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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62화 (162/186)

162화

* * *

황성에서 나왔을 때, 벌써 바깥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오랜만에 황도로 나왔으니 한동안 타운하우스에서 머문다고 들었는데 그게 정말인지, 마차는 황성에서 조금 떨어진 구역의 타운하우스로 향했다.

“내일은 같이 황도에 나가 보자. 이제 막 봉쇄령이 풀려서 별다른 건 없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활기찰 수도 있지. 정체되어 있던 경제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

카르시안의 은근한 데이트 신청에 클로드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러니 나도 같이 가마. 황도의 물가를 알아볼 좋을 기회일 테니.”

그 말에 카르시안이 도끼눈을 뜨고 음산하게 말했다.

“안 건듭니다.”

“황성에서 손잡은 거 봤다.”

“손만 잡았습니다.”

“손끝 하나라도 건들면 고소한다고 했을 텐데.”

“그래서 고소하실 겁니까?”

“그래도 난 너의 아비이고 널 사랑하니 한 번은 유예를 주려고 한다.”

“그게 사사건건 방해하는 거고요?”

“오랜만에 세 명이서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정치적으로 좋겠지.”

클로드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대꾸했다. 카르시안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중재를 위해 내가 나섰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그럼 다 같이 가요. 대신 가운데엔 제가 있을 거고, 서로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으니까 ‘안전상의 이유로’ 손을 잡을게요. 어때요?”

두 사람은 분명 황도를 돌아다니는 내내 이렇게 으르렁거리겠지. 하지만 내가 제안한 이 방법이라면 클로드와 카르시안의 사이를 떼어 놓을 수도 있고, 나와 카르시안은 합법적으로(?) 손을 잡을 수도 있다.

‘안전상’이라는 이유를 붙였으니 지금 눈썹을 까딱거리고 있는 클로드도 딱히 반박하진 못할 터.

“흠…… 내가 오른편에 선다면.”

“아뇨. 라티아의 오른손은 제가 잡을 겁니다.”

대체 왜 서로 오른쪽에 서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내가 주로 사용하는 손이 왼손인 만큼, 왼쪽에 선 사람의 손을 더 자주 놓을까 봐 그러나?

설마 싶지만 왠지 이 이유가 맞을 것 같다.

“저 요즘 양손잡이 됐으니까 아무 데나 잡아요. 정 뭐하면 가위바위보 하든가요.”

“좋아. 삼세판으로 하지.”

“단판 승부로 가시죠.”

어쩜 이런 거 하나까지 다투는 건지. 아무튼 두 사람은 가위바위보를 했고 승자는 클로드였다.

“내가 오른쪽.”

“생각해 보니 결혼반지를 끼우는 손은 왼쪽이니, 전 왼손을 잡는 게 맞긴 하겠군요.”

흐뭇하게 벌써부터 내 오른손을 잡은 클로드를 보며 카르시안이 내 왼손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는 마치 보란 듯이 왼손 약지에 입을 맞췄다.

쪽.

그 소리를 들은 클로드의 얼굴이 단박에 식어 버린 건 당연했다.

……난 좀 달아올랐지만.

방으로 돌아와 씻으니 벌써 10시를 훌쩍 넘은 시간이 됐다.

젖은 머리를 말려 준 메리가 물러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피곤한 몸을 웅크린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응? 누구지?”

“저예요, 아가씨.”

“수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 야밤에 수잔이 무슨 일이지?

난 얼른 들어오라고 말했는데, 방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수잔뿐만이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버틀러!”

어째서인지 공작성에 있을 버틀러도 함께였다. 하지만 딱히 비밀스러운 일도 아니었는지 복도에 누가 다니든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체 다들 무슨 일이야?”

이럴 거면 내가 잘 준비하기 전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난 잠옷에 긴 가디건을 걸친 채였다. 수잔이 금방 작은 다과상을 준비해 왔다. 나는 잘 시간이라 그런지, 따뜻한 우유를 주었다.

“사실 오늘, 그것도 이렇게 급히 말씀드릴 생각은 없었는데…… 공작님이 직접 명령하셔서요.”

“명령?”

부탁도 아니고? 그렇다면 엄청나게 급한 일이란 뜻이다. 그 뒤로 난 별말 하지 않고 한 자리가 빈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기다렸다.

“아가씨, 진정하시고 침착하게 들어 주세요.”

“응.”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 얼굴로 서로 시선을 나누는 수잔과 버틀러를 번갈아 봤다.

그 순간 난 속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수잔과 버틀러의 표정이 읽히지 않잖아?

클로드와 카르시안의 표정이 읽히지 않게 된 건 오래되었어도, 수잔과 버틀러의 생각은 항상 읽어 왔던 나다.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그런데 읽히지 않는다니, 어찌 된 일일까?

서로에게 순서를 넘기는 듯 잠시 눈짓을 주고받던 수잔이 결국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아가씨께선…… 혹시 친모에 대해 알아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친모? 날 낳아 주신 분 말이야?”

“네. 만약 아직 따로 알아보신 적이 없다면…… 제가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응?”

난 순간 귀를 후비적거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으며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말문이 트이자 말하기가 쉬운 건지, 수잔이 심호흡도 없이 말했다.

“혹시 그분에 대해 궁금하진 않으신가요?”

“친, 어머니라니…….”

난 사생아다. 쉽사리 아이를 갖지 못하던 어머니, 레이시나를 대신해서 아버지, 알버스가 대리모를 뒀다고 했다.

그녀는 하녀로 일했던 사람이네, 한미한 귀족의 사생아였네, 얼굴로만 뽑힌 평민이었네, 숱한 말이 따랐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듯했다.

그러니 나도 모른다.

내 친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런데…… 수잔은 그녀를 알고 있는 것 같다.

“수잔은, 아는 거야?”

“……네.”

“그리고 저도요.”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던 버틀러도 거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난 회귀 후 독심술 능력을 갖게 되어 두 사람의 속을 내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어 왔다.

그러는 동안 난 단 한 번도 두 사람이 나의 친모에 대해 알고 있단 생각은 읽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도!

“잠깐…… 이 일, 공작님이 명령한 거라고 했지?”

내 물음에 두 사람이 약간의 시간을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공작님도 나의 친모가 누군지 알고 있단 소리야?”

“네. 맞아요.”

세상에. 난 충격으로 입을 조그맣게 벌렸다.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전부 다요.”

“전부, 다…….”

“네. 저희가 아가씨께 숨기고 있던, 아가씨의 출생에 얽힌 비밀에 대해서요.”

가만히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이 차게 식어 덜덜 떨렸다. 너무 갑작스럽고 뜬금없기는 했지만, 아주 궁금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난 따듯했던 우유가 식으며 겉에 얇은 막이 생긴 것을 보며 수잔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아가씨를 낳아 준 여인의 이름은 ‘카린’이에요.”

카린. 난 입속에서 그 이름을 가만히 굴려 봤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의아했다. 아니, 어쩌면 당연했다. 17년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도, 애틋해했던 적도 없는 이름이었으니.

난 홀로 담담하게 ‘카린’이란 이름을 몇 번이고 곱씹었는데, 그런 내게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런데 카린은 분명 사산했어요.”

“……어, 응?”

사산? 사산했다고? 난 죽어서 태어났단 소리야? 하지만 난 살아 있는데?

살아서 단두대에 올라 목이 잘렸고, 또 회귀를 해서 지금은 17살이 되었는데?

난 휘둥그레 뜬 눈을 깜빡였다. 이해가 안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정말이에요. 아가씨. 카린과 아가씨가 세상에 나올 때 받은 산파가 직접 고한 이야기니까요. 출산일이 지나도 찾아오지 않는 카린에게 찾아간 이가 바로 접니다.”

버틀러가 제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런 제게 카린은 처음에 아이가 사산되었다고 말했어요. 사산된 아이는 산파가 데리고 갔다고 했죠. 하지만 실제로 임신을 했었고 아이를 낳기는 했으니 계약금을 뱉어 내진 않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더군요.”

난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를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담담히 들었다. 그래서일까? 처음 말을 꺼내기 힘들어하던 수잔과 버틀러의 표정도 어느새 조금 편안해 보였다.

“산파를 찾아가 제가 직접 확인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곧장 후작님께 이야기를 전할 수는 없었어요. 저도 두려웠으니까요. 그런데…… 며칠 뒤 카린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아이를 데리고요.”

“……그 아이가 나구나.”

끄덕. 버틀러가 무거운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머리가 혼란스럽고 복잡해졌다. 사산되었다며. 그 시체도 확인했다며. 근데 내가 살아서 돌아왔다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께름칙한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이걸 왜 지금 나한테 알려 주는 거야?”

“음…… 저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공작님께서 이 일을 평생 아가씨에게 알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가씨께서 저한테 단 한 번도 묻지 않은 이야기기도 하고요.”

버틀러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공작님께서 이런 명령을 내리실 줄은 몰랐어요. 그 누구보다 아가씨의 평안을 위하는 분이시니까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갑자기…….”

수잔도 잘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렸다.

난 일단 알겠다고, 이야기 잘 들었다고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수잔과 버틀러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찻잔을 정리하고 돌아갔다.

침대 위에서,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왜 하필 오늘…….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가만히 곱씹던 난 이내 그 해답을 알아냈다.

“……내일 예리엘 만물 상단을 찾아야겠어.”

클로드는 내가 이러길 유도한 것이다.

일부러 밤늦게 이야기를 해서 내가 다른 이들과 상의할 틈을 주지 않은 것이다. 또 내일 우리가 황도에 구경을 나간다는 정보는 이미 에메르나의 손에 들어가 있을 터. 그렇지 않아도 나의 행보에 한참 예민해져 있을 에메르나의 눈을 피해 ‘겸사겸사인 척’ 예리엘 만물 상단에 들르기 딱 좋다.

“공작님이 대체 내게 뭘 알려 주고 싶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과자가 생긴다지.”

지금껏 나를 전적으로 믿어 준 클로드가 유도한 일이다. 나도 그를 전적으로 믿을 필요가 있었다.

난 심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답지 않게 홀가분한 기분으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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