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밀빛 머리칼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많이 쳐 줘도 3살이 채 넘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나 어린아이가 이토록 서럽게 울다니.
‘울지 마.’
아론은 가슴이 다 미어지는 것 같았다. 참 기묘한 일이었다. 지금 처음 본 소녀가 왜 이렇게 가슴에 맺히는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론은 소녀가 더 이상 울지 않았으면 했다. 웃었으면 했다.
대체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던 아론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명이 떠올랐다.
‘내 여동생.’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는 아이. 루니아의 사산된 둘째, 이름조차 받지 못한 황녀.
아론은 지금도 훌쩍훌쩍 울고 있는 소녀가 자신의 여동생처럼 느껴졌다.
‘넌 내 여동생일지도 몰라.’
‘흑, 흐윽…….’
‘그러니까 울지 마. 난 내 여동생이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대신 슬퍼 주고 싶을 만큼. 그러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다고 생각해. 이 세상은 너무도 슬픈 일뿐이거든.’
아론의 서툴면서도 솔직한 말에 소녀의 커다란 눈에 매달린 두꺼운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정말? 정말 내가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인 거야?’
빤한 보라색 눈동자는 아론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아론은 그 시선을 담담히 바라보다 소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밀색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니, 사실은 네가 지금보다 더 슬퍼도 좋으니까 세상에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
‘대신 슬퍼 줄 수 없는 걸 알아. 하지만 같이 슬퍼해 줄 수는 있으니까.’
‘…….’
‘네가 무척 보고 싶었어.’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것을 본 소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본 아론은 돌연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이대로 여동생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우스운 생각이었다. 그의 여동생은 실제로도 존재하지 않는데, 사라질 것 같다니. 이 공간은 꿈속인데. 잠에서 깨면 없어지는, 그런 꿈인데.
그래도 이렇게 만난 여동생과 다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이 너무도 커졌을 때, 아론은 저도 모르게 앓고 말았다.
“가지 마, 가지 마…… 라티아. 넌 내 여동생이잖아…….”
기묘한 혼잣말이었다. 실제로 아론은 제가 무슨 잠꼬대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의 마음엔 그저 간신히 만난 여동생을, 여동생인지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여동생이 분명하단 생각이 드는 소녀와 헤어지고 싶지 않을 뿐.
그런데 이 간절한 마음이 큼지막한 파란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라티아……? 라티아가 여동생이라고……?’
지금 잠꼬대를 하고 있는 아론이 있는 침실에는 그 혼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시린 달빛에 번뜩이는 칼날이 매서웠다. 그것을 등 뒤에 숨긴 한 남자가, 악몽에서 헤매는 것처럼 끙끙 앓으며 잠꼬대를 하는 아론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해괴한 꿈을 꾸고 있는 거지?’
날붙이 못지않게 창백한 은발과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리는 녹색 눈동자가 제 친부를 꼭 닮은 제네스였다.
그는 저의 이복형제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라티, 아…… 가지, 마아.”
아론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그는 그만큼 간절해 보였다. 그 애절한 소리를 듣는 제네스의 얼굴에 흥미로움과 호기심이 동시에 감돌았다.
‘이거…… 재밌는 소리를 들었는데?’
사실 제네스는 오늘 아론을 해치우기 위해 잠입했다. 최근 들어 아론이 무섭도록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한 번 폐위됐기 때문인지 쉽사리 복위의 여론이 형성되진 않았지만, 이젠 또 모를 일이었다. 황도가 개방되며 황도 사람들만 알던 아론의 의로운 면이 제국 전역으로 확산될 테니.
‘세리나와 틀어진 지금, 나 혼자서 아론을 상대하긴 어려워.’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해서, 제네스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편한 방법을 선택하려고 했다.
‘굳이 머리 쓸 필요 있나.’
어차피 아론은 폐태자고, 아무리 치고 올라왔다 하더라도 황후는 결국 뒷방 신세. 남몰래 처리하고 덮어 버리면 그만이다.
‘게다가 라티아와 친해 보였단 말이지.’
그루안 상단의 자선 파티에서는 무려 황후가 먼저 라티아를 아는 체하지 않았나. 아론도 라티아와 퍽 가까운 눈치였는데, 문제는 라티아가 아론을 꺼려 하지 않는단 것이었다.
제네스의 질투심에 불이 붙기 아주 좋았다.
해서, 제네스는 라움디셀 일가가 공작성으로 돌아가자마자 거사를 치르기 위해 침입했는데.
‘이대로 죽이긴 아까워.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아론이 라티아를 여동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물론 잠꼬대니까 믿을 만한 소리가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런데 저런 애달픈 목소리가 그냥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실제로 황후는 아이를 사산했다고 했지.’
어쩌다가, 지나가다였나? 들은 기억이 있다. 루니아의 몸이 급격히 나빠지고 레오나르도 황제와 완벽하게 틀어진 시기도 그쯤이라 하였던가.
‘조사는 한번 해 볼까.’
곰곰이 생각하던 제네스의 머리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쳤다.
‘아,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제네스는 허리춤의 칼집에 단검을 집어넣고는 소리소문없이 들어왔을 때처럼 인기척도 없이 아론의 방을 빠져나갔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죄다 이용해야지.’
제네스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제가 생각해도 썩 괜찮은 생각 같았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제네스의 걸음이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황비궁이었다. 그가 한차례 배신했던 제 친모의 궁 말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될 수도 있는 법이지.’
서로 한 번씩 배신을 했으니, 그건 퉁 치면 될 일이다. 에메르나를 여태껏 잠재운 이는 제네스가 아니고 세리나니까 할 말도 있었다.
‘일이 참 재밌게 됐어.’
에메르나가 클로드를 갖지 못하게 하려고 세리나와 손을 잡았는데, 세리나를 잃고 아론을 치기 위해 에메르나와 손을 잡게 되다니.
이후 일은 그때 가서 또 생각하도록 하자. 지금은 이 재밌는 소식을 전해 주는 것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날, 제네스는 충격적인 진실을 들었다.
“그럼 그…… 아론이 꾼 꿈이 사실이라고요?”
에메르나의 입을 통해 듣는 그 날의 진실, 제네스를 악몽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 * *
비슷한 시각, 클로드와 카르시안은 조금 피로한 얼굴로 클로드의 집무실에 모였다.
‘이렇게 조심성 없게 굴다가 라티아에게 수호천사라는 걸 들키면 어쩔 생각이지?’
‘대체 이 시간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클로드와 카르시안은 각기 다른 생각을 했지만, 떠올리는 대상은 하나였다.
“삐쪼륵!”
바로 삐로리 말이다.
조금 전, 클로드는 일을 하고 있었고 카르시안은 잠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삐로리가 찾아와 라티아가 잠들면 클로드의 집무실로 모여 달라고 말했다.
클로드는 삐로리가 라티아의 수호천사란 걸 알고 있었고, 카르시안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기실 아무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그간 삐로리가 보여 준 행보를 보면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아무튼 두 사람은 삐로리의 말대로 클로드의 집무실에 모인 참이었다.
[오늘 이렇게 모이라 한 것은 다름이 아니고…….]
삐로리가 마치 훈화라도 말하는 것처럼 운을 뗐다. 공작과 공자의 입장에선 새벽에 새의 훈화를 듣게 되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 잠자코 기다렸다.
서두를 떼고도 한참이나 빙빙 돌려 말하던 삐로리가 돌연 폭탄선언을 했다.
[라티아가 황녀일지도 몰라.]
“…….”
“…….”
클로드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카르시안은 귀를, 아니.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깜빡이고 인상을 써도 허공에 뜬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흠, 클로드는 알고 있었나 보네.]
심지어 그걸 클로드는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다. 카르시안이 힐끔거리는 클로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외모부터가 그러니까.”
루니아와 라티아의 외모는 도플갱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쏙 빼닮았다. 당장 아론부터가 라티아를 처음 만났을 때 어린 루니아가 초상화 밖으로 튀어나온 줄 알았다 하니 말 다 했다.
“음, 그건 저도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카르시안은 루니아 황후가 초대한 만찬 때 그녀를 처음 봤다. 라티아 외엔 모두가 흐릿하게 보이는 카르시안의 입장에서도, 루니아와 라티아는 빼닮았다.
“하지만 라티아의 친모는…….”
카르시안이 말끝을 흐렸다. 라티아가 글라델리스 후작의 사생아라는 건 카르시안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카르시안에게 클로드가 카린의 이야기를 대신 말해 줬다. 카린이 글라델리스 후작저에 데리고 온 라티아가 사실은 황실의 강보에 싸여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카르시안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리고 하인리드 대신관이 라티아에게 자신의 신탁을 후회한다고 했다더군. 알아보니 그 내용은 황녀가 부부의 사이를 더욱 끈끈이 이어 줄 거라는 축복이었어.”
이보다 확실한 확인 사살이 또 있을까?
카르시안은 더 이상 부정할 구멍도 찾을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라티아가 바로 루니아가 사산했다는 황녀라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멀쩡히 살아 있는 아이가 사산되었다고 알려진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난 이제라도 라티아에게 진짜 가족을 찾아주고 싶어. 그 동의를 받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모이라고 한 거야.]
삐로리의 말에 클로드와 카르시안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진짜 가족을 찾아준다는 것, 그건 두 사람이 더 이상 라티아의 가족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망설이지 않았다.
“라티아는 제 출생을 궁금해하고 있어.”
“그럼 라티아가 원한다는 소리네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라티아가 그러고 싶다는데. 부자에겐 오로지 라티아의 의사만이 중요할 뿐, 저들의 생각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