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64화 (164/186)

164화

카르시안이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는 동시에 내 방 옆의 아무도 없을 드레스룸으로 몸을 튼 것이다.

나는 어, 어? 하는 사이에 발이 허공에 달랑 들려 카르시안의 품에 쏙 숨어 드레스룸으로 밀려 들어갔다.

이단으로 걸린 드레스들이 내 뒤에서 아무렇게나 뭉개지고, 우리는 그렇게 우아하고 섬세한 원단들 틈으로 파고들게 되었다.

“카르.”

그를 부르려고 했는데 손에 의해 입이 틀어막혔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 손이 카르시안의 것이 아닌 내 것이란 거다.

카르시안에 의해 난 내 입을 틀어막은 모양새가 되었다. 난 놀라 눈을 깜빡거리는데, 촉. 물기 어린 소리가 들렸다.

그건 카르시안이 입을 가린 내 손등에 입을 맞추는 소리였다.

“!”

깜짝 놀라 몸이 펄떡거렸지만 나를 단단히 끌어안은 카르시안의 팔 때문에 바르작거리는 꼴이 되었다. 난 코로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카르시안의 얼굴이 코앞에 있다. 너무 가까워서 어두워 보일 정도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속눈썹이 가만히 떨렸다. 이제 보니 고개도 조금 옆으로 틀어져 있다. 마치 입이라도 맞추는 것처럼.

아니, 만약 카르시안이 내 손을 잡아 내 입을 막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불현듯 부끄러우면서 수줍은 생각이 들었을 때, 난 얼굴로 열이 확 몰리는 걸 느꼈다. 그건 카르시안도 마찬가지인지 천천히, 음미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틀어가며 내 손등에 입술을 부비던 이가 눈을 떴다.

반짝거렸다.

너무 가까워서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도 않고, 불을 켜지 않은 방이라 훤한 대낮인데도 어두운 드레스룸.

그곳에서 유일하게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만이 샹들리에 밑의 루비처럼 빛나고 있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카르시안이 무표정을 지으면 날카롭고 짜증 나 보이는 눈을 예쁘게 휘어 웃었다. 그러자 고양잇과 맹수를 연상케 하던 눈이 세상에 이보다 순한 강아지는 없을 것처럼 순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동시에 마구 뛰기 시작했다.

“손 내리지 마.”

그가 내 손등에 입술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입술이 움직이며 그 안의 단단한 치아가 손등을 약하게 긁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전율이 돋았다.

실수일까? 실수겠지?

만약 이걸 의도한 거라면 카르시안은 정말 못된 사람이다. 이렇게 사람을 꼬시는 방법을 잘 알다니, 못되고말고.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손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양쪽으로 진해지는 숨결 때문에 내 손등이 뚫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 대답에 카르시안은 무척이나 만족한 듯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분명 코르셋을 조이고 있는데 손가락 하나, 하나의 움직임이 전부 느껴진다. 게다가 아까부터 입술이 간지러웠다. 정말 이 손을 확 내리고, 테라스에서처럼…… 거기까지 생각한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돼, 그러면 공작님이 카르시안을 고소할 거야. 내가 손을 대도 안 된다고 하셨잖아.

하지만 몰래 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내 안의 악마가 속삭인다. 난 속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안 돼, 안 돼. 공작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공작님이라면 분명 한 눈에 알아볼 거야.

그래도 몰래 한 게 가상하다고 한 번은 용서해 주지 않을까?

우와, 내 안의 악마는 너무 끈질기다. 결국 내가 악마에게 몰락했을 때.

“휴. 참았다.”

카르시안이 내게서 떨어졌다. 그것도 지나치게 깔끔하고 담백하게.

“…….”

난 허망해졌다. 내가 악마에게 어떻게 졌는데! 물론 지는 건 무진장 쉬웠긴 한데!

보는 사람이 다 시원해 보일 정도로 산뜻하게 물러선 카르시안의 얼굴은 아무런 번뇌도 거치지 않은 양 뽀얗기만 했다.

……나만 쓰레기지.

카르시안보다 어린데, 물론 환생과 회귀를 거듭했으니 진짜 어린 건 아니지만, 아무튼.

“왜 그런 표정이야?”

옷맵시를 가다듬은 카르시안이 물었다. 몰라서 물어? 톡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참았다.

“노…… 휴우. 놀라서.”

그리고 갈 길이 무진장 먼 것 같아서. 난 구태여 참지 않은 한숨을 한 번 더 뱉고는 카르시안과 함께 드레스룸을 나왔다.

내 뒤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르시안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모르겠다만, 순진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리라.

* * *

어쩐지 제가 어른스럽게 참아 주겠다는 양 구는 라티아를 보며 카르시안은 상의를 조금 아래로 끌어내렸다. 몸에 딱 맞게 재단된 하의가 빠듯하게 느껴졌다.

‘가라앉아야 하는데.’

클로드에게 들키면 무슨 경멸을 받을지 모른다. 카르시안은 일부러 느리게 걸었지만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라티아의 성화에 하는 수 없이 그녀의 곁을 따랐다.

하여간 하나도 도와주지 않는 못된 연인이다.

오늘 두 사람이…… 지금은 조금 흐트러졌다만. 깔끔하게 치장한 이유는 하나였다.

“셀트론! 정말 축하해요!”

“그루안 상단이 벌써 자선 파티를 열만큼 성장했군요.”

“그루안 상단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바로 오늘, 그루안 상단이 자선파티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셀트론은 감회가 새롭단 얼굴로 라티아와 클로드, 카르시안이 건네는 축하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다 라티아 아가씨 덕분입니다.”

빈말로도 ‘라움디셀 덕분’이라고는 하지 않는 셀트론이었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이었고 라티아의 공을 가로챌 만한 위인도 못 되기에, 클로드와 카르시안은 흐뭇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여기엔 반가운 사람도 있었다.

“어머, 라움디셀 영애!”

먼저 라티아를 아는 척하고 인사한 이는 다름 아닌 황후, 루니아였다.

그녀는 흰뿔 산을 지켜줬던 것에 대한 답례로 첫 사교 행사 참석이라는 커다란 영광을 그루안 자선 파티에 돌렸다. 달리 말하면 모두가 루니아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단 뜻이었는데, 그런 황후가 대번에 라티아를 찾았다.

사람들은 황후와 라움디셀의 아가씨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의아하며 둘을 함께 시야에 담았는데, 그 순간 화기애애하던 파티장엔 적막만이 내려앉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닮을 수가 있죠?”

“가족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이유는 바로 루니아와 라티아가 동일인물이라 생각해도 될 정도로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사람들은 루니아가 먼저 라티아를 아는 체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황후 폐하!”

라티아 또한 달갑게 그녀의 앞으로 향했다. 접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는데, 어떻게 친분을 쌓았는지 모를 일이다.

“아, 아론 황자 저하도 함께셨군요.”

라티아가 얼른 아론에게도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아론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바람에 사람들은 한 번 더 숨을 집어삼켜야 했다.

‘아론 황자가 웃었어?’

‘오늘 처음일 거야, 아마.’

‘웃을 줄도 아시는 분이셨구나…….’

이 자리는 아론이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된 이후 처음으로 갖는 사적인 사교 파티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오늘은 루니아도 함께였으니, 아론이 얼마나 예민하게 긴장했는지는 모두가 알 터.

그런데 그런 아론이 지금 라티아를 보고 마치 봄날이라도 만난 강아지처럼 순하게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바짝 긴장했다.

“황자비? 황자비인가?”

“하지만 라움디셀 영애는 황태자 전하께서 죽고 못 사는 분 아닌가?”

“이복형제가 같은 여인을 마음에 뒀단 말이야?”

“그런데 라움디셀 영애는 지난 데뷔탕트에서 라움디셀 공자와…….”

“그래서 황태자 전하가 노발대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너나 할 것 없이 쑥덕거리던 사람들은 그 무렵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아론이 라티아를 보는 시선이 사내가 여인을 보는 것과는 조금 다르단 것이다.

분명 따듯하다. 그런데 따듯하기만 하다. 그 안에 응당 있을 법한 성애나 소유욕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굳이 갈래를 따지자면 아가페에 가까웠다.

아니, 사람들은 이미 아론이 라티아를 보는 시선의 정체를 알고 있다.

‘저건 꼭…… 가족을 보는 것 같은데.’

‘내 친구가 나이 차이 나는 동생을 볼 때 저런 눈빛이었는데.’

‘동생이 대견한 일을 했을 때 보는 형제자매의 눈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론에게 동생이라곤 제네스와 세리나뿐인데. 그런데 아론은 제네스와 세리나에게 저런 눈빛을 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람들의 머리에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건 그대로 지나쳐 갔다. 라티아가 글라델리스 후작의 사생아라는 건 너무도 유명한 사실이니까.

‘우연인가 보지.’

‘우연이겠지.’

해서, 사람들은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으나 다음 날.

라티아는 예리엘 만물 상단으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드디어.”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보고서였다. 라티아는 곧장 방으로 올라가 책상에 앉았다.

라티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앞으로 3년밖에 남지 않아서 그런지, 요즘 들어 유독 나른해하는 삐로리도 오랜만에 눈을 빛냈다.

라티아는 어깨에 삐로리를 얹은 채 재빨리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카린. 알버스 글라델리스 후작에게 분명 사산되었을 딸을 팔고 엄청난 돈을 받았다.”

이건 라티아의 이야기다. 하지만 카린은 그 일확천금을 도박으로 몽땅 날렸다고 한다. 그 도박장은 다름 아닌 불법 격투장.

“아버지가 돈을 회수한 거구나.”

이후 카린은 노망이 나서 거리를 전전했는데, 지금은 제국립 요양원에 있다고 한다.

“어떻게 제국립 요양원에 들어간 거지?”

라티아는 무심코 날짜를 확인하다가,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이때는…… 분명.”

기억 속의 한 날, 클로드가 라티아의 시선을 피했던 때가 있다. 그때 클로드를 대신하여 헥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클로드가 급히 가로막았다. 그날과 비슷한 시기에 카린은 제국립 요양원에 들어갔다.

“……설마.”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지만,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라티아는 최근 클로드의 행보를 떠올리고 결론을 내렸다.

“공작님은 이때부터 알고 계셨어. 내 친모가 누구인지, 어떻게 된 건지.”

헥터가 보여 주려고 했던 낡은 초상화는 카린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라티아는 곧장 보고서의 다음 장을 넘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