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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73화 (173/186)

173화

황도에서 클로드의 맞은편에 앉아 스크린을 보며 에메르나는 생각했다.

‘제네스가 질 거야.’

이 사냥대회를 강행하는 순간부터, 제네스의 패배는 정해져 있었다.

‘이 사냥대회를 말미암아 아론은 결국 황태자로 복위될 거야.’

제네스는 끌어내려질 것이다. 추잡스럽고 볼품없게 바닥에 내팽개쳐져 모두의 질타를 받을 것이다.

사냥대회가 열리는 동안 짓밟힌 숲의 분노를 고스란히 돌려받는 것, 그것이 제네스에게 남은 마지막 미래였다.

‘죽고 말겠지.’

에메르나는 동정심이라곤 조금도 없이 차분한 얼굴로 친자식의 암울한 미래를 점쳤다.

‘난 대체 무슨 저주에 걸린 걸까.’

누군가가 사슴을 잡았다. 짐승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모습이 생중계됐다. 그것을 본 관중들이 흥분해서 박수를 쳤다.

이런 환호의 도가니에서, 에메르나는 고고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대체 왜 내 사랑은 보상받지 못하는 걸까.’

에메르나는 객관적으로 뛰어났다.

이플란트 백작가의 여식으로 달콤한 아카시아 꿀처럼 황홀한 금발과 봄 하늘을 가둬 둔 것 같은 푸른 눈동자가 아주 매력적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녀의 이름 뒤엔 항상 외모의 칭송이 끊이질 않았다.

모두들 에메르나를 사랑해 마지않았다. 에메르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클로드는 날 사랑하지 않았지.’

에메르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남녀 사이엔 친구가 없다잖아, 그러면 너와 내 사이에도 친구가 없어야지.’

고백을 거절당한 수치스러움에, 그렇게 말하며 우는 어린 에메르나에게 클로드는 뭐라고 말했던가.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왜냐면 우린 아직 어리니까.’

클로드 라움디셀은 어릴 적부터 그렇게 똑 부러졌다. 주워 삼킨 말의 제 뜻도 모르고 내뱉는 에메르나와 다르게.

그런데 결국 클로드도 남자는 남자인지, 친구였던 아이샤를 좋아하게 되었다.

‘남녀 사이에도 친구가 있다며?’

‘너와 내 사이엔 그랬지.’

아마 그게 도화선이었을 것이다.

에메르나가 이 제국에서 가장 지탄을 받고 백안시하는 흑마법, 흑주술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건.

‘클로드의 사랑을 받고 싶었어.’

아이샤를 죽였다.

‘클로드의 사랑을 갖고 싶었어.’

황비가 됐다.

‘난 그저 내 아이에게 사랑받는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황후에게 흑주술을 걸었다.

‘제네스에게 모든 걸 다 주고 싶었을 뿐인데.’

아론을 폐위시켰다.

‘그래야 우리가 사니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자식들에 의해 장장 5년이나 식물인간이 되었다.

‘왜?’

에메르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왜 사랑을 보상받지 못하는 걸까.’

아이샤는 대체 어떤 짓을 했기에 이토록 클로드의 깊은 사랑을 받는 걸까.

루니아는 대체 어떤 짓을 했기에 흑주술마저 해주해 버린 사랑을 받는 걸까.

두 사람과 자신이 대체 뭐가 다르기에, 자식들의 존경과 애정을 받는 걸까.

에메르나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네.’

관중석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에메르나는 이 속에서 철저하게 외로웠다.

그런 에메르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지지직거리는 한 전광판으로 향했다.

마력 간에 충돌이 생겼는지 화면이 끊긴 전광판에 중계를 송출하는 드론은 다름 아닌 라움디셀 가문의 것이었다.

‘라티아 라움디셀.’

에메르나는 차분히 입안에서 한 소녀의 이름을 굴렸다.

클로드의 명예 따님.

라움디셀 공자의 연인.

제네스 황태자의 짝사랑 대상자.

세리나의 연적.

레오나르도에게 ‘헤바테인’을 받은 소녀.

루니아의 하나뿐인 딸.

아론이 꿈에서도 그리는 여동생.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소녀.

모든 사랑을 보상받는 라티아 글라델리스.

드문드문 송출되는 화면 속에서 라티아는 환하게 웃으며 카르시안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에메르나의 예상대로 그 어떤 동물도 사냥하지 않았다. 사냥은커녕 지나치는 잎사귀 하나조차 건들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있었다.

영특한 두 사람은 제네스의 조잡한 계략을 훌륭하게 타파할 방법을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제네스가 폐위된다는 말은 즉 에메르나가 유폐된다는 말과 같다.

그녀의 자식은 어미를 버렸으나, 그녀는 여전히 제네스의 어미이므로.

에메르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관중들은 사냥의 열기에 흥분했으면서 희귀 동물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죽이는 제네스를 보고 욕을 삼키기 바빴다. 그렇기에 에메르나를 신경 쓰는 이는 얼마 없었다.

에메르나가 홀연히 웃자, 그녀의 맞은편에 있던 클로드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 과연 에메르나의 마지막 화살은.

‘어디로 갈까.’

아론을 병간호하는 루니아가 있는 황성? 아니면 제네스를 끌어내릴 마지막 단계를 밟고 있는 카르시안과 라티아?

오랜만에 바짝 긴장하여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클로드는 목을 조인 크라바트를 풀며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헥터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클로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메르나와 달리 지금 클로드를 주목하는 이는 많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카르시안과 라티아가 하고자 하는 일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게 최우선이다. 이 순간, 클로드의 역할은 이게 전부였다.

[제네스 황태자! 또다시 사냥에 성공합니다!]

중계자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번에 제네스가 사냥한 동물은 커다란 쇠뿔 멧돼지였다. 쇠뿔 멧돼지 역시 오르셀 숲에서만 사는 멸종 위기 종이었다.

“아주 싹을 말리는군.”

“정말 어쩌려고 이러시는 건지…….”

사람들은 쑥덕거리면서도 사냥대회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그 속에서 에메르나는 여전히 호젓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사냥대회란 말 그대로 사냥을 하는 대회.’

에메르나는 제네스가 쇠뿔 멧돼지의 뿔을 잘라 높게 드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비록 참가자는 사냥꾼의 자격으로 오르셀 숲에 들어간 거지만, 운이 아주 나쁘다면 혹시 모르는 일이지.’

다른 사냥꾼에 의해 사냥당할 수도.

기껏 길들여 놓은 사냥개를 죽여야 하나 고민했을 때, 제네스가 사냥대회를 열겠다고 말했다. 재활용의 기회가 찾아왔다.

에메르나의 시선이 미묘하게 제네스의 얼굴을 비껴갔다. 그녀는 전광판 속 제네스가 아니라 전광판 자체를 보고 있는 듯했다.

‘저 전광판은 예리엘 만물 상단의 주인이 만든 것이라지.’

예리엘 만물 상단의 주인은 마법사라고 했다.

‘마법, 마법이라.’

에메르나의 입꼬리가 슬며시, 조금 더 올라갔다. 그녀 또한 어린 시절, 클로드를 갖기 위해 흑마법에 손을 댔으므로 알고 있었다.

마법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리고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마법은 결국 다 허상이야.’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나, 동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법은 완전무결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가장 취약했다.

해서, 같은 마법사인 에메르나는 지금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저 마도구를 망가뜨리는 최적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라티아가 저를 비추는 드론을 망가뜨릴 거라는 것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

분명 송출을 막고 저들만의 계획을 짜거나 이행하고 있으리라.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움직이게 하려면 과정을 숨기고 극적인 결과를 내보이는 게 효과적이니까.

‘하지만 안타깝구나. 오르셀 숲에 있는 너는 송출기를 고장 내는 게 고작인데, 그 때문에 고립되고 말 테니!’

에메르나가 씩 웃은 이때였다.

펑, 퍼펑! 콰앙!

사람들의 집중을 받던 전광판이 갑작스레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꺄악!”

“세상에!”

“전광판이 쓰러진다!”

“다들 대피해요!”

조금 전까지 사냥대회의 열기로 달아올랐던 관중석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관중석을 향해 쓰러지는 전광판을 피해 달아나기 바빴다.

“클로드!”

“공작님, 피하셔야 합니다!”

그건 관중석에 앉아 있던 클로드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헥터, 버틀러, 길버트와 함께 일등석 비상 대피로로 몸을 틀었다.

빠르게 발을 놀리는 클로드의 이마엔 금이 가 있었다.

‘전광판을 터트려 관중석을 덮치게 할 줄이야. 대체 무슨 꿍꿍이지?’

힐끗 돌아본 관중석은 아비규환이었으나, 그중에서도 한 사람만은 똑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고하게 앉아 있는 에메르나였다.

이토록 난리가 난 상황 속에서, 에메르나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 우아하게 그 자릴 지킬 뿐이었다.

‘에메르나…….’

일순간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친 것 같단 착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에메르나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으니.

그러나 이어진 시간은 무척 짧았다. 클로드가 미련 없이 모퉁이를 돌았으니까.

에메르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 클로드의 마지막 눈빛을 되새기며,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푸르른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라티아, 카르시안. 너희의 기일로 정하기 딱 좋은 날이구나.’

화사하게 웃는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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