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커다란 난동에 그렇지 않아도 쏠린 이목이 더욱 집중되었다. 힐끔힐끔하던 사람들이 아주 대놓고 제네스와 라티아를 번갈아 보고 있는 것이다.
“황태자 전하. 진정하세요.”
“후우, 후우…….”
세리나가 제네스의 팔을 잡으며 말리자 제네스가 숨을 몰아쉬었다.
취한 건지 아니면 열이 받은 건지, 제네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이제 19살로, 엄밀히 따지면 아직 성인이 되지 못했다.
다만 그는 황태자이며 18살에 특별 성인식을 치러 법적으로는 완전한 성인이었다. 물론 그가 미성년자라 하더라도 황태자가 음주를 즐기겠다는데 누가 방해를 하겠냐마는.
세리나가 계속해서 제네스를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내 구혼을 거절한 이유는 사실 남매와 내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가?”
제네스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보였으므로.
“구혼을 거절당한 걸 이토록 당당히 밝히시다니. 정말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네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구혼을 거절당한 앙심으로 아예 라움디셀과 척을 지겠다는 뜻으로?”
“그런데 대체, 라움디셀 영애는 어째서 남매와 다름없는 라움디셀 공자와…….”
“물론 입양된 것이 아니고 후견이니, 실질적으로 남매는 아니지 않나요?”
덕분에 사람들의 쑥덕거림에 불이 붙었다. 그들은 이보다 재미있는 일이 없다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떠들어 댔다.
그런데 그럴수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채로 가린 라티아의 입가의 미소가 짙어지고 있었으니.
‘좋아, 좋아. 조금만 더 해. 어서 제 발로 낭떠러지로 걸어들어오란 말이야.’
이는 사실 라티아가 전부 계산해 둔, 세리나의 말처럼 ‘함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카르시안과 재회한 라티아는 황급히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 * *
“카르시안. 네 도움이 필요해. 지금부터는 네가 꼭 필요해.”
자신이 필요하단 말에 라티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다른 피부보다 조금 차가운 콧대를 문지르고 있던 카르시안의 몸이 굳었다.
“내가, 필요해?”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깃든 것은 분명한 기쁨이었다. 지금껏 라티아는 카르시안에게 마땅한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그것이 카르시안에게는 꼭 라티아에겐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데 라티아의 입에서 지금, 그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왔다. ‘지금부터는’이라는 기쁜 수식어와 함께.
“말만 해.”
카르시안이 성급하게 대답했다. 라티아가 앞으로 무슨 요구를 하든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듯이.
이후 라티아는 카르시안에게 자신이 앞으로 할 일을 설명했다.
“난 헨델 이플란트 영식을 살해한 범인을 찾을 거야. 아니, 사실은 범인은 알고 있어. 그런데 증거가 부족해.”
“진범을 알고 있다고? 일단 알겠어. 그런데 그 증거를 대체 어떻게 수집하지?”
“그건 이미 네가 갖고 있어, 카르시안.”
라티아의 말에 카르시안은 저도 모르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깨달았다.
“라티아, 넌 역시 대단해.”
카르시안이 전율하듯 웃었다. 그로서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짧은 대화와 시선을 교환한 끝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옷을 조금씩 흩어 놨다.
각오하고 있었지만 역시 손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라티아는 단추를 푸는 손가락이 헛돌기까지 했다.
“내가 할게.”
그러나 카르시안은 능숙해 보였다. 잘게 떨리는 라티아의 손을 잡아 내리고는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스스로 단추를 몇 개 풀었다.
부쩍 굵어진 목과 선이 두드러진 목젖 그리고 그 밑의 쇄골들이 드러나자 괜히 긴장이 되었다. 라티아가 마른 침을 몰래 삼키며 곱아든 손가락을 숨길쯤, 카르시안은 라티아의 뺨을 가볍게 문질러 화장도 지워 냈다.
단정하게 묶인 머리칼이 조금 흐트러지고, 서로 끌어안았던 탓에 구겨진 드레스 자락도 굳이 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카르시안은 라티아의 입술 화장을 지우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라티아는 그의 손길을 기다리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왜?”
이것까지는 아니야? 하듯 묻는 시선에 라티아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이런 작전’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시각적 효과라는 걸 안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능숙해 보이네.”
라티아야 카르시안과 작전을 함께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어른들에게 자문을 구했다지만, 카르시안에게는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을 터.
그런데 카르시안은 너무도 잘 아는 듯 익숙해 보였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와 만나지 못한 사이에 연애라도 했던 건가?’
이럴 시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기분을 달랠 길이 없었다.
라티아가 불만스레 고개를 틀고 있는 때.
“……풋.”
앞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응?’
고집스레 옆만 바라보던 라티아가 눈동자만 굴려 앞을 보자, 그곳엔 주먹 쥔 손으로 입술을 누른 채 웃고 있는 카르시안이 있었다.
“왜 웃어?”
“아니. ……큭.”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이번엔 그가 고개를 틀어 버렸다. 그러나 들썩거리는 어깨까지 숨겨지진 않았다.
라티아가 완전히 카르시안을 돌아봤을 때, 둘의 사이가 갑자기 좁혀졌다.
여전히 라티아를 막다른 곳으로 밀어붙인 카르시안은 벽을 짚고 저보다 한참이나 작은 라티아의 위로 몸을 숙였다.
“!”
훅 다가온 카르시안의 체향은 이제 라티아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라티아의 눈에 가느다랗게 뜨인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 속 만족스러움이 담긴 순간.
둘 사이에 가벼운 마찰음이 퍼졌다.
“……!”
라티아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지금, 이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얼이 빠져 버린 라티아를 뒤로한 채, 카르시안은 고개를 틀었다. 그는 천천히, 확실하게 라티아의 입술에 묻은 붉은 연지를 자신의 입술로 옮기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 속에서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조용히 움직이며 나른한 숨을 내쉬는 카르시안이 주는 촉각뿐이었다.
‘이렇게 가까운데…….’
카르시안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살짝 벌어진 채 움직이는 입술의 주름마저도 선명했다.
조금 뒤, 카르시안이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카르시안의 얼굴에 붉은 곳이 늘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열기를 품은 붉은 눈동자와 그 밑에, 라티아의 화장을 훔쳐간 입술.
라티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카르시안과 입을 맞췄다는, 비현실적이면서도 지난 몇 년간 꿈속에서도 그려 왔던 일을.
그리고 그것은 저 혼자만 꿈꿨던 게 아니라는 것 또한.
‘대체, 언제부터……?’
라티아는 황망하게 생각했지만 단언컨대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는 것보다 카르시안이 오로지 그녀만을 바라보게 된 것이 더 오래되었을 것이다.
깨달음은 놀람으로, 놀람은 경악으로 변해 라티아의 총명한 자안을 마구 흔들어 댔다. 카르시안은 지금이 적기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꿈만 같아, 라티아.”
늘 견고하고 단단하던 철벽이 흐물흐물 흔들리고 있었다. 빠르게 치고 들어가 장악하려면 지금이 때였다.
카르시안이 하는 말은 모두 꿈결 같았다. 좀처럼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라티아가 멍하니 카르시안만 보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능숙하지 않을 리가 없지.”
“……?”
“난 항상 꿈속에서 이렇게 해 왔으니까.”
“……!”
카르시안이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닫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키스를 했던 것을 깨닫는 것까지 걸린 시간의 절반도 되지 않을 만큼 짧은 틈.
“……으!”
그 찰나 라티아의 얼굴은 화악 붉어지고 말았다.
둘의 입술은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카르시안은 팔뚝으로 벽을 짚은 채 라티아 쪽으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시각각 희게, 붉게, 새파랗게 변화를 반복하는 라티아의 얼굴이 전부 보였는데.
“라티아, 이건 정말 ‘작전’일 뿐인 거야?”
달리 말하면 라티아 또한 카르시안의 얼굴이 전부 보인단 뜻이었다.
“그건…….”
카르시안의 표정 속 간절함을 읽은 라티아는 그 순간 덜그럭거렸다.
‘이런 작전’을 쉽게 말하면 두 사람이 연인인 척하며 두 사람에게 구혼을 했던 제네스와 세리나를 자극하여 ‘실토’하게 만든다는 함정이다.
물론 이 작전은 평소의 라티아가 계략하던 것과는 결이 달랐다.
라티아는 아직 어리고, 이제 데뷔탕트를 치르는 소녀이며 ‘이런 작전’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카르시안의 도움이 불가피하다.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던 이가 라티아인데,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카르시안의 협력에 모든 것을 거는 작전이라니.
‘그런 건 라티아답지 않아.’
해서 사실 카르시안은 조금 전부터 내심 의심하고 있었다.
물론 카르시안으로서는 라티아가 자신을 ‘필요’로 해 주고, 그 방법이 그녀의 허락하에 손댈 수 있는 거라 하니 거절할 이유조차 없었지만.
‘혹시 라티아는, 아니. 어쩌면 라티아‘도’.’
희망 사항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보인다면 움켜쥐고 싶은 게 깊은 감정의 무저갱에 빠진 사내의 마음이었다.
이런 카르시안을 뒤로하고, 라티아는 충격에 몸을 떨었다.
‘정말 작전일 뿐이냐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랬더라면 카르시안이 멋대로 입을 맞췄을 때 라티아는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더 입을 맞춰 달라고 조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애초에 이런 작전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이건 서로의 혼삿길을 막는 짓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도 알다시피 라티아는 ‘작전’이라는 핑계로 라티아는 슬그머니 카르시안에게 자신의 욕망을 내비치려 했다.
졸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수로 이 세계의 남자주인공인 카르시안과 엮일 수나 있을까.
해서 라티아는 떨리는 시선을 애써 감춘 채 말했다.
“지금은 지금 일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라티아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자신의 마음이 드러난 표정을 들키고도 떳떳하게 서 있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라티아의 말을 들은 카르시안은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었지만 라티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듯싶었다.
* * *
다시 돌아와서 지금.
라티아는 일부러 길길이 날뛰는 제네스에게 보란 듯이 냅킨으로 카르시안의 입가를 닦아 줬다.
다들 두 사람의 담백한 듯 농염한 자태에 정신이 팔려 미처 확인하지 못한 입술로 모두의 시선이 옮겨갔다.
물론 클로드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미친……!”
제네스가 엉망으로 깨진 와인바를 짓밟으며 달려와 카르시안의 멱살을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그가 외쳤다.
“이 자식을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