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내 비명 같은 말에 버틀러가 놀라 허둥거리며 물었다.
“아가씨,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어? 아…… 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난 동요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버틀러에게 손사래를 쳤다.
버틀러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고맙게도 더 캐묻지는 않아 줬다.
난 방금 깨달은 말도 안 되는 진실이자 진리를 더욱 세세하게 파고들었다.
‘원작에 충실한 이들만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원작이 된통 뒤틀린 후에는 원작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단 소리다.
그런데 가만, 내가 죽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원작은 뒤틀린 거 아냐? 근데 난 그 후로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 왔잖아.
물론 카르시안의 생각은 읽히지 않게 되었다.
대체 무슨 차이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난 눈을 찌푸렸다.
설마…… ‘원작 속의 캐릭터’가 관건인 건가?
그러니까 원작의 인물이 ‘원작답게’ 움직이면 이건 그 사람이 원작에서 뒤틀린 게 아닌 게 되잖아.
그럼 원작 속의 관계, 즉 캐릭터성이 어긋난 게 아니니까 난 그들을 ‘책을 보듯’ 생각을 읽을 수 있던 건가?
예를 들면 이렇다.
집사인 버틀러가 집사다운 일을 할 때. 버틀러는 원작에서도 집사였으니까 캐릭터성이 일치한다.
하녀인 수잔이 하녀다운 일을 할 때. 지금은 하녀장이 되었지만 하녀는 하녀니까 캐릭터성이 일치한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원작에 나오지 않은 ‘라티아의 과거’를 언급할 땐 속이 읽히지 않았다. 이건 두 사람이 원작이 각자에게 부여한 ‘집사’와 ‘하녀’의 캐릭터를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라티아의 과거’는 원작에서 아예 언급조차 없던 거지. 그러니까 원작에서 뒤틀렸고, 그때만 내가 두 사람의 생각을 읽지 못한 거라면?
……순간 소름이 돋았다.
잠깐, 잠깐. 그럼 이번엔 카르시안으로 예를 들어 보자.
카르시안은 처음 나에게 적의를 갖고 있었다. 이건 지극히 원작다운 일이다. 그런데 나의 진심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 준 카르시안은?
이건 원작답지 못한 일이다.
그래서 난 카르시안과 친해졌을 무렵부터 그의 표정을 읽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도 납득이 갔다.
원작에서 클로드와 나, 라티아의 접점은 내가 사형대에 올랐을 때뿐이다. 그런데 난 사형대는커녕 재판대에도 오르지 않고 증인석에 자리했다.
이건 원작 속의 클로드와 라티아의 관계성이, 캐릭터가 아니다. 그러니 클로드의 생각이 읽히지 않았던 것이다.
레오나르도 황제도, 에메르나 황비도, 루니아 황후도 모두 같았다. 원작에서 그들에게 나와 관련된 역할은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런 와중에 조금씩 생각이 읽힌 제네스 황태자는 그가 ‘카르시안의 사랑을 방해하는’ 원작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요컨대 나의 독심술이 가능한 키포인트는 하나였다.
‘원작 속의 캐릭터성’
그것이 일치하면 생각이 읽히고, 일치하지 않으면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내가 회귀한 후에 갑자기 독심술 능력을 갖게 된 경위도 설명이 된다.
이건 ‘원작’을 깨달아야만 쓸 수 있는 재능이니까.
회귀 전의 나는 전생을 알지 못해서 이 능력을 쓸 수 없었던 게 분명하다. 게다가 삐로리와도 제대로 만나지 못했고.
하지만 사형을 앞두고 전생과 함께 이 세계가 책 속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회귀 후에는 캐릭터의 성격이 잘 ‘보였던’ 거다.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심리가 엿보이듯이.
“……으아.”
머리가 아팠다. 생각지도 못한 진실과 마주한 가슴도 엄청나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나는 꼭 ‘전생을 전부 깨달은’ 걸까? 만약 나의 능력 개화를 위해서였다면, 원작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된다.
하지만 난 전생을 모두 깨달았다. 지금이야 좀 시간이 지나서 가물가물 하다지만, 막 깨달았을 땐 내가 전생에서 언제 태어났고, 몇 살에 죽었고, 내 이름이 뭐였고, 중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까지도 기억이 났다.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하는 건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전생이 전부 떠오를 수도 있는 건가?
근데 그렇다면 한 가지 어폐가 생긴다.
왜냐면 난 내가 환생한 이 책의 이름을 모르니까.
다른 건 다 기억나는데, 정작 내가 환생한 세계가 원래 무엇이라 불렸는지는 모른다? 이건 좀 이상하잖아.
뭔가 더 있을 거란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내가 이렇게 골머리를 싸고 끙끙대는 동안, 마차는 어느덧 타운하우스에 도착해 있었다.
난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클로드를 찾아갔다.
“다녀왔어요.”
“음, 그래.”
클로드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아까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도 그는 내가 아닌 책상만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엔 내가 들어오면 하던 일도 멈추던 사람이.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공작님 바쁘세요?”
“황도가 이제 막 개방되었더니 조금.”
“근데 그런 것 치고는 이상한데요?”
“뭐가?”
“뭐긴요. 공작님이 펜을 거꾸로 쥐고 계시니까 그렇죠.”
그렇게 바빠서 나를 쳐다볼 틈도 없으신 분이 왜 펜은 거꾸로 들고 계신대? 잉크가 묻은 날카로운 펜촉이 천장을 향해 반짝거렸다.
“…….”
그것을 확인한 클로드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이건…….”
그는 뭐라고 변명하려고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거북한 한숨을 푹 내쉬며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난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감춰 물었다.
“그래. 사실 한가해. 아니, 바쁜 건 사실이지만 바쁠 정신머리가 아니라고 해야겠지.”
대체 어떻게 참았는지 이젠 다리까지 달달 떤다. 클로드가 초조하게 물었다.
“어땠어.”
그리고는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마른침까지 꿀꺽 삼킨다. 난 그런 클로드를 가만히 보다가 눈을 감았다.
“뭘 어떻긴 어때요. 어차피 카린이 제 친모가 아니라는 걸 알고 계셨잖아요.”
“음.”
클로드가 천천히 긍정했다.
“그리고?”
“네?”
“음?”
“네?”
우린 서로 마주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길 몇 초. 클로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뒤는?!”
“네?! 뒤요?!”
무슨 뒤?! 설마, 내가 독심술 쓰는 이유?! 혹시 그것도 안 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으니 클로드도 만만찮게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보다가 이내 “아!” 하고 깨달은 소리를 냈다.
“그건 아직인가…….”
“네, 네? 뭐가요?”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클로드가 성숙미가 풍기는 커다란 손으로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난 의아하단 시선을 계속 보냈지만 클로드는 그 뒤로 더 이상 말해 주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내가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런데요, 공작님.”
“어, 왜.”
클로드가 지독히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주 바짝 긴장하고 있던 게 한순간에 탁 풀려 버린 모양이다.
“혹시 그건 알아보셨어요?”
“그거?”
“네. 하인리드 대신관님이 후회한다던 신탁이요.”
내 말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마를 문지르고 있던 클로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알아내셨군요!”
속내는 읽히지 않아도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이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클로드는 뭐라고 대답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가 후회한다는 신탁은 딱 하나야.”
난 꿀꺽 침을 삼켰다.
“황녀가 부부의 사이를 더욱 끈끈이 이어 줄 거라는 축복.”
“……?”
“하인리드 대신관은 그 신탁을 후회한다더군.”
* * *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라티아 라움디셀이 어제 라움디셀 공작령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 전에 한 번 더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루안 상단이 연 자선파티 때 만난 게 마지막이 되었다.
자리에 누운 아론은 좀처럼 오지 않는 잠을 청하려 몸을 뒤척거렸다.
‘잠이 왜 이렇게 안 오지.’
요즘 일이 무척 많아 피곤해서 그런지, 머리만 대면 잠들던 이가 그다. 그런데도 이상할 만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인 모양인지, 아론은 언제 잠이 오지 않는다 했냐는 듯이 금방 잠들었다.
그리고 꿈을 꿨다.
‘흑, 으흑…….’
주변은 새까맸다. 그리고 공허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그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분명 소름 끼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아론은 겁이 나거나 두려운 마음 대신 가슴이 아려 왔다. 온몸이 저며지는 듯 아프며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흑…… 흐아앙…….’
가녀린 목소리였다. 처음 듣는 것 같기도 했고, 아주 익숙한 것 같기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아론의 감정이 저 목소리와 공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는 소리를 듣고 따라서 울고 싶어진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아론은 울고 있는 이를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디가 앞인지, 나아가고 있는 건지, 맞게 가는 건지 모를 어둠 속으로 끊임없이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아론의 눈에 새까만 색이 아니라 다른 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가을 하늘 아래 펼쳐진 무수한 밀밭의 색. 색채가 옅은 듯하면서도 제 주장이 강한 어머니의 머리칼 같은 색.
‘흐아아앙.’
울음소리는 그 밀색의 늘어진 실 틈에서 나고 있었다. 아론은 거침없이 밀색 실을 머리칼처럼 늘어뜨린 이에게 다가갔고, 이윽고 말을 걸었다.
‘왜 울어?’
그의 목소리를 들은 걸까? 울음이 끊긴 이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찰나, 아론은 믿을 수 없는 빛깔을 마주했다.
보라색.
이제까지 엉엉 서럽게 울고 있던 소녀의 눈동자는 보라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