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난 카르시안이 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도 내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카르시안은 웃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진중한 눈빛을 한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볼 뿐.
괜히 입이 바싹 마르고 손바닥에 땀이 났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믿을 수 있도록 해 볼 거야.”
“……어?”
“사실일 수밖에 없는 일인데, 그게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러니 반대로 그걸 믿어 보려고 할 거라고. 사실이잖아. 사실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지. 부정할 수도 없겠지만.”
난 머리가 멍해졌다.
잠깐만, 카르시안. 그렇다는 말은…… 넌 내가 황후 폐하의 친딸일 수도 있다는 말을 믿는다는 거야?
터무니없는 말이잖아. 어처구니없는 말이라고. 동화 같은 일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뭐라 말하고 싶어서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결국 난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사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하고 싶은 말은 있었던가?
이불만 그러쥐고 있는데, 카르시안이 팔뚝 사이로 제 얼굴을 감추며 말했다.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단, 뭐라도 해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해. 친자검사라든가.”
“친자…….”
“그래. 사실일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확인을 해야지.”
“아…….”
“그럼 나오는 결과가 있겠지. 사실이면 그때는 정말 믿어야겠고, 사실이 아니라면…… 믿지 않길 잘한 거겠지.”
그래, 맞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눈앞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난 여전히 엎드려 있는 카르시안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
흠칫, 카르시안의 몸에 딱딱하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고마워, 카르시안! 좋아. 네 말대로 해야겠어. 맞아.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넌 최고야!”
너무 기뻐서 그의 뒷목과 날갯죽지에 얼굴을 마구 비벼 댔다. 까슬한 연무복의 감촉에 볼이 따끔거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좋아. 지금 당장 공작님을 찾아가야겠어. 그리고 하인리드 대신관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해야겠어!”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르시안은 여전히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머릿속엔 오로지 친자 검사에 관련된 것밖에 없었다.
“나 먼저 나가 볼게!”
난 뻣뻣하게 굳어 있는 카르시안의 등에 대고 외치듯 말하고는 쏜살같이 클로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뒤에서 카르시안이 허망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뭐, 아닐 수도 있고.
* * *
―“좋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통신구 너머의 하인리드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너무 기뻐서 입술을 꽉 문 채 손을 번쩍 치켜들었고, 내 모습을 본 클로드가 진정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황성에서 뵙겠습니다.”
클로드가 통신을 끊었다. 난 여전히 팔을 번쩍 치켜든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환호를 지르고 싶은데 참는 중이었으니까.
“됐어. 이제 말해.”
“와아!”
반짝반짝, 손목을 흔들어 신남을 표현했다. 클로드가 피식 웃었다.
“조금 전까지 ‘내가 싫어서 버린 거면 어떡하죠?’ 하고 우울해했던 사람이 맞나.”
“그 우울했던 사람에게 ‘쫄리나?’ 하고 자극한 사람이 있어서요.”
내 말에 클로드가 쿡쿡 막힌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 나는 “친자 검사를 할래요!” 하고 외치며 클로드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클로드는 헥터와 함께 있었는데, 마침 두 사람은 루니아 황후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극할 만한 일이 있었으니까.”
“맞아요. 황후 폐하께서도 남몰래 제가 황후 폐하를 무척 닮아서 신기하게 여기셨다면서요?”
그가 읽던 황후의 편지엔 내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물론 말도 안 되고, 마땅한 증거도 없는 이야기라는 걸 안다고,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우리가 이렇게나 닮을 순 없다고.
루니아 황후는 부디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민망해하면서도 나를 설득해 달라고 강경히 부탁했다.
“그런데 라티아.”
“네?”
“만약 네가 정말 황후 폐하와 인연이 있다면, 넌 어쩔 생각이지?”
“네? 어…….”
난 눈을 깜빡거렸다. 사실 이 일은 나에게 너무 벅차다.?
내가 그녀의 딸인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프다. 그래서 그 이후에 대한 일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보아하니 아무 생각도 없는 모양이군.”
이크, 정곡을 찔렸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생각해 봐. 머리가 아파서 쉰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제 괜찮아진 것 같은데.”
클로드가 굵은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 쪽을 툭툭 치며 말했다.
“으음, 네에. 알겠어요.”
난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대체 뭘 생각하라는 건지 감을 잡지 못했다.?
황녀가 되는 거 말인가? 근데 그럴 수가 있나?
멋대로 클로드의 집무실 소파를 점령하고 누웠다. 클로드는 그런 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까 카르시안이 내 침대에 있다고 말했기 때문인지, 나를 내보내려는 기색도 없었다.
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황녀라……. 황후 폐하가 나의 엄마고, 아론 폐태자가 나의 오빠라…….
머릿속으로 우리 세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떠올려봤다. 신기하게도 정말 가족 같은 모습이긴 했다.
어디를 가도 겉도는 것 같던 내가 완벽하게 들어맞는 자리에 쏙 들어간 퍼즐 조각처럼 안정감 있어 보였다.
괜히 헤벌레 입이 벌어지려던 때, 순간 등골이 다 오싹한 생각이 들었다.
……잠깐.
내가 황녀고, 아론이 내 오빠고, 황후가 내 엄마라면, 내 아빠는…….
레오나르도 황제!
난 튕기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내가 이렇게 부산을 떠는데도 클로드는 묵묵히 제 일만 했다.
“공작님, 공작님!”
난 그런 클로드의 앞으로 달려가 책상에 매달렸다.
“안 돼요!”
“뭐가?”
“이, 이렇게 되면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뭐가.”
“제, 제가 만약에 황녀라면. 그러니까 황후 폐하의 딸이라면……!”
경악에 찬 내 목소리를 듣고, 클로드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가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돌아가신 레오나르도 황제 폐하께서 네 부친이 되겠지.”
“……!!!”
흡, 난 숨까지 집어삼켰다.
자연스레 나의 머릿속엔 레오나르도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황성 경매 전야 파티 때 봤던 그 날선 모습과 내가 공작령으로 가기 전, 마차에서 봤던 위압적인 모습. 그리고 라움디셀 공작령의 그루안 상단에서 봤던 호쾌하고 자상한 모습. 마지막으로 내게서 바람개비 꽃 뿌리를 가져가던 모습까지.
난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어쩐지 내가 바람개비 꽃 뿌리를 전해 줄 때 느꼈던 손바닥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떴다.
마음속 가득히 차오르는 뭔가가 있었다. 난 그걸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만히 나를 살폈는데, 그건 죄책감이었다.
내가 공작성에 온 지, 3년이 막 되었을 때.
난 원작을 한번 전부 되돌아봤다. 그러며 루니아 황후를 지키겠다고 했으면서, 황제가 죽는 운명은 어쩔 수 없다는 양 말했다.
구할 방도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 했던 생각이, 지금 날 옥죄인다.
“라티아.”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어느새 내 옆으론 클로드가 와 있었다.
“그래. 이런 걸 생각해 보란 거였어.”
울음으로 말문이 막혀서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클로드가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줬다.
“관계가 달라졌겠지.”
“……흡.”
“그러니 받아들이는 기분도 달라졌을 거고.”
“흐윽…….”
“상황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흑, 우흑…….”
꽉 문 아랫입술이 아프지도 않다. 볼을 타고 줄줄 흐르는 눈물이 입안으로도 들어왔다. 하지만 짜지 않았다. 모든 걸 놓친 기분이다.
“하지만 라티아. 네가 자책할 필요는 없어. 몰랐잖아.”
다정한 목소리가 나를 위로한다. 하지만 난 그래서 더 마음이 안 좋았다.
왜냐면 난 다 알고 있었으니까.
“몰랐으니까. 모르는 걸 어떡해.”
아뇨, 다 알았어요. 다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았어요.
사실 내가 만약 간절했더라면, 어떻게든 레오나르도 황제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더라면.
……분명 방법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다른 일만으로도 벅차단 이유로, 당장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는 이유로.
생각이 땅을 파고 들어간다. 그런 내게, 클로드가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그 사냥에 참가했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야.”
“…….”
“라티아, 사실은 말이다. 황제 폐하의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어.”
“……네?”
난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와 헥터가 참석했던 장례식엔 빈 관밖에 없었어.”
“그런…….”
“사냥에 참석했던 이들조차 막지 못했고, 시체가 사라진 것도 모르는 상황이야.”
눈물이 뚝 그쳤다. 난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만약에 네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자책하지 말라는 말이, 너무 나를 괴롭히지 말라는 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렸지만 머릿속으로 파고들지는 못했다.
울음 때문에 끈적해진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레오나르도는 에메르나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그런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레오나르도가 세상을 뜬 이유는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레오나르도의 시체가 없었다고?
시체가 없는 장례식.
“공작님. 공작님은 만약에, 믿을 수 없는 일이 있는데 그게 사실일 수밖에 없다면…… 그걸 믿으실 건가요?”
홀린 듯이 묻는 내 목소리가 몽롱했다. 클로드는 내 말뜻을 잘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붉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세월이 비껴가는 얼굴은 여전히 젊고 잘생겼다. 난 그런 클로드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클로드는 잠시간 나를 가늠하듯 보다가 시선을 모로 돌렸다.
“음……. 내가 그러고 싶다면 믿겠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클로드의 말이 드디어 머릿속으로 파고든다. 난 그의 말에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가 없는 장례식.
이 세계 같은 로판 소설엔 몇 가지 클리셰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건데, 장례식에 시체가 없을 경우…… 높은 확률로 그 대상은.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