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라티아는 보고서를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한 가지 결단을 내렸다.
“오늘 공작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라티아의 결연한 선언에 공작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이들은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라티아는 번복하지 않을 듯 보였다.
“공작님께는 내가 직접 말할게. 하루만 더 시간을 달라고. 그러니까 공작성으로 돌아갈 준비는 계속해도 돼.”
그나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긴 했다. 해서, 하인들은 기껏 실은 짐을 다시 푸는 번거로움 없이 마저 일을 했다.
그들을 뒤로한 채, 라티아는 곧장 클로드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녀의 얼굴은 아주 큰일을 앞둔 사람처럼 결의가 흐르기까지 했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가벼운 응답이 들려왔다. 라티아의 방문이라면 언제든지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목소리였다.
그런 클로드에게, 라티아는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제국립 요양원에 가고 싶어요.”
느닷없는 말이었지만 클로드는 오히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순간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역시 공작님은 전부 알고 계셨어.’
어째서 여태 숨겼던 걸까? 왜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던 걸까?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클로드가 이제야 이 사실을 밝혀 줘서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만약 황도가 봉쇄된 상황에서 내가 에메르나 황비의 손아귀에 카르시안을 빼앗긴 채였다면. 제네스 황태자와 세리나 황녀의 마수를 경계하며 아론 황자를 돕고 있는 상황에, 나의 친모에 대한 정보를 알았더라면…….’
거짓말 조금 보태 머리가 복잡해 터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공작님은 이 모든 걸 계산하고 계셨던 걸까?’
아니면 단순하게 그녀가 데뷔탕트를 치른 후에 말하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안 좋은 상황들이 겹치게 된 걸까?
어느 쪽이든 라티아는 클로드의 빠른 상황 판단 덕분에 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클로드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그랬다. 속전속결.
라티아는 그대로 카린의 얼굴을 알고 있는 버틀러와 함께 제국립 요양원으로 향했다.
일등 집사인 버틀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수잔이 고생해 줄 터였다. 라티아가 미안해하는 걸 알아차린 건지, 수잔은 부드럽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카르시안은 마침 헥터와 대련 중이어서 조용하고 빠르게 다녀오기로 했다.
제국립 요양원은 황도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황도가 봉쇄되었을 때 내 친모에 대한 정보를 알았으면 몸이 근질거려 어쩔 줄 몰랐겠다.’
역시 뒤늦게 알게 된 게 다행이었다.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버틀러와 라티아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버틀러는 버틀러 나름대로, 라티아는 라티아 나름대로 생각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런데 난 왜 친모를 찾고 있는 걸까, 그것도 이제 와서.’
‘라티아 아가씨는 친모를 찾아 어쩌실 생각이실까?’
라티아가 왜 카린을 찾아가는 건지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 라티아가 추구하는 일의 속도는 거의 맹목적이다시피 했다.
대관절 무엇이 그리 궁금하기에?
라티아는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친모라는 카린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래?’
그러나 라티아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그녀조차도 모르는 것이리라.
아니, 더 궁극적인 질문을 먼저 해야 했다.
‘나의 친모라고 뭔가 다른…… 애틋함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핏줄은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본다는 소리도 있다.
그런 말들처럼, 17년간 만나지 않은 모녀도 서로를 알아볼까? 서로를 애틋하게 여길 수 있을까?
‘난 카린을 진짜로 엄마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엄마, 라니.
그건 라티아에게 없는 단어였다.
언젠가, 대신전에 다녀오다가 들린 마을에서 본 축제가 생각났다. 어린아이들은 모두들 제 부모님을 부르며 행복에 젖었다. 그 속에서 라티아는 철저히 혼자였다.
클로드가 부족한 아빠 역할을 해 주고, 수잔이 엄마 역할을 해 줬다 하더라도.
‘그런데 나의 진짜 엄마는…… 피가 이어진 엄마는…… 다를까?’
첫눈에 엄마라는 유대감을 느낄 수 있을까? 다른 아이들처럼?
머릿속이 어지럽고 혼란했다. 다그닥, 다그닥, 쉬지 않고 달려가는 말발굽 소리보다 마음이 더 급했다.
그런 라티아의 마음을 아는지 말들은 쉴새 없이 달려 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티아와 버틀러는 제국립 요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한마디로 말하자면 난 바보였다.
그녀가 제정신이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기이한 설렘으로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만난 나의 친모는 이미 노망이 나 있었다.
환생 전의 세계에선 이 질병을 ‘치매’라고 한다. 최근의 기억부터 차근차근 잊어버리며 과거에 갇혀 사는 병.
그것이 지금 나의 친모인 카린이 앓고 있는 병이었다.
따라서 카린은 최근의 일은 하나도 모르지만, 아주 오래전의 일은 마치 어제 겪은 것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글라델리스! 오오, 망할 글라델리스! 나에게 가짜 돈을 준, 망할 글라델리스!’
그건 나를 팔아넘길 때의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난 다시 타운하우스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타며 조금 전, 카린이 일방적으로 떠든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 아이는 죽었어. 아니, 죽지 않았어. 아니야, 죽었어. 거짓말이야, 안 죽었어. 봐 봐, 여기에 이렇게.’
카린은 허공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건 마치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여기, 여기 이렇게. 황실의 보자기로 싸인 아이가 있잖아. 황실의 보자기로 싸인 아이라니, 이렇게 귀한 아이도 없지. 그러니까 이 아이면 될 거야. 얘만 있으면 돈을 받을 수 있을 거야.’
황실의 보자기라니? 의아한 나를 두고 카린은 노래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이 아이는 분명 신이 준 선물이야. 나를 가엾게 여겨서 자비를 베풀어 준 거라고. 아아, 이 아름다운 강보 좀 봐. 강보만 팔아도 큰돈이 되겠어. 황실의 강보, 황실의 강보…….’
몇 번이나 ‘황실의 강보’라고 중얼거리던 카린은 그 뒤로 아주 정신을 놓아버렸다.
버틀러는 몇 번이나 정신 차리라며 그녀를 윽박질렀지만 소용없었다. 난 카린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흐느적거리는 모양새를 보다 몸을 돌려 마차에 올랐다.
카린은 내 친모가 아니었다.
친어머니가 아니니 내가 우려했던 ‘애틋함’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건 당연했다. 멍청한 생각으로 바짝 긴장했던 만큼 기운이 빠졌다.
“아가씨, 그런데 정말 이대로 가셔도 되시겠어요?”
마차 안, 마주 앉은 버틀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창밖을 바라보는 채로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고 싶은 건 다 알아냈어.”
카린이 전부 실토했다.
자신은 사산했다고.
그 말은 즉 내가 카린의 친딸일 수가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카린이 글라델리스 후작가에 자신이 낳은 딸이라고 바친 아이는 황실의 강보에 싸여 버려져 있었던 게 분명하다.
황실의 강보에 싸여 버려진 아이가 바로 나겠지.
그러니 난 이제 알고 싶은 걸 모두 알게 됐다. 그런데도 속이 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결됐다고 생각했던 문제가 다시 나를 덮쳐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나는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나의 진짜 부모님은 누굴까? 난 어떻게 황실의 강보에 싸여 있을 수 있던 걸까?
혼자 정신없게 생각하던 중, 난 문득 이상한 위화감을 감지했다.
그건 바로, 내가 조금 전. 카린의 생각을 조금도 읽지 못했다는 것.
“……?”
난 천천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아니, 어떻게?!
할 수만 있다면 마차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으리라.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기묘하게 하나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난 지금껏 내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이들이 단순히 ‘능력치가 뛰어나서’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내 독심술이 통하지 않는 이들은 클로드, 카르시안, 레오나르도 황제, 에메르나 황녀, 루니아 황후 등 아주 쟁쟁한 이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최근, 독심술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내 손바닥을 보듯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던 수잔과 버틀러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엔 카르시안의 속도 훤히 읽었지.
그런데 이렇듯 ‘갑자기’ 속이 읽히지 않는 이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부분적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
이를 달리 말하면 부분적으로는 또 읽힌단 것이다.
난 정확히 ‘어떤 부분’이 읽히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말도 안 돼.”
“아가씨?”
난 나도 모르게 입을 콕 틀어막았다. 버틀러가 여전히 의아한 시선을 보냈지만 대답해 줄 여유는 없었다.
만약 지금 내가 세운 가설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내게 무진장 불리해진다.
왜냐면 지금 내가 세운 가설은 바로 ‘원작에서 뒤틀린 이들의 마음은 읽히지 않는다’는 거니까!
덜컥 겁이 날 정도로 놀라운 생각이었지만, 이미 퍼즐은 완성되었다. 그러니 이 생각이 진실인 것이다.
난 오로지 ‘원작에 충실한 이들만’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원작은 이미 된통 뒤틀렸잖아?
그렇다는 말은 내가 그간 믿고 으스댔던 독심술 능력이 사라진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안 돼!”
난 여전히 입을 틀어막은 채 조용히 비명을 질렀다. 그러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충격적인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