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황후궁으로 향하며 생각한 건데, 어쩌면 하운드가 일종의 스위치였을 지도 모른다.
원작을 아주 골로 보내는 스위치.
지금 난 내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고 있는 거다.
어차피 비틀기로 다짐한 원작이고, 내가 제대로 다짐을 하기도 전에 제대로 비틀려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원작이다. 그러니까 나의 직진은 나쁘지 않다.
조금만 정신이 팔리면 후회할 것 같은 나의 선택에 대해 끊임없이 합리화하는 중이었다. 온갖 구실을 대가며.
“라티아?”
곰곰이 생각에 잠겨 걷는 내게 카르시안의 시선이 닿았다.
“왜, 겁나?”
“어?”
“황후 폐하. 뵙는 거 이번이 처음이잖아.”
무서우면 손잡아 줄 수도 있고.
남자의 성장이란 어째서 이다지도 급격한 건지. 어린 시절과 비슷한 표정, 똑같은 말투를 해도 자아내는 분위기가 다르다.
내 기억 속의 어린 카르시안과 분명 동일인물인 걸 아는데도 받아들일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마치 카르시안이 새로운 사람이 되어 내게 새로운 설렘을 주는 것처럼.
그래서 난 일부러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렸지만.
“아니, 역시. 응.”
카르시안이 손을 내릴세라, 황급히 그의 세 손가락을 꼭 잡았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가락이 느껴졌다.
어차피 내 건데 이거 나름대로 익숙해져야지.
그에 앞서 걷던 클로드가 이쪽을 힐끔 돌아봤고, 카르시안 분명 제가 손을 내밀었으면서도 마치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은 듯 굳어 버렸다.
심지어 자리에 멈춰 서기까지 했는데.
“왜?”
“어? 아니…… 아니.”
내가 반 발자국 앞서 걸으며 이끌자 고개를 가로젓고 나를 따라왔다.
황후 폐하를 뵙는다고 오랜만에 깔끔하게 쓸어넘긴 검은 곱슬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리면서.
“머리가 망가졌잖아.”
“……아.”
“바보야. 고개 좀 숙여 봐. 수잔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그래도 머리 손질하는 건 배웠으니까.”
메리가 자신의 일을 뺏지 말아 달라 읍소했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르시안과 연락이 두절되었던 그때, 난 제네스와 세리나를 피해 어디든 도망칠 준비를 마쳐 놔야 했다.
라티아 라움디셀을 잠시 버렸듯, 티아나 아메시스트를 버려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카르시안이 엉망으로 흩뜨린 탓에 처음처럼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단정하게 정리되긴 했다.
“자, 됐다. 그래도 이따가 들어가기 전에 거울 보고 네가 한 번 더 매만져.”
“괜찮아.”
“응?”
“네가 해 준 채로 있는 게 좋아.”
상체와 무릎을 같이 숙여, 어릴 적보다 더 높게 올려다봐야 했던 카르시안의 얼굴이 지금은 내 코앞에 있었다.
새빨간 눈동자가 휘는 눈웃음 사이로 사라졌다. 어휴 요망하기도 하지. 이런 눈웃음은 또 누구에게 배워 온 건지 모르겠다.
역시 떨어져 있던 시간이 아깝다. 그간 우리는 서로의 모르는 시간을 걸었으니까.
“그럼, 뭐. 이대로 있든가.”
난 황성에서 손을 잡고 걷는 게 예법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놓지 않는 카르시안과 함께 황후궁의 만찬장으로 향했다.
* * *
“드디어 오늘 보네요.”
“긴장하셨습니까?”
“그럼요. 물론이에요.”
다정다감한 대화가 잠시 오갔다. 황후 루니아와 최근 복위가 논의되고 있는 폐태자 아론이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함께할 수 있는 데까지, 아주 지대한 도움을 준 은인이잖아요. 그런 사람을 오늘 처음, 몇 년 만에 만나는데 긴장하지 않을 수가요.”
루니아의 말에 아론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그 또한 긴장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긴장이라기보단 기분 좋은 들뜸이었다.
‘나도 오랜만에 보네.’
두 사람의 은인, 라티아에게 황도 접근 금지령이 내려지고 황도가 봉쇄되어 아론 또한 라티아를 보지 못했다.
루니아의 어린 시절을 그린 초상화와 꼭 닮았던 그 소녀가 어떻게 자랐을지 궁금했다.
황도가 봉쇄되어 밖에 있는 라티아의 초상화도 구할 수 없었다. 티아나 아메시스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때도 전부 편지로만 대화했다.
“긴장하시지 않아도 돼요. 오래전이지만 전 한 번 만나 봤잖아요. 아무리 세상의 판도를 읽는 것처럼 똑똑해도 평범한 소녀였어요.”
황후 폐하와 무척 닮긴 했지만, 그 소리는 일부러 숨겼다. 자신은 루니아의 어린 시절과 라티아가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루니아는 아닐 수도 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드디어 라움디셀 공작 일가가 들어왔다.
“신, 클로드 라움디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클로드의 선창 이후로 카르시안과 라티아가 인사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라티아는 클로드의 거구 뒤에 숨어 있어 루니아와 아론 쪽에서는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황후를 처음 만나는 자리치고는 너무도 간소화된 인사였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저 셋은 오히려 인사를 받아 마땅한 이들이었으니까.
“오, 어서 와요. 초대에 응해 줘서 너무도 고마워요.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나요?”
루니아가 그 어느 때보다 환대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모습에 병약함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건강해 보이셔서 무척 다행입니다.”
“그럼요. 공작과 라움디셀 영애의 공로죠.”
클로드의 인사에 루니아가 방긋 웃었다. 그녀의 시선은 이제 클로드의 뒤를 향하고 있었다. 매번 어떤 식으로든 접촉했던 클로드는 둘째 치고 흰뿔 산과 바람개비 꽃 뿌리라는 치료약을 구해 준 은인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한 루니아의 마음을 알아차린 클로드가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옆으로 비켜섰고, 거기엔.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다소곳하게 인사하는 젊은 루니아가 있었다.
* * *
식사는 무척이나 즐거웠다. 라티아를 처음 만나 긴장한 루니아는 이내 그녀의 영특함에 매료되고 말았다.
“황실 남매를 찢어 놓는 방법으로 ‘그런 방법’을 선택하다니. 너무 무모했던 것 아닌가요?”
카르시안과 라티아의 혼삿길이 막히고 라움디셀 공작가에 불명예가 드리워질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었죠. 하지만 더 시간을 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 왜 돌아가야 할까요?”
아무리 라티아가 루니아에게 막대한 도움을 줬다 하더라도 루니아는 황후다. 그런 황후의 앞에서 이렇게 기죽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다니.
이제 갓 17살이 된 소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침착했다. 그러나 영악하다고 느껴지진 않고 그저 기특했다.
‘훗날 아론이 다시 황태자로 복위한다면 보좌관을 따로 구할 필요도 없겠어.’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동시에 루니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
라티아는 분명 현명한 보좌관이 되어 아론을 톡톡히 보필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차선책이다. 최선책은 따로 있었다.
‘저렇게 영민한 아이인데, 왜 보좌관으로만 두려고 한 걸까?’
아무리 많은 지지를 얻어 황태자로 복위했다고 해도 그게 완전하진 않다. 더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완벽하고 견고한 동맹이 필요했다.
혼맥이라는 완벽한 동맹이.
마침 아론의 배우자 자리는 비어 있었고, 라움디셀의 영애는 아주 알맞은 배우자감이었다.
‘그러니 황태자비로 삼으면 될걸. 나는 왜…….’
라티아가 이미 카르시안과 데뷔탕트에서 밀회를 가졌기 때문에? 하지만 그게 ‘작전’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루니아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성적으로 따져 봤을 때 라티아가 황태자비가 되는 게 가장 효율이 좋다. 그런데 싫었다. 그것만큼은 눈에 흙이 들어와도 반대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설령 아론이 이미 라티아를 마음에 품었다 하더라도.
아무리 즐겁고 화기애애한 시간이라 하더라도 결국 끝은 있는 법.
“아아, 하늘이 벌써 저렇게 어두워졌군요.”
“너무도 즐거운 자리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아쉽게도 이 단란한 식사 자리를 파할 때가 왔다. 모두의 얼굴에 아쉬움이 감도는 것을 본 클로드가 라티아의 얼굴도 확인했다.
라티아는 처음부터 저와 유독 닮은 것처럼 보이는 루니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가 어쩌면 이렇게 닮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 듯 보였지만, 첫 만남이고 사적인 대화라 참는 것 같았다.
달리 말하면 여러 번 만나고 사적인 공간에서라면 물어볼 거란 거겠지.
“이제 황도에 오고 가는 것도 편해졌겠다, 만나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랜만에 올라왔으니 한동안은 황도에서 지낼 예정이기도 하고요.”
“아, 그렇다면 기쁜 소식이네요.”
반색한 루니아가 아론을 보며 말했다.
“잘된 일이네요. 황자. 그토록 여동생을 그리워했던 황자가 아닙니까.”
“화, 황후 폐하.”
난데없는 이야기에 아론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클로드와 카르시안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루니아가 과거를 회상하듯 애틋하게 말했다.
“아주 어릴 적 일인데도 기억하고 있더군요. 황자의 아래에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단 사실을요.”
그다지 감추거나 들추고 싶지 않은 일이 아닌지, 루니아는 그런대로 편안해 보였다.
“배 속에서부터 죽어서 태어나 세상에 숨 한 번 토해 내지 못한 가엾은 아이라, 오라버니인 황자라도 기억해 주려고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모두 깨달았다. 루니아가 사산된 아이를 이야기하며 이토록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그녀는 지난 17년간 매일 같이 딸을 그리워했기에 이토록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였다.
루니아에게는 지금도 곁에 딸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