 재빨리 축 늘어진 암살자의 갑옷 조각으로 독침을 막고 그를 끝장냈다.
그러는 동안 라티아는 카르시안의 발목을 노리는 암살자를 맞춰 그 명을 끊었다.
한 발, 두 발…… 다섯 발. 라티아는 탄환이 다 떨어지기 전에 재깍재깍 보충하며 활개를 치는 카르시안과 함께 싸웠다.
“하아, 하아…….”
“……후우.”
텅 비어 있던 강엔 어느새 서른 구의 시체가 늘어져 또 다른 강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환경 오염되겠다.”
카르시안이 턱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온갖 독과 피로 얼룩진 이 땅이 재생되기까지는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르셀 숲을 걱정할 시간은 충분치 않았다.
파사삭, 사사삭……!
그새 라티아와 카르시안을 죽일 새로운 암살군단이 미모사 숲을 건너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라티아는 조금 전 멈췄던 생각을 계속해야 했다.
“도망가야 해. 이대론 끝이 없어. 이건 시작에 불과할 거야.”
“후우, 그래. 우리가 죽을 때까지 몰려오겠지.”
“어쩌면 이 사냥대회에 참가한 모두가 암살자일 수도 있어.”
“단, 제네스는 제외하고.”
그 생각 없는 황태자는 아무것도 모를 거라며, 카르시안이 이죽거렸다. 라티아도 같은 생각이기에 별다른 말을 얹지는 않았다.
라티아는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도망칠 곳은 마땅히 보이지 않았다.
‘이제라도 오르셀 숲을 빠져나갈까?’
하지만 오르셀 숲에도 이렇게 많은 암살자가 있는데, 그 밖이 안전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어쩌면 오르셀 숲의 안개를 걷고 있는 마법사들도 다 한통속일지도 몰라.’
섣불리 움직였다가 괜히 더 경을 칠 수도 있다.
이러는 사이에도 다음 적들은 번개처럼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라티아가 남은 탄환의 개수를 확인하던 때였다.
피이이익―!
하늘에서 맹금류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라티아는 물론이고 카르시안도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성인 남성의 키보다 커다란 날개, 깃털로 보호되어 있는데도 근육질이 엿보이는 몸통, 노란색의 주름진 다리와 단단하고 날카로운 발톱.
“루, ……루카오?!”
아론의 수호 천사인 루카오가 하늘을 빙글빙글 돌며 자신의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루카오의 다리가 네 개라는 것이다.
마치 그리핀처럼.
“끼르륵!”
한 번 시원하게 운 루카오가 바닥에 착지했다.
쿠웅!
몸통은 또 얼마나 큰지, 강가의 자갈 사이로 옅은 흙먼지가 일 정도였다.
“루카, 루카오. 정말 너야?”
라티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뻑이자, 루카오가 까르륵 웃었다.
[가면서 설명할게, 일단 타!]
목에 찬 저 펜던트!
저건 분명 예리엘 만물 상단에서 판매하는 동물어 번역기가 분명했다.
픽!
그 사이 이제 막 숲을 빠져나온 적 하나가 루카오에게 독침을 쐈다. 카르시안은 검집으로 재빨리 독침을 쳐 내고 라티아를 안아 루카오의 몸통 위에 올렸다.
[빨리!]
루카오가 외쳤고, 카르시안은 날아오는 비수를 몽땅 쳐 내며 루카오의 몸통 위로 훌쩍 올라탔다.
마치 말을 타듯이 말이다.
루카오는 그리핀처럼 변형된 제 몸통에 올라탄 두 사람을 확인하고는 곧장 날갯짓을 했다.
날개가 어찌나 큰지, 날갯짓 한 번에 비처럼 들이치던 온갖 비수와 무기들이 방향을 잃고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큰 바람에 모든 무기가 힘을 잃고, 또 한 번에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그렇게 두 사람은 눈 깜빡할 새에 위험천만하던 오르셀 숲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슬그머니 내려다본 아래에선 제네스가 입을 떡 벌린 채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 *
휘이이이……. 거센 바람 소리가 귓가를 강타했다. 어찌나 빠르게 날아가는지, 바람을 맞고 있는 얼굴이 다 얼얼할 정도였다.
결국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뒤에 선 카르시안의 가슴팍에 기댔다.
“힘들어?”
“바람이…… 읍푸푸.”
하나로 높게 묶었건만 머리카락이 입안에 들어왔다.
카르시안이 웃으면서 머리를 정리해 주고, 내 허리를 감싸 안아 제게 더 기대게 해 줬다.
“하늘이라 그런가 바람이 차네.”
그는 능숙하게 휘날리고 있는 망토를 풀어 내게 감싸 줬다. 덕분에 조금씩 떨리던 어깨가 가라앉고, 망토 안에 머리칼을 넣은 덕분에 휘날리지도 않아 편했다.
“루카오, 이제 말해 줘.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응, 일단 우린 관중석으로 갈 거야. 이제 더 이상 관중석은 아니지만.]
이제 더 이상 관중석이 아니라고?
“설마, 관중석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그래, 맞아. 갑자기 전광판이 무너지며 관중석을 공격했어.]
“뭐라고? 공작님은? 다른 사람들은 괜찮아?”
“다친 사람이 많나?”
나와 카르시안이 경악해서 물었다. 끼르륵 운 루카오가 걱정하지 말란 듯 말했다.
[괜찮아. 다들 무사해. 부상자는 있지만 내가 알기로 아직 사상자는 없어. 다들 안전하게 대피했어.]
“휴우.”
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상자가 생겼단 것도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게 어디야.
무엇보다 관중석에 있었을 클로드와 헥터, 버틀러, 길버트 외에 라움디셀 가문 사람들은 다치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었다.
그건 그렇고 루카오의 말에 난 아까 내가 생각했던 가설이 정답이란 걸 깨달았다.
역시, 지켜볼 관중이 없으니까 우릴 공격하는 걸 그만두지 않은 거였어.
“그런데 넌 왜 여기로 온 거지? 이 모습은 다 무엇이고?”
이 질문은 카르시안이 한 것이었다. 루카오는 마치 바닥을 박차듯 발을 구르며 날갯짓을 했다. 벌써 저 멀리에 콜로세움 같은 관중석이 보였다.
[아론이 쓰러지기 전에 나에게 너희들을 지키라고 말했어.]
“황자 저하께서?”
[그래. 그때부터 아론은 너희에게 무슨 일이 생길 거란 걸 예상했던 거야.]
“그런…….”
라티아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독에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을 아론의 얼굴이 아스라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삐로리와 예리엘 만물 상단주가 바꿔 준 거야. 독수리의 모습으론 너희를 도울 수 없을 거라면서.]
루카오가 마치 착륙하는 비행기처럼 허공을 빙글빙글 돌며 착지했다. 그러자 저쪽에서.
“라티아!”
“카르시아안!”
클로드와 헥터가 달려왔다. 카르시안이 먼저 훌쩍 뛰어내린 후, 나를 내려 줬다.
카르시안의 도움을 받아 바닥을 디뎠을 때, 클로드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답답할 정도로 강한 힘이었지만 난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클로드를 마주 안아 줬다. 나에게서 풍기는 짙은 화약 냄새와 피 냄새가 독할 만도 하건만, 클로드는 개의치 않았다.
“삐쪼릿!”
클로드에게 폭 안긴 내 머리 위로 삐로리가 포르르 날아와 앉았다. 걱정했다는 듯 내 정수리를 약하게 쫀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습격이었어. 오르셀 숲에 엄청난 수의 암살자가 있어. 아무리 베어도 줄지가 않더군.”
헥터와 카르시안이 대화하는 소리에, 나를 꽉 안은 클로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배후는.”
“증거는 없습니다.”
애석하게도 그들을 고용한 자가 에메르나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우리에겐 바람개비 꽃 뿌리가 있잖아요.”
증거가 없다면 만들면 되니까.
자, 이제 마지막 반격의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