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그게 무슨…….”
카르시안이 멍하니 말을 끌다가, 이내 얼굴을 확 붉혔다.
“그게, 그게 진짜야? 그럼, 그러면…….”
카르시안이 말까지 더듬는다.
테라스에서 그토록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던 남자는 어디로 가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카르시안은 내 기억 속의 13살 소년이었다.
근데 그렇다고 얼굴을 붉힐 말은 안 한 것 같은데?
의아할 적, 클로드가 못 참겠다는 듯 카르시안의 뒤통수를 잡아 앞으로 확 고꾸라트렸다.
“윽!”
“그렇다고 내가 라티아의 보호자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이 녀석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아무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지.”
이번엔 카르시안의 말문이 막혔다.
“비록 라티아가 데뷔탕트를 치러 제국법상 혼인이 가능하게 되었다고는 하나, 난 라티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 누구와도 맺어지게 놔둘 생각이 없다.”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중엔 너도 포함되었단 소리다.”
“……?”
클로드의 말에 카르시안이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얼굴을 확 구기며 그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어쭈.”
카르시안은 이제 클로드의 손을 치워 버릴 정도로 성장했다. 물론 클로드의 뿌리침 한 번에 손을 놓치기는 하지만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어른 카르시안! 이제야 조금씩 실감이 확실히 난다.
카르시안이 내 기억 속의 목소리보다 확연히 낮아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가 포함되었다니요.”
“쉽게 설명하면 그거지.”
클로드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도 클로드를 바라봤다.
“난 비록 라티아의 명예 부친 자리는 내려놓았지만 법적 후견인으로서 라티아가 성인이 되는 앞으로 삼 년간, 그 누구와의 교제도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라티아에게 손끝이라도 댔다간 난 널 고소할 거다, 카르시안.”
클로드는 오로지 나만 보며 자식을 고소하겠단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다. 그건 마치 ‘너도 카르시안한테 손댈 생각하지 마.’ 하고 못 박는 것 같았다.
윽, 아무래도 어제 데뷔탕트에서 나와 카르시안이 테라스에서 했던 키…… 뽀뽀를 들킨 모양이다.
하긴, 입술 화장이 그렇게 번져서 왔는데 들키지 않는 게 이상하지.
만약 우리가 꼼꼼히 정리를 하고 나왔다 하더라도 클로드의 눈썰미는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억지입니다.”
“벌써 감옥에 두 번이나 갇혀 봤으니 삼 년간 갇혀 있는 것도 괜찮겠지.”
“그렇다면 전 아동학대로 아버지를 고소할 겁니다.”
“제국에선 스무 살 남성을 보호해야 할 아동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투닥거렸지만 결국 승자는 클로드였다.
왜냐면 내가 클로드의 손을 들어줬으니까.
“네, 알겠어요. 어제 일도 그렇고, 남은 삼 년 동안은 스캔들 없이 조용히 지낼게요.”
“라티아!”
카르시안이 조금 전의 선언은 다 뭐냐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난 클로드가 만족스레 미소 짓는 모습만 볼 뿐이었다.
비록 이제 공식적인 아빠는 아니지만, 그래도 클로드는 내 아빠다. 호칭이 달라졌어도 딸을 걱정하는 마음은 같을 거란 소리다. 그리고 난 클로드가 이만하면 엄청나게 양보해 줬다는 걸 안다.
아빠에서 아버님으로. 아버지에서 시아버지로.
그건 나를 정말 딸처럼 생각하는 클로드에게 아주 큰 결심이었을 터.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바탕엔 결국 카르시안이 깔려 있었다. 카르시안과 나를 맺어 주기 위해서 물러선 거나 다름없으니, 지금만은 클로드의 손을 들어 줘야 했다.
카르시안이 나를 방으로 데려다주며 손을 내밀었다.
“자.”
난 그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세상에, 시야에 꽉 들어찰 만큼 큰 손이다.
그동안 그의 무력 활약상은 심심찮게 들어왔는데 검, 창, 활, 못 다루는 무기가 없다고 그랬다. 하다못해 고기를 꽂던 쇠꼬챙이로도 사람을 해할 수 있는 남자라 하였던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카르시안의 손은 정말 그게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의 손 위로 여전히 작은 손을 올렸다.
“……후.”
머리 위로 실바람처럼 가벼운 웃음이 내려앉았다. 욱하는 마음에 오기로 그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다른 데는 다 자라도 이상하게 손과 발만큼은 크게 자라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아직도 ‘요정 같은 손’이란 소리를 듣는다.
그런 손을 부쩍부쩍 큰 카르시안의 손 위에 올려놓으니, 정말 어릴 때와 요만큼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난 우리가 익숙하듯 그의 세 손가락을 잡았다.
“곧 다 잡아 줄 거라며?”
카르시안이 일부러 이죽거리듯 말했다. 난 그가 괘씸해서 손을 놓으려고 했다.
“어딜.”
하지만 손이 자란 만큼 민첩성도 자란 그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카르시안은 내 손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 모양새가 마치 그의 손 속에 숨은 것 같다.
우린 손을 잡은 것도, 겹친 것도, 붙잡힌 것도 아닌 애매한 모습으로 온기를 나누며 복도를 걸었다.
“깍지 끼면 아프겠지.”
카르시안이 묻듯이 중얼거렸지만 난 대답해 주지 않았다.
아프기만 할까, 손가락 사이가 찢어질걸.
그러나 그럼에도 그와 손깍지를 끼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어 곤란했다.
하지만 카르시안에게 손끝 하나라도 댔다간 공작님에 의해 고소당할 테니, 참아야겠지. 아니, 근데 이미 손끝은 댔는데…….
“그런데 라티아, 어제는 정말 작전이었어?”
“……응?”
놀라서 올려다보니 카르시안은 여전히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창가로 비쳐 들어오는 햇빛에 보이는 귀 끝이 살짝 붉어 보이기도 했다.
“제대로 듣고 싶어.”
묵묵히 말하는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무척 긴장하고 있는 듯 입술을 한 번 축인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보였다.
이렇게 몸을 굳히고 있는 카르시안을 보고 있자니,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불현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10살이던 카르시안이 벌써 이렇게나 컸구나.
동시에 그가 너무도 귀엽게 느껴졌다.
“눈치 없어.”
“뭐?”
“아냐, 아무것도.”
정말 몸만 컸구나 싶어서.
누굴 닮아서 이렇게 눈치가 없을까? 어제는 뭐 꿈속에서는 어쩌구저쩌구 그랬으면서.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좋았다.
그가 테라스에서처럼 여성을 다루는 데에 매번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면 싫었을 것이다. 어제처럼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있어도 돼.”
그래도 돼. 나머진 이 누나가 다아 알아서 할게.
난 흐뭇하게 웃으며 까치발을 들고 카르시안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
카르시안은 어딘가 의뭉스러운 듯, 미묘하게 짜증이 난 듯, 애매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게 고개를 숙여 줬다.
“지금 엄청나게 터무니없는 착각을 당하는 것 같은데…….”
“그래? 기분 탓이야, 기분 탓.”
난 후후 웃으며 내가 쓰다듬기 편하게, 어릴 적처럼 고개를 숙여 주는 카르시안의 검은 머리칼을 연신 헝클어뜨렸다.
* * *
데뷔탕트를 치렀으니 성인이나 다름없다며, 황후 루니아가 나를 황도로 초대했다.
에메르나는 자신이 내린 명령을 무시하는 거냐고 항의했지만 이번엔 루니아가 이겼다. 그녀가 잠든 동안 황실 남매에게 크게 혼난 궁정 귀족들이 루니아의 편을 들어 준 것이다.
여기엔 내가 아론을 물심양면으로 도와 루니아의 입지를 다져 준 것도 어느 정도 효력이 있겠지.
“제네스 황태자는 패악질이나 부리고, 세리나 황녀와는 사이가 갈라지고, 잠들어 있던 시간 동안 세력을 갈가리 찢겨 잃은 에메르나 황비가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다.”
황도로 가는 마차 안에서 클로드가 말했다.
“오늘은 평화롭겠네요. 아주 다행이에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시안에게 보냈던 편지에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건 이걸 뜻했다. 루니아와 아론의 입지 다지기.
멜르조 운하 도시도 개방되었으니 클로드의 무역 사업도 다시 천천히 재개될 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목적은 달성될 것이다.
난 어깨에 앉은 삐로리의 턱을 긁어 주며 카르시안에게 물었다.
“그런데 하운드는?”
“성에.”
“왜 안 데리고 가?”
“삐로리와 달리 덩치가 크니까.”
마주 앉은 카르시안이 책장을 넘기며 대답했다. 그는 제국 재판 판결 사례를 읽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읽는 부분은 ‘후견 종료’에 관한 부분이었다.
“왜, 내가 후견자가 아니게 되면 네 뜻대로 될 성싶으냐?”
“자의식 과잉입니다. 아버지.”
부자가 늘 그렇듯 투닥거렸다.
하운드, 사실 난 카르시안에게 하운드를 찾아 준 걸 조금 후회했다.
카르시안은 남자주인공이라 곁에 수호천사가 없어도 신의 안배를 받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그에게 수호천사를 찾아 주면 그 안배가 사라진단 뜻이었다. 그리고 신의 안배가 사라진 카르시안은 팔자에도 없는 고초를 겪었다.
봉쇄된 황도에 감금, 두 번의 구금, 귀족 궐기…….
이건 모두 원작에 없던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원작을 비틀어 생긴 인과란 뜻이다.
그래서 난 카르시안에게 하운드를 보낸 걸 후회했다. 물론 하운드가 없다 한들 카르시안이 보다 편안한 시간을 보냈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그래서 내심 황후를 만나러 가는 오늘, 하운드와 동행하지 않은 걸 다행히 여겼다.
뭐, 카르시안은 이제 성인이 되어서 수호천사의 도움이 더는 필요 없게 되었지만.
그럼 나도 진짜 성인이 되면 삐로리와 헤어져야 하는 걸까? 내 독심술 능력도 가져가겠지?
머리로는 일찌감치 알고 있던 내용인데, 새삼 상기하니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런데 왜 나는 유독 공작님과 카르시안 등, 원작에서 주요인물이었던 이들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황실 남매의 생각은 고스란히 읽히는데, 레오나르도 황제나 에메르나 황비의 생각은 읽히지 않는다.
대체 무슨 차이일까?
흠, 그간 정신이 없어 한구석으로 밀어 놨던 의문점이 퐁퐁 솟아났다.
그러는 사이 우리가 탄 마차는 황궁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