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저녁에 시작한 데뷔탕트 때문인지, 하늘엔 벌써 달이 휘영청 밝았다.
내부는 눈이 부시도록 밝았는데, 이상하게도 카르시안이 서 있는 테라스는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랴.
“카르시안!”
나는 클로드를 뒤로한 채 드레스 자락을 잡아 올리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어두컴컴한 테라스의 중앙도 아니고 구석에 비스듬히 서 있던 카르시안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화악!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순간적으로 움직인 카르시안의 팔이 뭔가를 한 것인지, 테라스 창의 좌우에 묶인 커튼이 늘어졌다.
난 묵직한 커튼이 닫히기 전에 재빨리 파고들어 테라스로 나갔고 동시에.
“으!”
카르시안의 널따란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팔에 한 아름 잡히는 허리는 내가 얼굴을 부딪친 가슴보다 얇았지만 명백히 남성의 것이었다.
팔 아래 느껴지는 단단함이 클로드처럼 예사롭지 않았다.
뒤에서 커튼이 출렁거리는 무거운 소리가 들렸다. 일순간 소란스럽고 북적이던 그레이트 홀의 소음이 전부 차단된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었지만 난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며 카르시안에게 매달리다시피 말했다.
“안 온 줄 알았어!”
“…….”
“아무리 찾아도 네가 보이지 않아서. 여기에 있었구나!”
난 고개를 번쩍 들고 헤실헤실 웃었는데, 이때였다.
“거짓말.”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내 머리 위로 느긋하게 떨어졌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돋았다.
그의 뒤로 높게 뜬 초승달이 보였다. 그런 달빛을 등지고 있기 때문일까?
카르시안의 표정이 읽히지 않았다.
“……카르시안?”
그 순간 카르시안이 말도 안 되게 큰 손으로 내 어깨와 팔뚝을 잡아 제게서 떨어뜨려 놨다. 그와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그렇지 않아도 보이지 않던 얼굴이 더더욱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기분 탓이겠지? 그래, 기분 탓일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검게 보일 리가 없잖아.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안광이 번들거리는데 그 색은 검은색이었다. 무엇도 읽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눈동자는 가짜 유리처럼 불투명하기만 했다.
“카르……!”
난 그를 제대로 부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내 어깨와 팔뚝을 한데 잡아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카르시안이 오른손을 들어 내 입을 꽉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으, 읍……!”
난 놀라 눈을 부릅뜨고 본능적으로 몸부림을 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흡!”
카르시안이 왼손만으로 내 양 손목을 그러쥐어 앞으로 단단히 고정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나는 구석에 몰려 있었다. 얇은 레이스로만 보호된 맨 등이 차가운 테라스 벽에 닿았다. 카르시안은 여전히 달을 등진 채 내게 몸을 잔뜩 밀착했다.
“쉬잇…….”
낮은 목소리가 거칠었다. 목을 긁는 맹수 같아 온몸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움직이지 마.”
속삭이는 목소리는 무척 음험했다. 내 기억 속의 약간은 앳되고 미성숙했던 미성이 흔적조차 남지 않은 완벽한 성인 남성의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카르시안…… 맞는 거지?
사위가 너무 어두워서 분간이 가지 않았다. 검은 거구가 내게서 모든 빛을 앗아가 판단력조차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카르시안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리고 있는 건 나의 시선이었다.
나의 동요를 알아차린 걸까? 커다란 덩치가 나를 압박했다. 카르시안의 존재감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
클로드가 내 몸을 돌려 그를 보여 준 순간부터 나는 계속해서 카르시안이 반가웠다. 나는 한시도 이 순간을 기뻐할 것에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게 뭐지?
가슴이 떨렸다. 설레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아, 난 지금 무서웠다.
오랜만에 만난 카르시안이 두려웠다.
내 기억 속의 어린 소년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그의 모습에, 나는 겁이 났다.
나를 속박하고 제 품에 가둔 채 벽으로 밀어붙인 이는 분명 카르시안인데, 내 기억 속의 카르시안이 아니었다.
대부분 뾰로통하고 불퉁한 표정을 짓긴 했어도 내 앞에서 때때로 보여 주던 미소가 봄볕 같던 소년.
아무리 학대를 받고 위기에 처해도 본인의 올곧음을 잃지 않고 어둠에 침체되지 않던 소년.
하루가 끝나가는 순간에만 보이는 주제에 타오르는 것 같던 노을을 등지고 내 손등에 입을 맞추던, 정열적인 눈동자를 가지고 있던 소년.
그 소년은 온데간데없이 지금 내 앞엔 암흑 그 자체의 남자가 서 있을 뿐이었다.
“매일 밤, 이런 꿈을 꿨어.”
그 남자가 뭐라고 속삭였다. 화려한 금사로 수놓아진 검은 제복은 마치 밤손님을 연상케 했다.
만약 밖에서 누가 우리의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카르시안에게 가려져 나는 보이지도 않으리라.
“네가 내 손에 잡히는 꿈. 네가 내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꿈. 그런데 꿈은 꿈일 뿐이라서, 결국엔 네가 흩어지는 꿈.”
“끅…….”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갔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민망했지만 작은 움직임이라도 들키면 목이 달아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움직이지 마.”
“…….”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
“절대로 흩어지지 마.”
빠르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너무 낮고, 거의 숨소리나 마찬가지여서 잘 들리지 않았다.
내 머릿속이 어지러워 카르시안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데에 한몫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카르시안의 앞에서 목숨을 내놓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이야.
그런데 난 불시에 깨닫고 말았다.
이 기분, 카르시안은 계속해서 느끼고 있었겠구나.
내가 그에게 답장을 하지 못했던 지난 몇 년간, 카르시안은 계속해서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겠구나.
내 목이 세상에 나와 있는 것 같은 느낌. 내가 언제 죽어도, 언제 사라져도 이상할 것 없다는 두려움. 누구든 나를 해칠 수도 있을 거란 공포.
카르시안은 내가 연락하지 못했던 시간 내내 그러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겠구나.
머릿속에 카르시안이 지치지도 않고 보내 왔던 편지의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애원은 절망으로, 자포자기는 곧 협박으로. 그리고 종내엔 타협과 인내로.
그래, 이건 카르시안이 내게 주는 벌이다.
나 이렇게 무서웠노라고, 나 이렇게 두려웠노라고, 네가 연락하지 않는 동안 나는 이렇게 겁에 질려 있었노라고.
그가 지금 내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
동시에 그는 지금 확인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제 손 안에 멀쩡히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꿈에서 깨면 흩어질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보니 카르시안의 손가락은 정확히 내 손목에서 맥박치는 곳에 닿아 있었다. 마치 맥이라도 짚는 것처럼.
난 카르시안의 커다란 손에 사로잡힌 손목에 힘을 풀었다. 그뿐이랴. 선득한 긴장감으로 온몸에 바짝 들어가 있던 힘도 빼 버렸다.
내가 굳어 있으면 카르시안이 나를 분간하기 어려울 테니까.
난 카르시안의 앞에서 항상,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고 편안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도 그렇게 있어야겠지. 그래야 카르시안이 보다 빨리 안심하고 깨달을 수 있겠지.
내가 살아서, 우리가 지금 재회했다는 걸.
스르륵.
“!”
내가 미끄러지자 아니나 다를까, 놀란 카르시안이 내 입을 틀어막았던 손으로 나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안아 줬다.
그제야 보였다.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면서도, 동요하면서도, 당장이라도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니냐고, 자신이 너무 지나쳤던 건가 걱정하고 있는 붉은 눈동자가.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매 순간 그리워했던, 카르시안의 절규가 담긴 편지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끌어안으면서 떠올렸던 그 눈동자가.
눈앞의 카르시안은 내가 알던 소년이 훌쩍 자란, 나의 카르시안이었다.
“카르시안…….”
막혔던 숨을 토해 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르시안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난 여전히 온몸에서 힘을 뺀 채, 카르시안이 만약 해코지를 하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게 나를 풀어놓은 채 그에게 말했다.
“보고 싶었어.”
카르시안이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난 이제 선명해진 그의 붉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주 많이.”
물속에 빠져 있는 것처럼, 카르시안은 수면 밖에 있는 것처럼 그의 상이 흔들렸다.
이건 내 눈동자를 뒤덮은 눈물 때문이겠지.
“매번 편지 보내 줘서 고마워.”
“…….”
“그리고 답장 못 해서 미안해.”
목이 메여 목구멍에 뜨거운 울음이 가득 찼다. 늪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내가 아닌 카르시안의 목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난 내 숨통이 막히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다.
“핫…….”
카르시안이 나를 그대로 꽉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폐를 터트려 버릴 듯이, 내 온몸에 자신의 모양대로 멍이라도 만들 듯이 단단히 힘을 준 남자의 몸에 난 파묻히고 말았다.
어린아이가 어리광을 부리듯, 개가 오랜만에 재회한 주인에게 투정을 부리듯이 카르시안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부비적거렸다.
날렵한 콧대가 서늘해서 등골에 소름이 한 번 돋고, 아무렇게나 문질러지는 입술이 뜨거워서 아랫배에 전율이 돋았다.
입안이 바싹 마르며 갈증이 돌았다. 난 이 갈증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손 좀…… 놔줘.”
“싫어.”
카르시안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거절했다.
“또 사라지려고.”
“안 그래.”
“어떻게 믿어.”
“그럼 손만 놔줘.”
“싫어.”
그가 떼를 쓰듯 고개까지 마구 저어 댔다. 드레스에 장식된 보석 때문에 얼굴이 쓸려 아플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러는 중에도 그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여 갈증이 더욱더 심해지고 있었다.
해서, 나도 짜증을 부리듯 말하고 말았다.
“나도 싫어.”
“뭐?”
“나도, 나도 안고 싶단 말이야!”
내 갈증의 원인.
그건 그가 나를 기다려 왔듯 계속해서 그를 참아 왔던 카르시안이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