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아하, 여기구나.”
난 오른손엔 클로드, 왼손엔 카르시안을 잡고 휘황찬란한 호텔을 올려다봤다.
우클좌카라니, 이 무슨 양손의 꽃인가.
우리를 여기로 안내해 준 이는 왼손의 꽃, 카르시안이었다.
“응, 613호.”
예리엘 만물 상단은 가게가 있기는 하지만, 거기엔 내가 찾는 이가 없다.
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미행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와아, 여기가 황도에서 가장 큰 호텔이란 말이죠?”
그래서 난 관광객처럼 보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어제 클로드가 나를 유도한 뜻을 따라서.
내가 그의 생각을 간파하고 있다는 양 굴자, 클로드가 픽 웃었다.
“들어가지. 문이 좁으니 네가 손을 놓거라.”
“여성 파트너의 왼쪽을 비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내가 자리를 옮기지.”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이 아버지가 손을 놓으면 될 일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실랑이가 또 이어졌다. 사실 마차에서도 누가 옆에 앉느냐로 싸웠고, 마차에서 내릴 때도 누구의 손을 잡느냐로 싸웠다.
마차에 오를 땐 클로드의 손을 잡았고, 내릴 땐 카르시안의 손을 잡겠다 했으니…….
“아까 마차에서 공작님이 옆에 앉았으니까, 이번엔 카르시안이랑 들어갈게요.”
“뭐? 아까 내릴 때도 저 녀석의 손을 잡았잖아.”
“그건 마차에 오를 때 공작님 손을 잡아서 그런 거잖아요.”
“너 변했다, 라티아.”
딱히 할 말이 없는 건지 클로드가 답지 않게 입술을 비쭉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꼭 어린 시절의 카르시안 같다. 난 풋, 웃음을 터트리며 카르시안 쪽으로 조금 붙었다.
“사랑을 하면 변한다잖아요.”
카르시안의 몸이 바짝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클로드가 실망해서 눈꼬리를 늘어뜨리는 것도 보였다.
“자식새끼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
클로드가 한숨처럼 중얼거렸지만, 난 못 들은 척했다. 그건 카르시안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이 이젠 팔짱으로 바뀌었다.
“그럼 들어가자, 라티아.”
“로비는 넓을 테니 난 다시 오른손을 잡을 거다.”
클로드가 투덜거리며 내 손을 놓고 앞장섰다. 나와 카르시안은 그런 클로드의 뒤에서 키득키득 웃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 * *
“라티아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내 이름을 밝히자마자 문이 열리고, 반가운 사람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난 또다시 양손에 꽃을 쥐고 있는 채였기에 그녀를 마주 안아 주지 못했지만,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데뷔탕트 때도 봤으면서, 시엘도 참.”
오늘 내가 이렇게 만나러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시엘이었다.
“어머나? 여긴 황도잖아요. 황도에서 뵙는 건 처음인데, 제가 어떻게 반갑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하긴, 내가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재판 때문에 황도의 타운하우스에서 머물렀을 때도 시엘과는 따로 만나지 않았지.
“황도 구경은 좀 하셨어요?”
시엘이 우리를 안으로 들이며 물었다. 난 여전히 클로드와 카르시안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요. 이제 곧 하러 갈 거예요.”
“다들 아주 들떴어요. 그럴 수밖에요. 황도가 이제야 개방되었으니 다들 몸이 얼마나 근질근질하겠어요.”
시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활짝 열려 있던 창문을 닫았다. 클로드가 의자를 빼 주고 카르시안이 내가 의자에 앉도록 도와줬다.
난 부자의 지극한 보살핌을 익숙하게 받으며 자리에 앉아 시엘을 기다렸다.
“그래서.”
탁, 마지막 창문이 닫혔다. 시엘이 손가락을 튕기자 커튼이 일제히 닫혔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고 있는 곳은 시엘이 등진 창문이다.
“우리 아가씨께선 뭐가 궁금하셔서 이렇게 저를 찾아온 걸까요?”
살포시 웃는 시엘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시엘의 표정은 영락없는 장사꾼의 표정이었다.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태어났을 때의 일을 알고 싶어요.”
* * *
예리엘 만물 상단에 의뢰를 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이 황도에서의 마지막 일정이지요?”
내 머리를 만져 주고 있는 메리가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하품했다.
“관광하는 게 이렇게 피곤한 일인 줄 몰랐어.”
“여유롭게 쉬면서 구경하는 게 아니고 공작님과 공자님에게 휘둘리면서 구경해서 그렇죠, 뭐.”
내 손톱을 다듬고 있던 앤이 픽 웃으며 말했다.
휘둘리면서 구경했다라, 응.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마차를 타는 것부터 식사, 간식, 산책, 선물, 무엇하나 쉽게 정해지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아가씨, 공작님을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하진 말아 주세요.”
메리가 능숙한 손길로 내 머리칼을 땋으며 빙긋 웃었다. 난 거울을 통해 메리를 올려다봤다.
“공작님도 아쉬워서 그러실 거예요. 3년이란 시간은 정말 금방 갈 거잖아요.”
3년 뒤, 난 더 이상 클로드의 피후견자가 아니게 된다. 그리고 성인이 된다. 그러면 난 정말 독립을 할 테지. 원래대로라면 훌쩍 떠나 한적한 곳에서 유유자적하게 살 테지만, 이젠 그 계획과는 아주 멀어졌다.
“아가씨는 앞으로 카르시안 공자님과 평생을 함께하실 테지만, 공작님은 아닐 테니까요.”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저 같아도 아쉽고 서운하겠어요. 잘 키워 놨더니 시꺼먼 아들놈이 낼름 잡아먹는 거잖아요.”
메리와 앤은 너무도 당연하게 나와 카르시안이 결혼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건 당연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카르시안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 납치해서 강제로 결혼을 할지도 모르지. 미안, 카르시안. 내 사랑이 이래서.
그런데 앤의 비유가 웃기다.
“시꺼먼 아들놈이라니.”
“그렇잖아요. 공작님이 아가씨를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어요? 친부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해 주진 못했을걸요. 라움디셀 공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이라잖아요.”
앤이 내 손톱에 후, 바람을 불었다. 옅은 숨결이 간지러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긴, 공작님은 날 정말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셨지. 돈은 따라올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랑은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제국에서 대체 누가 황도 봉쇄 전의 라움디셀의 부를 따라오냐마는.
아, 황제라면 가능할지도.
아무튼, 공작님은 카르시안이 가까이에 있든, 멀리에 있든 한결같이 나를 아끼고 사랑해 줬다. 이제는 서로 합의하에 갈라진 명예 부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그러니 얼마나 속이 타시겠어요. 곱게 키워서 아들놈 입에 쏙 넣어 주는 형국인데.”
앤의 말이 점점 더 신랄해진다. 심지어 메리도 쿡쿡 웃기만 하지 딱히 부정하진 않는다.
“그런데 메리, 앤. 뭔가 착각하는 게 있어.”
“네? 착각이요?”
“뭔데요?”
난데없는 말에 메리와 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난 그녀들을 돌아보는 대신 거울을 똑바로 보며 결연하게 말했다.
“입에 쏙 들어가는 건 내가 아니라 카르시안이야. 카르시안이 내 입에 쏙 들어오는 거야.”
이 얼마나 비장한 말인가. 그런데.
“……네?”
“풋, 푸흡, 푸하하하하!”
메리는 얼이 빠지고 앤은 박장대소를 했다. 당황스러운 듯 눈을 깜빡이던 메리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걸쳐졌을 때, 앤은 거의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 아아! 아, 배 아파! 아가씨가, 아가씨가 쏙, 아!”
얼마나 웃어 재꼈는지, 앤은 숨까지 헐떡거렸다. 난 그들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맞는 말을 했는데, 왜 저러지?
내가 영문을 모르겠단 듯 고개를 갸웃거린 때, 밖에서 앤이 자빠져 웃는 소란을 들은 수잔이 들어왔다.
“앤! 대체 무슨 소란이니? 아가씨의 치장 준비는 다 했어?”
“아! 수잔 님! 아, 진짜 웃겨. 아니 들어 보세요. 수잔 님도 분명 웃으실걸요?”
앤은 헐떡대다가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했던 말을 전해 줬다. 난 어쩐지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쿡…….”
“……으, 수잔!”
수잔까지 웃음을 꾹 참는다. 내가 그렇게 이상한 말을 한 거야? 어? 그렇게 웃긴 말을 한 거냐구. 불퉁한 표정이 감춰지질 않는다.
덕분에 나는 치장을 전부 마치고 방을 나올 때까지 볼이 빵빵하게 부어올랐는데, 벽에 기대어 서서 나를 기다리던 카르시안이 만면에 미소를 드리운 채 다가왔다.
“뭐야, 라티아? 얼굴이 왜 그래?”
귀여워 죽겠단 표정이다.
“몰라.”
난 입술을 죽 내밀고 퉁명스럽게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러자 클로드처럼 한쪽 눈썹을 까딱거린 카르시안이 침음하더니 내 쪽으로 허리를 조금 숙였다.
코앞에서 시선이 마주했다.
나 못지않게 치장한 카르시안은 아주 귀티가 좔좔 흘렀다. 반만 넘긴 머리는 깔끔하면서도 성숙미가 흘렀다.
그 밑에 나른하게 뜨인 붉은 눈동자는 또 어떻고?
오로지 나만 바라보며 의아하단 듯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입술은 유독 반들거렸다.
한 마디로 끝내주게 섹시하단 소리였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그런 얼굴로 나를 살살 어르고 달래듯 묻는데, 어떻게 대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결국 난 숨을 꾹 삼키며 그에게 나의 추악한 욕망을 슬그머니 드러냈다.
“아니, 다들 내가 너의 입으로 쏙 들어간다잖아. 널 쏙 삼키는 건 난데.”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어서 그런지 발음이 좀 뭉개졌다.
그래도 뜻은 전달되었을 테니 얼굴이 좀 달아오르며 몸에서 열이 났는데, 이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