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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59화 (159/186)

159화

“황태자의 명령이다! 세리나 황녀를 끌고 가!”

제네스의 말 한마디로 계획대로 엉망이 된 나의 데뷔탕트는 그렇게 파했다.

* * *

세리나 황녀에게 금족령이 내려졌단 소문이 짜하게 퍼졌다.

그간 한 몸이나 다름없이 움직이던 최강 남매가 갈라지는 소리였다.

여기에 한술 더 떠, 남매의 친모인 에메르나는 ‘우애를 망쳤다’는 터무니 없는 죄명으로 세리나 황녀를 구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제 자식들의 일인데도 정적을 쳐내는 것처럼 옳다쿠나 움직인 에메르나의 모습에 기가 질려 버렸다.

그건 제네스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나의 유일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세리나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동생이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제네스 혼자였다면 지난 몇 년간 에메르나를 혼수상태에 빠지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에메르나를 잠시 재워 그사이 패권을 공고히 쥐자는 생각조차 못 했을 거고.

그러므로 세리나의 배신은 제네스에게도 무척이나 뼈 아픈 일이었다.

‘그렇다고 세리나를 용서할 수는 없어.’

클로드는 둘째 치고 라티아도 헨델 이플란트의 살해 용의 선상에 세워졌을 때, 제네스는 깜짝 놀랐다.

‘라티아는 빼내기로 했잖아!’

‘죄송해요. 하필이면 헨델 이플란트가 죽을 때 두 사람이 같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분명 서로 떨어져 있단 보고를 들었는데……. 하지만요, 오라버니. 이건 오히려 기회예요.’

‘기회라고?’

‘네. 생각해 보세요. 완전한 사람을 흔드는 게 쉬울까요, 불완전한 사람을 흔드는 게 쉬울까요?’

‘그건…….’

‘이대로 라움디셀 공작과 가문을 무너뜨려 그녀의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면요. 그녀는 보호자가 없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 오라버니께서 파고들 틈이 더 넓어진단 말이죠.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사람만큼 허술한 사람은 또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건 카르시안도 마찬가지겠군.’

‘네. 그러니 오히려 이건 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이자, 신이 우리의 손을 들어 주고 있단 증거예요.’

당시 그렇게 이야기를 나눴던 제네스는 세리나의 재빠른 두뇌 회전에 감탄했다. 동시에 만족스러웠다.

‘쓸모를 다 하는 동생은 언제나 어여쁜 법이지.’ ―하고.

그러나 제네스는 그 재빠른 두뇌 회전이 양날의 검이란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적에게 향한다면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지만 자신에게 향한다면 그 어느 때보다 골치 아프단 걸.

그것을 잠시 잊은 대가로 지금 제네스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대로 다시 손을 잡자니 내가 한 번 세리나에게 이를 드러낸 것 때문에 이미 균열이 생겼어. 그렇다고 세리나를 쳐내자니, 나 혼자서는 어머니를 감당할 수 없어.’

젠장, 이럴 줄 알았더라면 어머니를 더 오랫동안 재워 둘 걸 그랬다.

‘라티아가 데뷔탕트를 열면 성인이나 다름없으니 빠르게 결혼하려고 깨웠던 건데…….’

세리나의 말마따나 돌이켜 보니, 라티아와 카르시안이 테라스에서 벌인 발칙한 짓은 정말 함정이 맞았다.

제국 영웅의 명예 여식이 그간의 추문을 씻기 위해 연 자신의 데뷔탕트에서 남매나 다름없는 남자와 밀회를 갖는다.

이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라티아는 결코 앞뒤 재지 않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제가 이렇게 미처 도는 거겠지. 그 현명하면서도 총명한 눈동자에 한 번이라도 더 담기고 싶어서.

그런 라티아가 라움디셀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짓을 벌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그런 짓을 벌여 가면서까지 끄집어내고자 하는 게 있었단 거지.’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닌 제네스의 분노였고, 라티아의 계획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제네스는 라티아의 데뷔탕트에서 길길이 날뛰며 세리나와의 결렬을 선언했고 기어이 그녀에게 금족령을 내려 버렸으니.

조금 머리가 식자 미친 듯이 후회가 되었다.

‘조금만 참을걸.’

하지만 제게는 머리카락 한 올, 손톱조차 허락하지 않는 라티아가 카르시안에게는 곧장 모든 걸 허락했다고 생각하니 머리꼭지가 돌아 버렸다.

기실 이건 함정이니 실제로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긴밀한 대화가 오고 간 건 사실일 터.

‘그 드레스의 구겨짐이나, 번진 입술 화장만 보아도 최소 포옹은 했단 거겠지.’

그것도 가족 간의, 남매간의 담백한 포옹이 아닌 오랜만에 애틋한 재회를 하여 서로를 빈틈없이 끌어안는 진한 포옹을.

까, 깍…… 쨍그랑!

제네스가 쥐고 있는 유리컵이 단박에 부서지고 말았다. 식은땀이 스쳐 지나갈 정도로 섬뜩하고 화끈한 통각이 느껴졌다.

똑, 또옥, 똑…….

상처 난 손을 타고 위스키 사이로 붉은 피가 섞여 들어 떨어졌다. 손바닥에 유리 파편이 박혔지만, 제네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쥐었다.

“아, 사랑해.”

제네스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그 상대는 단연코 제네스의 방을 가득 채운 초상화의 주인, 라티아였다.

“그래, 사랑해.”

짓씹는 목소리가 거칠었다. 이성이라곤 남아 있지 않은 듯 은은한 광기마저 느껴졌다.

제네스는 생각했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지금 라티아에게 느끼고 있는 이 격렬하면서도 거친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사랑은 없겠지.”

그러니까 제네스는 라티아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제네스는 라티아를 가져야만 한다.

제네스는 황태자고 라티아는 황태자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손아귀에 있어야만 했다.

제네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의 방을 가득 채운 라티아의 초상화는 모두 진짜 라티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어린 시절의 편린을 재구성하여 그린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가 진심으로 라티아를 사랑했더라면 실제로 시중에 나돌아다니는 복제 초상화를 구해 장식해 놔야 했다는 것을.

한때는 정말 호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여러 가지 복잡한 이권과 감정으로 질척질척하게 더러워진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 * *

딱콩, 딱콩!

“아얏.”

“아.”

경쾌한 소리가 나고 나와 카르시안은 동시에 이마를 부여잡았다.

사실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지만 소리가 워낙 커서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만나자마자 이런 짓을 벌여?”

클로드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어깨를 움찔거렸지만 어느새 클로드 못지않게 장성한 카르시안은 불퉁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일이 잘 풀렸으니 망정이지, 제네스 황태자가 넘어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냐.”

“넘어왔으니 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넘어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냐고.”

말대답하는 카르시안을 노려보는 클로드의 붉은 눈동자엔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카르시안은 어깨만 한번 으쓱였다. 내가 나설 차례였다.

“그때는 다음 플랜으로 넘어갈 생각이었어요. 제네스 황태자를 자극하는 데에 실패했으니, 제네스 황태자가 우리에게 넘어오지 않은 모습을 보고 안도하며 자만해 있을 세리나 황녀를 바로 노리는 플랜으로요. 물론 저는 제네스 황태자가 기필코 넘어올 거란 확신이 있었지만요.”

딱콩. 클로드가 다시 내 이마에 딱밤을 놨다. 아까랑 똑같은 세기였지만 같은 곳에 맞으니 괜히 아픈 것 같다.

카르시안이 얼른 내 이마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며 말했다.

“그만 때리십시오.”

“왜, 구멍이 날까 봐 겁이라도 나더냐.”

“구멍은 나지 않아도 라티아의 피부가 닳습니다.”

“그래 봐야 표피지.”

“표피도 라티아니까요.”

나를 가운데에 두고 영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클로드는 이 일만큼은 물러나지 않을 듯 보이는 카르시안을 기가 찬단 시선으로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황실 남매가 갈라지며 우리에게 유리하게 되었다지만, 너의 한 번뿐인 데뷔탕트를 망쳐 가며 할 일은 아니다. 하물며 꼭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제네스 황태자를 자극할 방법은 많았을 텐데?”

클로드가 나를 흘겨봤다. 나이도 어린데 하필이면 그런 밀회를 가지는 방법을 택한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의 말도 맞았다. 굳이 이 방법이 아니어도 방법은 많았다. 다만…….

“네가 정말 그 방법을 하고 싶어서 한 거라면 더 말은 얹지 않으마. 네게 다 어련히 생각이 있을 거라고 여기겠다. 설령 이번 일로 혼삿길이 막힌다 하더라도 이런 방법을 내세운 이유가 있겠지.”

“네. 다 생각이 있어요.”

내 말에 클로드가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혼삿길이 막힌다’는 소리에 이상하게 싱글벙글한 카르시안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넌 이제 꽉 잡혔군.”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그래, 미안하지만 카르시안. 난 마음을 먹었다. 카르시안을 꽉 잡도록.

나의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인해 우리가 떨어져 있는 동안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비록 세리나 황녀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던 나의 마음도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후였다.

처음엔 다스리려고도 해 봤다. 몸을 숨기느라 그와 편지가 두절되었을 때 이대로 정리를 해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를 열렬히 찾는 카르시안의 모습을 보며, 나는 결국 마음을 다잡았다.

에메르나가 혼수상태에 빠진다는, 원작에선 상상도 못 할 사건이 벌어지며 완전히 빠그라진 원작.

이대로 치워 버리면 내가 카르시안과 멀어져야 하는 이유도 없잖아?

사실 카르시안의 마음에 대해 그간 자신이 없었지만 어제 입맞춤으로 확인을 받았다.

그리고 만약 카르시안이 나를 싫어했더라면 ‘이런 방법’을 쓰는 것에 난색을 표했겠지.

난 그가 아무런 이의 없이 내 뜻을 따라 주는 것으로 슬그머니 긍정적인 쪽으로 잣대를 기울였었다. 그리고 이어진 키…… 그걸로 땅땅땅. 나에게 ‘합법!’이라고 선고를 내렸고.

난 카르시안을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참, 카르시안. 나 오늘부터 공작님이랑 명예 부녀 사이 아니다?”

앞으로는 직진밖에 남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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