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탕, 탕탕!
사냥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공포탄 소리가 숲속을 울렸다.
“와아아아!”
“저기에 사슴이 있다!”
“우린 이쪽으로 가자고!”
사냥꾼다운 모습을 갖춘 이들이 속속들이 숲속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도 가 볼까.”
“응.”
그중에는 움직이기 편한 활동복 차림의 카르시안과 라티아도 있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숲속으로 사라진 후에야 천천히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라티아는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삐이이익―!
매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루카오는 아니었다.
‘공작님께 삐로리를 맡기고 오길 잘했다.’
하마터면 저들의 한 끼 식사가 될 뻔했지 않나. 물론 삐로리가 이 소리를 들었다면 불같이 화를 냈을 게 분명했다.
라움디셀 공작가에서 사냥대회에 참가한 이는 카르시안과 라티아뿐으로, 클로드와 헥터, 메리, 앤 등의 다른 사람들은 황도에서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중계를 보고 있었다.
예리엘 만물 상단에서 개발한 대형 스크린과 현장을 송출해 주는 비행형 송출 마도구를 통해서 말이다.
사실 오늘 사냥대회에, 라티아는 참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분명 함정이 있을 거예요. 너무 뻔하죠.’
그렇기에 카르시안과 함께 관중으로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다짐을 하기가 무섭게, 제네스가 한 가지 상품을 추가했다.
‘설마 엘릭서를 내놓을 줄이야.’
엘릭서, 그것은 어떤 병이든 치료할 수 있다는 전설의 약이었다.?
한쪽에서는 마력으로 성수를 응집해서 만든다고도 했고, 또 한쪽에서는 유니콘의 뿔로 성수를 50년간 저어 만든 것이라고도 했다.
흑마법은 물론이고 강력한 염산이나 다름없는 히드라의 독도 깨끗하게 정화시킨다는 힘이 있는 엘릭서.
‘과장된 소문일 수도 있지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아론에게는 도움이 되리라.
“저 많은 사람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 엘릭서는 특 1등의 상품이야.”
특 1등은 일반 1등보다 더 높은 등급으로, 황도에서 스크린으로 구경하고 있는 이들의 투표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상이었다. 인기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분명 사람들은 희귀한 동물을 잡으려고 할 거야.”
“그것도 많이 잡으려고 하겠지. 그래야 더 많은 관심을 받을 테고, 그게 투표로 이어질 테니까.”
해서, 아까 시작과 동시에 쏜살같이 숲으로 파고든 이들은 어떻게든 희귀한 동물을 잡기 위해 더욱 깊숙이 파고들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라티아와 카르시안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둘은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황태자 전하도 직접 참가한 만큼, 가장 강력한 상대는 황태자 전하나 다름없는데.”
“맞아. 익명 투표가 아니니까.”
인기만 보자면 라움디셀도 만만찮으나, 문제는 기명 투표라는 점이었다. 황태자에게 투표한 사람과 투표하지 않은 사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불이익 때문에 억지로 황태자에게 투표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터.
“우리에게 투표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야 해.”
“혹은 득표 수가 적어도 뒤집을 수 있을 만한 힘이 있다던가.”
카르시안과 라티아는 차분히 계획을 짜며 걸음을 옮겼다.
사냥대회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곳, 오르셀 숲은 황도에서 북서쪽으로 나가야 있는 곳이다. 접근은 쉬웠지만 안개가 끼는 날이 잦고 지형이 워낙 험준해서 사람의 손이 많이 닿지 않았다.
덕분에 태곳적의 자연경관이 보존된 곳이기도 하며 그 시대의 동식물을 관찰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라티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야말로 천혜 자원의 성지나 다름없네. 와아, 책에서만 보던 식물들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사냥 대회라니, 얼마나 멍청하고 아둔한 생각이란 말인가?
‘오늘 이 사냥대회를 열겠다고 마법사들에게 억지로 안개를 걷게 만들고…….’
지금도 이 아름다운 숲은 인간의 발에 짓밟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오랜 시간 예전의 모습을 간직한 채 독자적인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동물들이 죽어 나가고 있고,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
처음 이 사냥대회를 연다고 했을 때, 제네스는 숱한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학자들의 반대가 아주 거셌다.
그럼에도 제네스는 자신이 황태자란 이유로 학자들을 가두고 고문까지 하며 사냥대회 장소를 바꾸지 않았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이 오르셀 숲을 고수하나 했더니.’
이건 아론이 아무리 치고 올라와도 황태자는 자신이며, 황태자의 자리는 아직 공고하단 본보기이기도 했다.
라티아는 슬그머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황도에 설치된 스크린으로 화면을 송출하는 비행형 송출 마도구가 보이지 않았다. 라티아는 이때다 싶어서 비행형 송출 마도구의 기능을 저하시키는 마도구의 전원을 켰다.
이제 라티아와 카르시안의 대화는 황도로 전송되지 않을 것이다.
라티아가 다 됐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카르시안이 이제야 좀 살 것 같다는 얼굴로 속 시원하게 말했다.
“이 대회가 끝나면 제네스도 끝이야.”
“황성 국고에 잠들어 있던 보물들을 탐내며 참가한 이들마저도 제 몫을 챙긴 후엔 입을 싹 씻고 말 테니까.”
라티아가 냉소적인 표정으로 신랄하게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걷는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여기 뿌리 있다.”
?카르시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 응. 고마워.”
라티아가 카르시안의 손을 잡으며 뿌리를 넘었다. 안전하게 넘어온 라티아를 확인한 카르시안이 다시 주제를 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대회가 끝난 이후의 여론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해.”
“그러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하지.”
“그 어떤 동물도 죽이지 않고.”
“그 어떤 식물도 해치지 않고.”
둘이 서로를 마주 보고 씩 웃었다. 계략적인 미소가 똑 닮아 있었다.
“황태자가 아무리 잔인한 짓을 유도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다고 알리는 거야.”
“오히려 이 숲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줘도 좋겠지.”
이 숲을 사냥대회 장소로 지정하는 동안, 제네스는 너무도 강압적으로 행동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반발을 샀는데, 여기서 아론의 복위를 주장하고 있는 이들이 황태자의 간악한 계략에도 놀아나지 않는 올곧음을 보인다면?
아무리 아론의 건강이 위태롭다 하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터.
그러면 자연스레 사람들은 아론을 구할 수 있는 엘릭서를 라티아와 카르시안의 손에 쥐여 줄 것이다.
아론이 건강을 되찾아야만 폭정을 일삼는 제네스를 막을 수 있으니까.
‘기명 투표는 제네스에게 양날의 검이야.’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은 이들을 처단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테니.
카르시안과 라티아는 혹여나 희귀한 식물의 잎이나 뿌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히 걸었다.
* * *
같은 시각, 제네스는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었다.
‘미치겠네. 보란 듯이 나를 놀리는 꼴 좀 보라지!’
제네스의 머릿속엔 사이좋게 사냥대회에 참가한 라티아와 카르시안의 모습이 무한히 재생되고 있었다.
사실 아까, 제네스는 라티아에게 다가가 오늘 함께 다니자고 제안했다.
‘나와 함께 다닌다면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지.’
라티아가 원하는 상품이 뭔지 알고 있다고, 그걸 가질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듯이 으스댔다. 이렇게 하면 라티아가 껌뻑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 죄송해요. 선약이 있어서요.’
라티아는 그렇게 말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고,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아까까지 모습도 보이지 않던 카르시안이 나타나 라티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제가 그 선약이고요.’
그렇게 말하며 능청을 떠는데, 하마터면 제네스는 칼을 뽑아 그 면상을 죄다 죽죽 그어 놓을 뻔했다. 아니, 평소의 제네스라면 분명 그리 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이성을 바짝 잡을 수 있던 이유는 이 또한 예상 범주였기 때문이었다.
‘과연 어머니시군.’
오늘 오전, 에메르나와 합의도 없이 사냥대회를 연 제네스에게 그녀가 찾아왔다.
제네스는 에메르나가 자신을 업신여기거나 비웃을 줄 알았지만, 웬걸.
‘아주 잘하셨습니다. 황태자. 아주 훌륭하고 똑똑한 생각이었어요.’
에메르나는 제네스에게 환하게 웃으며 칭찬을 해 줬다. 그러며 제네스가 보다 쉽게 라티아를 손에 넣을 수 있도록 몇 가지 계략도 짜 주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이용은 잘하겠습니다.’
클클, 제네스가 속으로 비열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에메르나가 짜 준 계략 안에는 라티아가 일부러 제네스 앞에서 카르시안과 돈독한 관계인 척 연기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제네스는 담백한 척 물러설 수 있었다.
‘어차피 엘릭서는 내 손에 있다.’
투표를 익명으로 하지 않은 건 제네스가 머리를 굴렸단 증거였다.
‘난 황태자야. 누가 감히 날 거역해.’
모두들 황태자인 제네스에게 투표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특 1등은 결국 제네스가 될 터.
‘상을 받고 나서 다 죽어 가는 아론을 언급하며 민심을 사라고 그랬지? 그리고 그에게 양보하는 척도 하고.’
이것도 에메르나가 짜 준 계략의 일부였다.
‘하지만 민심으로 얻은 특 1등의 상품을 쉽게 양보하면 그건 마음을 무시하는 일이지. 그러니까 아론의 복위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는 라움디셀과의 관계를 개선한다는 이유로 라티아와 데이트를 하는 거야.’
제네스가 라티아를 좋아한다는 것쯤이야 제국에서 모르면 간첩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뻔한 대시도 거리낄 게 없었다.
‘오히려 내가 순애보라고 긍정적인 소문이 날지도 모르지.’
여자들은 그런 걸 좋아하지 않나. 순애보, 순정남, 한 여자만 보는 늑대…….
황태자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엘릭서까지 받아먹은 라티아가 더 이상 물러날 길은 없을 터.
제네스는 바닥에 검을 푹 찍어 세워두고 건틀렛을 낀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라티아…….’
그를 끓게 하는 유일한 여자가 이제 곧 이 손 안에 들어온다.
제네스는 고양된 기분을 감추지 않고 주먹을 높게 내지르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
그 우렁찬 소리에 주변의 동물들이 놀라 도망치는 소리가 부산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