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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58화 (158/186)

158화

제네스의 말에 세리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마치 튕겨지듯 달려 나와 제네스의 팔에 매달렸다.

“이게 무슨 짓이신가요, 황태자 전하!”

그가 소란을 피우고 있는 장소는 라티아 라움디셀의 데뷔탕트였으며 멱살을 잡고 있는 이는 카르시안 라움디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죽여 버렸어야 할 사람은 카르시안이었다고 말하다니!

술렁…….

그레이트 홀 내 사람들의 시선이 싸늘해지고, 갖은 추측들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바보가!’

세리나는 너무도 뻔한 함정에 빠져 이성을 잃은 제네스가 혐오스러웠다.

지난 몇 년간 황도가 봉쇄되어 접촉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 데뷔탕트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황도가 개방된 이후 데뷔탕트가 열리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있었는데도, 하필이면 오늘 재회했다.

‘그게 뭘 뜻하는 거겠어?’

심지어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테라스에 숨어들었고, 주인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드레스가 흐트러진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부쩍 가까워진 스킨십을 하며.

‘그게 뜻하는 게 과연 뭐겠냐고!’

이 자리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라티아와 카르시안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한 황실 남매도 있었다. 심지어 그레이트 홀에는 제네스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도 구비되어 있었다.

‘그만 드세요. 주인공이 나오기도 전에 만취하면 어쩌자는 거예요?’

‘세리나. 역시 라티아는 날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이 와인을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겠어? 왜 이렇게 많이 준비해 놨겠냐고! 이건 라티아의 배려야. 그러니까 즐겨줘야지.’

제네스에겐 아무 말도 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 거란 예감은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자신의 데뷔탕트에서 별일을 저지를까 싶어 제네스가 취하도록 놔뒀던 게 화근이었다.

‘이런 치졸한 방법으로 오라버니의 눈을 돌게 만들다니.’

제네스는 지금 라티아를 갖고 싶어 미쳐 버린 지경이었다. 라움디셀 공작령을 습격하고 기어이 다른 소녀를 납치할 만큼이 탓에 지금 제네스를 향한 여론은 그 어느 때보다 좋지 않았는데, 데뷔탕트에서 난장을 부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제 목을 단두대에 갖다 바치는 발언을 하다니!

“죽여 버렸어야 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죠?”

“죽여 버리다, 죽여 버리다…….”

“잠깐만요. 그러고 보니 전에 살해당한 이플란트 백작 영식도 라움디셀 영애에게 약혼담을 보내지 않았나요?”

“잠깐만요, 그렇다면 설마…….”

술렁거림은 점차 커지며 점점 확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세리나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제네스가 헨델을 죽였다는 소문이 기정사실화 될 터.

‘빠져야 해.’

세리나는 제네스의 주먹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제발, 좀……!”

세리나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제네스의 움켜쥔 주먹 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을 때였다.

“후.”

그녀의 얼굴 위로 명백한 비웃음이 떨어졌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거기엔 멱살이 잡힌 카르시안이 있었다.

제네스에게 정신이 팔려 멱살을 잡힌 이가 자신이 사랑하는 카르시안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카르시안은 손쉽게 제네스를 뿌리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한시라도 빨리 도망가려고 애쓰는 세리나를 비웃었다.

그 순간 세리나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잔인한 사람! 이제 속이 시원하신가요?”

억누른다고 억눌렀으나 결국 찢어지는 비명 같은 소리는 난장판이 된 그레이트 홀에 울려 버리고 말았다.

제네스에 비하면 이성적이고 침착한 세리나지만, 그녀 또한 에메르나의 핏줄.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봐주지 않으면 그 사랑은 언제나 증오로 변모할 수 있는 족속이었다.

지금 세리나가 그랬다.

몇 차례나 거절된 구혼에 이어 눈앞에서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던 것을 목격한 것은 세리나도 제네스와 마찬가지.

“우리 남매에게 이토록 잔인하게 구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두 사람은 정말 잔인해요.”

세리나의 떨리는 목소리에 카르시안의 멱살을 잡고 있는 제네스의 손도 풀려 버렸다. 그 틈을 타 세리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고 했는데, 그런 세리나를 막은 이가 있었으니.

“잔인해?”

그는 다름 아닌 세리나의 손목을 잡아당긴 카르시안이었다.

“누가. 내가?”

“읏.”

손목을 콱 움켜쥐는 힘이 어찌나 억센지. 세리나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러는 와중에도 카르시안과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리나의 얼굴엔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런 세리나를 바라보는 카르시안의 표정은 차가웠고, 말투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

“그렇다면 잔인한 나를 기소해 봐.”

“무슨…….”

세리나가 입술을 달싹거린 때. 카르시안이 그녀와 제네스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나를 갖기 위해 헨델 이플란트를 죽여 나의 아버지를, 라티아를 치워 버리려고 재판대에 세워 뒀던 그때처럼.”

“……!”

“나와 맺어지기 위해 당신의 오빠인 제네스 황태자가 사랑하는 여인이 죽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움직였던 그때처럼.”

“세리나, 이게 무슨…….”

카르시안의 말에 제네스가 세리나를 불렀지만, 충격에 얼어붙은 세리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알고, 있었다고? 다?’

세리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제네스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늘 입바른 소리만 나불대던 자신의 여동생이자 유일한 아군을 노려봤다.

“세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

“오, 오라버니.”

뒤늦게 세리나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정말이야? 지금 라움디셀 공자가 한 말이 사실이야?”

“잠깐.”

“네가 라움디셀 공자와 이어지기 위해 라움디셀 공작과 라티아를 헨델 이플란트의 살인범으로 지목했다는 게 정말이냐고!”

제네스가 쩌렁쩌렁하게 외쳤으니까.

그 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지만, 그중에서 딱 한 명.

라티아만은 계략적이고도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의 데뷔탕트가 망가진 것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아니, 이러기 위해 연 데뷔탕트라는 듯이.

* * *

난 난리가 난 그레이트 홀을 보며 냉철하게 생각했다.

멜르조 운하 도시가 봉쇄되어 라움디셀 공작가의 돈줄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고, 나와 공작님이 재판대에 섰던 일 때문에 지금 라움디셀 가문은 등한시당하고 있어.

그런 와중에 제네스 황태자가 우리 공작령을 습격했고, 이는 황실이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는 뜻으로 비쳐질 수 있지.

왜냐면 나도 카르시안도 황실 남매의 구혼을 거절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많은 귀족들을 불러오고, 그들 앞에서 억울한 진실을 밝히려면 방법은 하나뿐.

데뷔탕트라는 커다란 행사를 열어 라움디셀이 아직 건재하단 걸 알리고 황실 남매를 이용해서 저들이 저지른 짓을 자백하게 해야 해.

나는 오로지 이것만을 위해 오늘을 준비해 왔다.

에메르나 황비가 쓰러진 이후 황실 남매는 데면데면했던 과거가 허상인 양 아주 돈독해졌다.

그게 무슨 뜻이겠어?

두 사람이 어떠한 공통된 목표로 의기투합을 했다는 소리지!

대체 그게 무엇일까, 고민하던 난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남매가 나란히 나와 카르시안을 노리고 있다니.

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주 좋지 않았다.

카르시안이 황도에 갇혀 있으니 우린 인질이 잡힌 셈이고, 권력은 부에서 나오는데 멜르조 운하 도시가 봉쇄되었으니 라움디셀의 금전 사정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헨델을 살해한 범인이 황실 남매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황성에 있는 루니아 황후와 아론 황자가 도움을 주기도 했고.

하지만 그럼에도 재판에 서는 것은 나와 클로드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제네스가 나를 갖고 싶어 하는데, 나를 재판에 세우다니.

빈센트에 의하면 그 재판의 뒤엔 세리나 황녀가 있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세리나 황녀와 제네스 황태자가 완전히 손을 잡은 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재빨리 몸을 숨겨야 했다. 세리나 황녀가 언제 내게 칼날을 뻗을지 모르니까.

나를 납치하기 위해 공작령을 습격하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 제네스의 손을 피해 나는 라티아라는 이름을 버리고 티아나로 지내며 많은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이것.

“오라버니, 우리는 갈라지면 안 돼요. 이 모든 건 함정이에요!”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사실대로 말해. 지금 라움디셀 공자가 하는 말이 정말이냐고! 정말 나를 배신할 생각이었어?”

바로 동맹을 맺은 황실 남매를 찢어 놓는 것.

그리고 나의 계획은 아주 순조롭게 성공하고 있었다.

기실 나는 황도가 열리지 않았더라도 카르시안을 나의 데뷔탕트에 초대할 생각이었다. 이 또한 세리나 황녀가 손을 썼다는 식으로 흘리면 제네스를 자극하기 딱 좋을 테니까.

그리고 카르시안이 갖고 있다는 진범의 증거는 다름 아닌 세리나의 마음이었다.

“절절한 마음이 담긴 편지 잘 읽었습니다. 세리나 황녀님. 하지만 저는 황녀님과 추구하는 바가 달라 저 혼자 살겠다고 가족을 버리는 짓은 못 하겠더군요.”

“세리나 너……!”

“오라버니, 아니에요. 이건 다 음모예요!”

카르시안의 말 마디마디마다 황실 남매의 우애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설령 그 진실이 어떻든, 제네스는 이제 더 이상 세리나 황녀를 믿지 않을 것이다.

세리나가 카르시안을 좋아한다는 건 제네스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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