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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74화 (174/186)

?174화

* * *

“그래서 있잖아? 저 식물은 사실…….”

라티아가 기분 좋게 조잘거렸다. 카르시안은 그런 라티아의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걷고 뿌리를 넘을 때면 손을 건네며 함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르시안의 신경은 분산되어 있었다.

조금 전부터 은밀한 걸음이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날씨를 가늠할 수 있다는 소문이 생겼다나 봐.”

“그렇구나. 식물에 대해 꽤 많이 아네?”

“응! 글라델리스 후작가는 약초를 재배했잖아. 그리고 난 그루안 상단에 취직해 있었고. 일선에서 움직인 적은 드물었지만 그래도 알아 두면 좋을 것 같아서 공부했었어.”

“흐응. 그럼 저건? 저 특이해 보이는 나뭇잎은 뭐야?”

“아, 저건…….”

카르시안은 능숙하게 다시 라티아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집중시켰다.

두 사람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르는 저 그림자는 아직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생각인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카르시안도 섣불리 그림자를 공격할 수 없었다.

‘거리가 꽤 멀어.’

괜히 움직였다가 놓치면 라티아가 불안에 떨지도 모르니까.

‘괜찮아. 파악은 다 하고 있어.’

카르시안은 라티아의 머리카락에 붙은 나뭇잎 한 장을 떼어 줬다. 이제 자신은 어릴 적의 카르시안이 아니다.

라티아가 구정물을 먹어 가며 지켜야 하는 나약한 소년이 아니라, 검 한 자루만 있으면 맹수도 베어 가를 수 있는 남자가 되었다.

그러니 고작 두세 명의 그림자에 겁먹어 라티아를 불안에 떨지 않게 하리라.

카르시안은 다짐하며 라티아가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한편, 라티아는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책에서 읽었는데, 오르셀 숲은 태곳적의 자연경관을 유지한 채라고 했잖아? 이걸 다르게 말하면 진화가 전혀 되지 않았단 소리거든. 그렇다는 말은 여기 사는 생물들은 진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건데…….”

라티아는 이제 입술이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말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포위당했어.’

언뜻 보기로는 카르시안도 저들을 둘러싼 적들을 파악한 것 같았다. 하지만 라티아가 보기에 카르시안의 신경은 두 사람의 뒤에만 몰려 있었다.

‘앞에도, 옆에도. 아니. 그냥 우리를 둥그렇게 에워싼 채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어.’

라티아가 이걸 어떻게 아냐면 오르셀 미모사 때문이었다.

오르셀 미모사는 일반 미모사보다 더욱 예민하다. 일반 미모사는 건드려야 잎이 오므라들지만, 오르셀 미모사는 아니다. 작은 숨결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해서 잎을 확 오므린다.

‘미모사 숲으로 유도하길 잘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지금 이 숲의 오르셀 미모사들은 소리도 없이 차분히 잎사귀를 좁히고 있었다.

‘지금이야 꽤 멀리 있다지만…….’

라티아는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며 아까보다 가까운 곳의 오르셀 미모사 잎이 접힌 것을 확인했다.

‘다가오는 건 금방이야.’

라티아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계속해서 떠들었다.

“우와. 저 나무에 쓸린 자국 좀 봐. 엄청 거대한 동물이 지나간 게 분명해.”

껍질이 조금 까진 나무를 보며 라티아는 아무렇게나 말을 지어냈다. 카르시안의 도움으로 바위를 딛고 올라서서 보다 멀리 보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저 앞엔 강이 있고, 왼쪽보다 오른쪽에 있는 적이 더 가까워…….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네.’

라티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빙긋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사실 이쪽에서 송출하는 비행형 송출 마도구를 방해하면 분명 저쪽에서도 움직일 거라고 예상했다.

‘제네스 황태자가 이 사냥대회를 강행했지만, 에메르나 황비가 반발하고자 했다면 충분히 할 수 있었어.’

하지만 에메르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이 사냥대회를 통해 에메르나 황비가 얻고자 하는 게 있다는 소리야.’

그게 당장 무엇일지는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분명 라티아와 카르시안에게 이로운 건 아닐 터.

라티아는 비행형 송출 마도구를 방해할 때부터 주변을 바짝 경계하고 있었다.

‘어떡할까. 지금이라도 우리의 위에 있는 저 비행형 송출 마도구를 제대로 작동시켜?’

저 암살자들이 움직이고 있단 소리는 지금 관중석의 전광판에 영상이 송출되지 않아 ‘지금이다’라는 지령을 받았단 소리나 마찬가지다.

다시금 전광판에 라티아와 카르시안의 영상이 송출되면 ‘대놓고 죽이는 꼴’이 되니 멈추라고 할 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의 계획이 탄로 나 버려.’

극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선 과정이 철저하게 숨겨져야 하는 법.

라티아는 고뇌했다.

‘어림잡아 열다섯.’

지금 갖고 있는 탄환은 일반탄이 서른 개, 마법탄이 열다섯 개. 그중 속칭 ‘삭제하는’ 탄환이 여덟 개.

‘마법탄을 쓰면 이 오르셀 숲의 생태계에 분명 영향을 끼칠 거야. 그럼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과 너무도 달라져.’

마법탄을 쓰는 건 최후의 수단으로 둬야 한다. 하지만 일반 탄환의 경우 저들이 방탄 옷을 입고 있다면 무용지물.

‘카르시안이…… 저들을 얼마나 상대할 수 있지?’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척 라티아의 걸음을 돕는 카르시안은 분명 뛰어난 무력을 가졌다. 남자주인공이니까 쉽게 죽지도 않고, 그에 준하는 능력을 발휘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능력이 나를 보호하며, 이 숲을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열다섯의 훈련된 암살자를 해치울 수 있을 실력일까?’

저 암살자는 분명 에메르나의 명령을 받은 이들일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흑마법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이성이 없어 더욱 포악하고, 잔인할 것이다.

지킬 것이 없으니 자유분방하게 공격해 올 게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야.’

약점이 많은 싸움이 될 것이다. 카르시안만을 믿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라티아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가는 와중에도 걸음은 차분히 이어져 두 사람은 앞의 강 쪽으로 향했다. 숲보다는 주위가 탁 트인 강이 싸우기 편할 것이다.

결국 라티아는 결단을 내렸다.

달칵. 우우웅……!

“……라티아?”

비행형 송출 마도구를 방해하는 마도구의 작동을 멈췄다. 이제 라티아와 카르시안의 모습은 그대로 관중석의 전광판에 송출될 것이다.

“왜?”

카르시안이 비행형 송출 마도구를 등진 채 라티아에게 입 모양으로 물었다. 라티아는 그런 카르시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동시에 반대 손으로는 허리춤에 찬 카르시안의 검집을 툭 건드렸다.

“!”

그건 카르시안이 검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즉, 라티아는 처음부터 두 사람을 쫓는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단 소리였다.

‘어떻게…….’

분명 라티아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기에, 카르시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 나누는 모든 대화는 관중석에 전달될 것이다. 카르시안은 끙, 목이 막히는 침음을 한 번 낸 후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라티아를 지켜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오만이었군.’

혀끝이 썼다. 묵직하게 무너지는 비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라티아는 카르시안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늘 그곳에서 자상하게 군림하며 카르시안을 굽어살피고 있었다.

카르시안보다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현명하게 보면서.

보호받고 있는 사람은 라티아가 아니라 카르시안이었다.

그는 그제야, 저들이 걸어온 숲이 오르셀 미모사 숲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뒤에만 있는 줄 알았던 그림자는 사실 사방에 있었고, 그 수는 십여 명이 훌쩍 넘었다.

카르시안의 불찰이자 완벽한 패배였다.

“배 안 고파?”

“응, 조금?”

하여, 카르시안은 일부러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간 영상이 끊겼던 동안 두 사람은 이렇게 평화로운 이야기만 했다는 듯이.

라티아는 이로써 그림자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여기서 잠깐 쉬다가……!”

사사삭, 사사사삭!

그림자들이 더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이번엔 풀숲에 스치는 소리조차 감추지 않았다.

조금 높은 바위에 앉으려던 라티아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이었다.

챙!

“크윽!”

“카르시안!”

언제 검을 뽑아 들었는지 모를 카르시안이 라티아의 목을 정확하게 노리는 암살자의 비수를 쳐 냈다. 그 비수는 그대로 날아가 마침 측면에서 달려오고 있던 한 암살자의 손에 박혔다.

“크아악! 독이, 독이!”

라티아를 노린 비수엔 독이 발라져 있었는지, 손이 꿰뚫린 암살자는 급히 비수를 뽑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늦은 모양인지, 암살자는 추욱 늘어진 채 둥둥 떠오를 뿐이었다.

기습과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챙! 채챙! 푸욱, 크아악!

전쟁통을 방불케 하는 죽음의 소리가 라티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라티아는 정신이 없었다.

‘왜?’

비행형 송출 마도구는 멀쩡해 보였다. 그러니 지금 라티아와 카르시안이 습격당하고 있는 이 광경은 분명 관중석에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에메르나라고는 해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라티아와 카르시안이 공격당한 증거를 토대로 배후를 추적당한다면 빠져나가기 어려울 터.

“네, 네 놈!”

15명으로 추정되었던 암살자는 사실 20명이 훌쩍 넘었지만, 카르시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라티아의 걱정과 달리 그는 철저하게 만들어진 살인 병기처럼 차분히 적들을 섬멸해 갔다.

카르시안의 검이 한 암살자의 배를 꿰뚫었다. 반대 손으로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창을 들어 뒤를 노리는 암살자의 어깻죽지를 찔렀다. 몸을 낮춰 긴 다리로 반원의 궤적을 그리자 어깨가 꿰뚫린 암살자가 쓰러지며 동시에 밑에서 음습하게 날아드는 비수의 방패막이 되어 줬다.

카르시안의 모든 움직임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가 만들어 내는 아수라장 속에서 라티아는 홀로 굳은 채 말도 안 되는 가설을 하나 내놓았다.

‘설마…… 관중석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래서 이 광경을 지켜볼 관중이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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