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카르시안의 몸에 일순간 힘이 빠졌다. 난 기다렸단 듯 얼른 그에게 사로잡힌 손을 빼고 카르시안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내 품 안에 안기는 부피감도, 코끝에 풍겨 오는 체향도 모두 달랐다. 하지만 난 지금 내가 안고 있는 남자가 카르시안이란 걸 누구보다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 느낌이 카르시안이 아니라면 세상은 다 거짓일 테니까.
“보고 싶었단 말은 진짜야, 카르시안.”
“…….”
“너도 이미 알고 있지만 나에겐 사정이 있었어. 너에게 편지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은밀하게 숨어 있어야만 했지. 그래도 다행히 네 편지는 받아 볼 수 있었어. 삐로리가 네가 쓴 세이렌의 편지를 운송하는 세이렌을 만나 중간에 가로채서 전해 줬거든.”
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낯선 것 같았던 그의 체향은 처음부터 내게 각인되어 있던 것처럼 익숙해졌다.
“제네스와 세리나가 손을 잡은 것 같아. 두 사람이 나를 노리고 있어.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는 잠시간 라티아 라움디셀을 버려야 했어.”
“티아나 아메시스트.”
“맞아. 대신 그 이름으로 움직였어. 네가 예상했던 대로 티아나 아메시스트는 아론 황자 저하의 차명이 아니야. 나의 차명이지.”
난 이제야 또렷해진 카르시안의 눈을 올려다봤다. 목을 한참이나 뒤로 젖혀야 할 만큼 성장한 카르시안은 아직 낯설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 또한 익숙해질 테니까.
“편지를…… 읽었어.”
낮은 목소리가 얼떨떨하단 듯 뜸을 들이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나만큼이나 카르시안도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우리가 못 만난 지난 7년간, 나도 많이 자라고 모습이 바뀌었으니까.
나도 이제 160cm 정도로 훌쩍 컸고, 몸무게도 많이 늘었다. 원체 작았던 손발은 여전히 작았지만 이제는 어엿한 어른의 손이기도 했다.
게다가 지금 나는 힐을 신고 있다. 카르시안의 기억 속, 10살짜리 라티아는 신지 못하는 힐을.
카르시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2차 성장기를 지나 목소리가 조금 어른스러워졌고, 아직 미성숙하긴 마찬가지지만 나름대로 굴곡 있는 몸선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카르시안은 오로지 내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꿈꿔 왔다는 듯이. 그가 꿨다는 꿈속에서도 이런 모습은 보지 못했다는 듯이.
그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간신히 말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그래.”
“그래서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맞아.”
“……정말, 이야?”
그는 여전히 날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 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재회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난 카르시안의 허리를 둘러 안은 팔에 힘을 바짝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모든 준비가 끝났어. 남은 건 반격뿐이야.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헤어질 일은 없어.”
카르시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차분한 듯 서늘하며 날 서 있던 눈가가 풀어지며 앳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방금 내가 한 말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모양인지 그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너를 데리러 왔어, 카르시안.”
“……응.”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응.”
카르시안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울음을 삼켰다. 이제 20살이 된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성스럽게 느껴진다면 내가 너무 주책스러운 걸까?
여전히 달을 등지고 있어 어두컴컴하긴 마찬가진데, 아까와 달리 지금은 그의 얼굴이 너무도 잘 보였다.
여전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속내가 읽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난 카르시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그의 품으로 고개를 숙였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카르시안의 것인지 내 것인지 분간하려면 한참 걸릴 듯싶었다.
* * *
조금 전.
“카르시안!”
이 데뷔탕트의 주인공인 라티아 라움디셀의 목소리가 그레이트 홀을 갈랐다.
그녀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테라스를 향해 달려갔다. 경쾌한 구두 굽 소리 뒤로 작약처럼 여러 겹인 드레스가 흐드러졌다.
그런 라티아의 앞엔 그녀가 반갑게 외친 이름, 카르시안이 서 있었다.
“세상에…… 진짜 라움디셀 공자인가?”
“황비님의 봉쇄령이 내려진 후에도 두 번이나 탈출했다는 그 도망의 귀재?”
“근데 듣자 하니 어쩐 일인지는 몰라도 두 번 모두 순순히 붙잡혔다 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그를 모순의 죄수라고 부른다고 하죠.”
라티아가 테라스로 뛰어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거운 커튼이 내려졌다. 테라스는 은밀한 곳이었다. 특히 남녀가 함께 들어가면 더더욱.
그러나 사람들은 카르시안과 라티아가 어두컴컴한 테라스에서 단둘이 ‘무슨 일’을 할지보다는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카르시안에게 더욱 집중했다.
“왜, 그 소문도 있지 않습니까? 황도 내에서 일어났던 궐기 말입니다.”
“아, 그…… 귀족이 솔선수범해서 평민들까지 화합하여 일으켰던 그 궐기요?”
“예. 그 궐기가 사실은 저 라움디셀 공자가 일으켰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아, 비슷한 소문이라면 저도 압니다. 봉쇄된 황도가 안전했던 이유는 그가 복면의 영웅으로 치안을 관리했기 때문이라더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하긴, 라움디셀 공자 정도의 무력이라면 충분히 그랬을 만도 하군요.”
이렇듯 황도가 봉쇄되었던 지난 시간 동안 카르시안은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헨델 이플란트 피습 사건의 살해 용의자로 친부인 클로드와 가문인 객식구인 라티아가 선상에 올랐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하여 항간에서는 클로드와 카르시안이 의절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카르시안이 두 번째로 붙잡혔을 적, 클로드가 그를 보석방시켜 주지 않은 것도 그 소문에 한몫 거들었다.
“하지만 라움디셀 영애의 데뷔탕트에 초대받았단 말은…….”
“역시 다 헛소문이란 거겠죠?”
“아아, 그나저나 전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밤의 왕이 있다면 저러한 모습일까요?”
“네에. 정말 새벽이 사람으로 현신한다면 저럴 것 같아요.”
카르시안이 사람들의 시야에 잡힌 것은 아주 잠깐인데, 영애들은 벌써 마음을 빼앗긴 후였다.
그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카르시안에 대한 이야기를 한껏 늘어놓을 때였다.
“아빠랑 인사는 나눴어?”
촤악, 카르시안이 무거운 커튼을 걷었고 그 사이로 조잘거리는 라티아가 나왔다.
“아니, 아직.”
카르시안의 목소리는 음이 무척이나 낮은데 성량이 풍부하여 짧은 말로도 사람의 귀를 사로잡는 마력이 있었다.
그러하니 사람들의 이목이 다시 두 사람으로 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카르시안은 묵묵히 라티아의 걸음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없애는 기사처럼 커튼을 들춘 채 조금 허리를 숙이고 있었고, 라티아는 그런 카르시안의 뺨을 매만지고 있었다. 이제 보니 카르시안은 라티아가 제 뺨을 보다 잘 만질 수 있도록 몸을 낮추고 있는 것 같았다.
거대한 짐승이 작은 소녀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것처럼 숭고하면서도 어딘가 낭만적인 모습이었다. 동시에 남매라기보다는 조금 더 사이가 깊어 보였다.
얄쌍한 뺨과 뼈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선을 쓰다듬는 손가락은 맹수를 어르는 것 같았고, 그런 손길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 안달이 나 몸을 낮추는 이의 손은 여인의 허리를 단단히 안고 있었으니.
게다가 테라스에서 나오는 두 사람의 옷차림은 조금 흐트러져 있기까지 했다.
“설마…….”
“아뇨, 아뇨. 남매 같은 사이라고 들었는데…….”
“게다가 두 사람은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저하의 구혼을 받은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놀라 쑥덕거리며 한곳을 바라봤다. 그곳엔 아니나 다를까, 실핏줄이 둥둥 뜬 눈을 형형하게 뜨고 있는 제네스와 세리나가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글쎄요.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린 입을 다물어야 한단 겁니다.”
조금 전까지 소란스럽던 그레이트 홀엔 이제 춤곡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티아와 카르시안은 여전히 저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
“아빠가 어디쯤에 계시냐면…….”
“아, 저기 계신다.”
“아빠! 카르시안이 왔어요!”
그레이트 홀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어떻든, 두 사람은 오로지 클로드만 찾을 뿐이었다. 클로드는 부모가 앉는 곳에 앉아 홀로 와인을 기울이고 있었다.
주변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제게로 쪼르르 다가오는, 이제는 어른이 된 자식들을 보던 클로드의 얼굴에 가벼운 웃음이 스쳤다.
“요 영악한 녀석들.”
그것이 클로드의 첫인사였다.
그에 카르시안과 라티아가 훌쩍 자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세 사람은 무척이나 화기애애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특히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이 광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제네스와 세리나는 더더욱 그랬다.
“지금 이게…….”
콰지직, 제네스가 기울이고 있던 와인잔이 깨지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그런 제네스의 팔뚝을 붙잡은 세리나가 다급히 말했다.
“아뇨, 오라버니. 이건 함정이에요.”
그러나 이미 숨을 씨근덕거리고 있는 제네스의 귀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리나의 얼굴에 ‘낭패’라는 글자가 스쳐 지나간 때였다.
“꼴 한번 잘 돌아가는군! 데뷔탕트를 치르자마자 테라스에서 남매와 난잡한 짓을 벌이다니!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라움디셀의 위상도 이제는 바닥에 처박혔구나!”
와장창! 제네스가 근처의 와인바를 깨부수며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