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 * *
지나가는 사람 아무라도 좋으니까 붙잡고 묻고 싶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게 사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그걸 믿을 거냐고.
예시를 하나 들자면 하녀 태생의 사생아인 줄 알았던 한 소녀가 사실은 이러쿵저러쿵한 일 때문에 버려진 황후의 친딸이라던가.
“왜 그런 쓸데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낭비하냔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지.”
난 헛헛하게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를 어쩌지.
이건 절대로 쓸데없는 걱정이 아닌데.
오히려 머리 터지게 걱정해야 하는, 진짜 쓸모 있는 걱정인데.
“근데 그렇다고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고…….”
아까 생각했던 대로 누군가를 부여잡고 물어볼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 멀미가 날 지경이다. 머리가 무겁고 목이 뻣뻣해졌다.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이 나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부르셨어요. 아가씨?”
“응…… 메리. 나 오늘 쉴래.”
“네? 어디 아프신가요?”
“몸이 나른해. 열도 나.”
투정 부리듯 말했다. 데뷔탕트를 치르고 나서야 어릴 적에도 부리지 않던 어리광을 피운다.
어릴 적, 나는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 내 한 몸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른에 비해 어린이의 몸은 제약이 아주 많았으니까.
그런데 다시금 어른이 되어 보니,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만 누릴 수 있는 특혜라는 게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지나가고서야 알아차리다니, 참 바보 같은 일이지만 정말 그랬다.
몇 번을 되살아도 모르는 것이 있기 마련이라는 듯이.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데요? 의원을 부를까요?”
“응?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해열제 먹고 잘래. 소란 피우고 싶지 않아.”
“하지만…….”
“시끄러운 것도 싫어. 그냥 쉬고 싶어.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래.”
내 말에 메리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다 이내 알겠다고 답했다.
난 메리가 가져온 해열제를 먹고 침대를 찾았다. 지끈거리는 편두통이 신경 쓰여 잠도 오지 않았다.
얼마나 뒤척였을까?
슬그머니 문이 열리는 기색이 느껴지더니, 누군가가 소리도 없이 다가왔다.
퍽 두려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누운 채 천장을 향해 손을 뻗자, 엄청 크고 단단한 손이 곧바로 마주 잡아 왔다.
건조하면서도 뜨거워 사막이 떠오르는 손바닥.
“카르시안.”
내가 좋아하는 남자주인공의 손이었다.
“아프다고 들어서.”
“소란 피우기 싫다고 말했는데…….”
“소란 아니야. 나만 아니까.”
드르륵 하고 카르시안이 의자를 끌어 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쪽 손은 날 잡고 있고, 반대쪽 손으로는 의자를 끌고 오다니. 팔이 얼마나 긴 거지? 하긴, 원래 키도 크니까 팔도 길겠다.
이번에야말로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침대에 앉지.”
“연무복이라서.”
“그래도.”
“왜 그렇게 날 침대로 못 끌어들여 안달이야.”
피식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조금 얄궂다. 순간 마음으로는 깜짝 놀랐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좋아, 우린 어른이야. 아직 내가 완전한 성인은 아니지만 이만한 농담은 오고 갈 수 있다고. 카르시안은 진짜 성인이기도 하니까.
“내가 언제 안달을 냈다고 그래. 그러는 카르시안이야말로 내 침대라는 걸 의식해서 의자에 앉은 거면서.”
훗, 이만하면 잘 받아친 거겠지?
난 팔이 아프단 핑계로 여전히 천장을 향해 뻗어 있는 팔을 내리려고 했는데, 어라?
“그래, 맞아.”
손을 놓으려는 내 계획과는 달리, 카르시안의 손까지 딸려 온다. 졸지에 나는 카르시안의 손을 맞잡은 채 가슴 쪽으로 끌어오게 됐다.
“의식하고 있어.”
그 바람에 내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카르시안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그러니까 어쭙잖은 자극은 그만둬.”
약간 냉정하면서도 단호한 말투였다. 하지만 말꼬리가 직직 끌리는 걸 보니 나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뭔가를 억누르는 낌새였다.
“기어이 내가 아버지에게 고소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콩닥, 콩닥, 콩닥, 심장이 뛰었다.
나에게 기대진 힘도 없는데, 어린 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게 어른의 무게라는 걸까? 아니면 성큼 어른이 된 카르시안의 분위기인가?
“그래서. 몸은 좀 어때?”
입을 열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자 카르시안이 내 손을 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나를 압박하던 것이 사라지며 조금 숨통이 트였다.
“아깐 머리가 아팠는데, 지금은 괜찮아.”
“열은?”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들썩거리고 말았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칼을 헤치고 조금 전까지 맞잡고 있던 카르시안의 손이 훅 들어왔다.
뒷목에 닿은 손등의 뼈 모양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나는 살갗이 예민해져 있었다.
“없네.”
이번에도 내가 아무런 말도 못 하자, 멋대로 열을 가늠한 카르시안이 단정 지었다.
아닌데, 나 지금 열 엄청 나는데.
너무 놀라 땀까지 흠뻑 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해열제는?”
“……먹었어.”
꽉 다물린 목이 칼칼했다. 카르시안이 보고 있을 내 뒷모습이 무진장 신경 쓰였다. 등골이 오싹하고 오감이 뒤로 쏠린 느낌이었다.
내가 카르시안을 등 뒤에 뒀다는 이유로 이렇게 긴장할 줄이야.
맹수에게 등을 돌린 채 걷는 기분이었다.
어떡하지? 이제라도 몸을 돌릴까? 등이 간지러웠다.
하지만 카르시안의 얼굴을 보면 내 표정을 들키지 않을까? 난 이제 카르시안의 표정을 읽을 수 없는데, 카르시안은 내 표정을 읽고 말 거야. 등 근육이 꼬이는 것 같다.
“무슨 일이야?”
“……어?”
이런저런 생각으로 아까까지 지끈거리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가고 있을 때, 카르시안이 느닷없이 말을 건넸다.
“고민이 있는 거 아냐?”
“……고민?”
“네가 아무 일도 없이 이렇게 늘어져 있을 리가 없잖아.”
“아……. 그냥, 몸이 안 좋아서.”
“그러니까.”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카르시안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지금 카르시안은 뭘 하고 있을까? 무슨 표정을 짓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시금 카르시안을 향한 다른 생각에 잠겨 들었을 때였다.
휙―
“우앗!”
내 등 뒤에 앉아 있던 카르시안이 별안간 내 위로 몸을 날렸다. 마치 제비 넘기를 하듯 나를 가뿐하게 넘어 내가 바라보고 있는 쪽 침대에 털썩 누웠다.
“뭐, 뭐, 뭐 한……!”
난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르시안은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눕고는 주먹 쥔 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봤다.
“네가 내 쪽을 봐주지 않으니까. 내가 보러 가야지.”
앤한테 이불 빨래하게 됐다고 한 소리 듣겠다. 카르시안이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었다.
“그럼 그냥 침대를 돌아서 오면 되잖아!”
“그랬다가 네가 몸을 또 반대로 돌리면 어떡해?”
“그건……!”
말문이 막혔다. 아마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난 카르시안의 표정과 생각이 무척 궁금하지만, 그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돌아눕기 전에 마주 보게 만들어야지. 넌 날 아예 안 보면 몰라도, 날 본 이후에는 등을 돌리지 못하잖아.”
씩 웃는 얼굴이 무척 자신만만해 보였다. 사랑받는 고양이처럼 오만하고 뿌듯해 보이기도 했다.
난 계속해서 말문이 막혔지만, 그렇다고 숨통까지 막힌 건 아니라 푸스스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어이없어, 진짜.”
“알아. 정곡을 찔려서 그런 거잖아.”
눈을 휘어 웃는데 어찌나 아찔한지, 언제 고양이가 여우가 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언제는 내 침대라는 걸 의식하고 있다며?”
“알잖아. 난 항상 나보다 널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걸.”
카르시안이 묘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교차시킨 팔을 베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는 눈빛이 약간 불손하다.
“그러니까 빨리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려 줘. 나한테 잔인하게 굴지 말고.”
“잔인하게 군다고? 내가?”
“그럼 누가 또 나에게 잔인하게 굴 수 있는데?”
있으면 말해 보라는 양, 카르시안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마치 그의 천적은 오로지 나뿐이라고, 그만큼 자신은 강한 사람이라고 으스대는 것 같았다.
“근데 내가 지금 언제 잔인하게 굴었어?”
고개를 슬그머니 기울이자, 카르시안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팔 안으로 얼굴을 숨겼다.
“차라리 내가 너처럼 아방하면 좋겠어. 그럼 좋아하는 여자의 침대에 누워 있어도 아무 일도 안 생길 텐데.”
“…….”
그렇게 말하는 카르시안의 귀 끝은 터질 듯이 붉었고, 온몸엔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게 보였다.
세상에.
난 귀를 의심했다. 눈도 의심하고 싶었는데 지나간 말과 달리 보고 있는 카르시안의 몸은 너무도 명확해서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
난 자꾸만 그가 침대에 딱 붙이고 있는 하체 쪽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가까스로 끌어 올리며 태연자약한 척 말했다.
“……고, 고소당할, 걸?”
“알아!”
끙! 카르시안이 성질을 부렸다.
“빨리 알려 줘. 나한테 알려 줄 수 있는 거라면.”
성질을 부리든지, 애원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해 줬으면 좋겠다. 난 그런 카르시안을 보다 슬그머니 조금 떨어져 앉으며 말했다.
“음, ……음. 카르시안. 그래. 좋아. 아, 근데 그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뭔데?”
“음, 있잖아. 웃지 말고 들어야 해?”
난 아까 생각했던 질문을 카르시안에게 해 보기로 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게 사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응.”
“넌 그걸 믿을 거야?”
“흠…… 예를 들면?”
“예시? 어, 음. 아.”
난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달라는 양 고개를 반쯤 틀어 붉은 눈동자만으로 나를 보는 카르시안에게 말했다.
“하, ……하녀 태생의 사생아인 줄 알았던 한 아이가 사실은 이러쿵저러쿵한 일 때문에 버려진 황후의 친딸이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