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 * *
“긴장되느냐?”
불이 꺼지기 일보 직전, 내 곁에 선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익숙한 그 목소리엔 장난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난 앞으로 살짝 흘러내린 잔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긴장이 돼요.”
내 말뜻을 바로 알아들은 남자가 픽 웃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마저도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야 당연했다. 지금 나의 곁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는 나를 길러 준 아버지, 클로드니까.
“내가 말한 의미로도 긴장해도 좋을 텐데.”
“그걸로 긴장하기엔 오늘이 너무 뜻깊어요.”
오늘 난 17살이 되어 데뷔탕트를 치른다. 이날을 기점으로 나는 제국에서 성인과 다름없는 독립성을 갖게 된다. 물론 진짜 성인은 아니지만.
내가 긴장하는 건 바로 이것이다.
성인이 된다는 것, 그건 내가 더 이상 보호자의 품에만 숨어 있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성인이 되어 원작을 탈출하려고 했으면서 지금은 데뷔탕트를 치르는 것을 아쉬워하다니.
그래서 난 데뷔탕트를 치른다는 것보다 내가 클로드의 곁을 떠나도 이상할 것 없다는 것이 더욱 긴장되었다.
난 슬그머니 클로드를 올려다봤다.
‘네가 무엇 때문에 긴장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럴 일은 없다.’는 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
난 클로드를 부르려고 했지만, 때마침 그레이트 홀의 불이 전부 꺼졌다.
나의 데뷔탕트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가자.”
“네.”
물어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나는 클로드의 손을 단단히 잡고 걸음을 옮겼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들고 누군가가 계단을 오르듯 하나씩 켜지는 촛불이 아롱거렸다.
암흑 속에서 오로지 나만을 밝히는 조명에 눈이 부셨다. 하지만 그 덕에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건 다행이었다.
괜한 긴장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내가 계단 밑까지 안전하게 내려오자 시엘이 부리는 마법사들이 램프를 허공에 띄워 줬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빛나는 각양각색의 램프와 촛불 덕분에 그레이트 홀에 별이라도 내려온 것 같았다. 그사이에 향긋한 내음을 머금은 꽃잎도 떠다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을 준비해 준 클로드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무척 고마운 기분이 들었다.
감동받아 잠긴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자리해 주어서 고마워요.”
“그런 말 마세요. 라움디셀 영애의 데뷔탕트에 초대받아 무척이나 영광인걸요.”
“오늘같이 뜻깊은 날 함께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나를 두고 쑥덕거리던 건 다 허상인 양, 모두가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축하해 줬다.
“노골적이기도 하지.”
나를 이끌어 준 클로드의 입술 사이로 심기가 불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아주 작은 소리여서 나만 들었지만.
난 클로드의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 황급히 말을 돌렸다.
“오늘은 제게 무척이나 중요한 날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자리해 주신 만큼. 이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도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영광입니다.”
“앞으로 즐거운 일만 있으시길!”
모두가 박수를 치며 축하해 줬고, 클로드가 고개를 까딱거리자 잔잔한 입장곡을 연주하던 오케스트라가 유연하게 왈츠로 곡을 변경했다.
춤을 출 때 동선이 겹치거나 사람이 다치지 않게 램프의 밝기도 확 밝아졌다.
내가 등장하기 전처럼 화려하고 눈부시도록 밝아진 그레이트 홀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헥터가 직접 호위를 보고 있었고 가면을 쓴 시엘과 나에게 바쁘게 손을 흔드는 셀트론, 꾸벅 고개를 숙이는 유리드는 물론이고 하인리드까지 있었다.
난 그들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바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찾고 있는 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내가 보고픈 이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오지 않은 건가?
살짝 낙담하려던 때.
“라티아, 너의 첫 곡은 당연히 나에게 주겠지?”
클로드가 묵직한 돌먼을 익숙하게 뒤로 넘기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내 손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정말 근사했다.
우리가 함께한 지 시간이 상당히 흘렀음에도 클로드는 한결같이 멋있었다.
조금 긴 머리카락도 여전히 윤기가 흐르는 강인한 검은색이었고, 지금은 감고 있지만 늘 나를 직시하는 붉은 눈동자는 선명하고 다정했다.
왼쪽 눈에 세로로 난 흉터는 살짝 옅어졌지만 늘 그렇듯 사나운 매력을 물씬 풍기는 데에 일조하고 있었고, 몸 단련도 게을리하지 않아 탄탄하고 올곧았다.
뭇 여인들은 물론이고 내 또래의 어린 영애들도 클로드의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매력에 힐끗힐끗 눈짓을 하고 있었다.
난 그런 클로드의 손 위로 아직도 또래에 비해 작은 손을 올렸다.
“당연하죠, 아빠.”
난 오늘 하루는 내내 클로드를 아빠라고 부르기로 약속했다.
내 말에 클로드가 새삼 기쁘다는 듯 눈을 뜨고는 그대로 휘어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그린 듯한 미소를 걸친 그는 아주 잘생겼다.
“앗…….”
“와아…….”
내가 봐도 설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설렐까. 노소 할 것 없이 가슴을 부여잡은 여인들이 앓는 소리가 왈츠 음악 사이로 퍼졌다.
나와 클로드는 우아하게 걸으며 홀의 중앙으로 향했다. 춤을 추고 있던 이들, 춤을 신청하고 있던 이들이 모두 우리의 자태에 넋이 나가 자리를 비켜 줬다.
“다들 네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구나.”
“제가 아니라 아빠일걸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니에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클로드가 픽 웃었다.
“그 녀석에겐 좋은 일이겠군.”
그러며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가까이에 있는 나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클로드는 나를 부드럽게 리드했다. 오늘을 위해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쪼개 연습을 하기는 했지만 클로드의 뒤를 따르려면 한참 멀었다.
사교계에 자주 드나드는 것도 아니면서 춤은 또 왜 이렇게 잘 추신담.
클로드에게 부족한 건 정말 뭘까. 지난 시간 동안 우리에겐 아주 많은 풍랑이 들이닥쳤는데, 클로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도 오늘까지 무사할 수 있었고, 내가 하고자 한 모든 일을 성공할 수 있었다.
클로드가 나를 멀리 보내자 작약 꽃잎처럼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화악 퍼졌다.
“세상에…….”
“아아, 정말 아름다워요.”
“오몽 살롱의 드레스겠죠?”
그 모습에 나를 탐탁찮게 여기던 이들마저도 감탄하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시엘과 셀트론이 오몽 살롱에 직접 주문을 넣고 메리와 앤, 수잔이 마지막까지 달라붙어 더욱 아름답게 꾸며 주고자 노력한 결과물이었다.
내가 빙글 돌며 다시 클로드에게로 향하자, 그가 아주 흐뭇한 얼굴로 내 손을 받아 줬다.
“정말 눈이 부시군. 누구 딸인지.”
“아빠 딸이라는 소리를 해야 하는데.”
“그럼 하면 되지.”
“피가 이어지지 않았는데도요?”
“선천적인 아름다움 말고 후천적으로 가꿔지는 아름다움도 있는 법이지.”
클로드가 쿡쿡 웃으며 내게 어서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해 달라며 눈짓했다. 난 클로드의 손 아래에서 부드럽게 한 바퀴 돌고는 화사하게 웃었다.
“아빠 딸이라서 이렇게 예쁜가 보죠!”
내 말에 클로드는 이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단 듯 활짝 웃었다.
“하하!”
기분 좋은 웃음소리에 그렇지 않아도 집중된 이목이 더욱 몰렸다. 클로드가 이를 한껏 드러내며 웃는 건 나도 처음이라 깜짝 놀랐다.
어느새 왈츠 음악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클로드가 나를 꼬옥, 아주 소중한 아이를 안 듯 다정하게 안아 줬다.
그가 아주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 넌 내 딸이라서 이렇게 예쁜 거지. 하지만 내 딸이 아니게 된다 하더라도 너는 계속 어여쁠 거다.”
응? 딸이 아니게 된다니?
느닷없는 말에 나도 모르게 의아한 소리를 냈는데, 잠시 다른 곳을 보듯 뜸을 들이던 클로드가 말했다.
“너는 내일부터 나를 두 번 다시 아버지나 아빠라고 부르지 말거라.”
“……네?”
“네 아버지로서 함께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게 무슨…….”
“이것이 나의 선택이며 너를 위한 길이다. 라티아.”
영문 모를 소리였다.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니? 아빠라고 하지 말라니?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데, 클로드는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던 듯 차분해 보였다.
“그, 그게 무슨, 소리이신지, 저는 잘…….”
드물게 말까지 더듬어 버렸다. 그러나 클로드는 내 말을 끝까지 들어 주지 않았다.
“자, 들었겠지.”
그가 꼭 안고 있던 나를 품에서 떼어 놓으며 빙글 반 바퀴 돌린 것이다.
자연스레 나는 활짝 열린 한 테라스 쪽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
“……!”
조금 전까지 내가 부단히 찾던 인물.
클로드를 빼닮은 검은 머리칼, 순도 높은 루비를 연상케 하는 총명하면서도 맹렬한 붉은 눈동자,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다봐야 할 만큼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 화려한 은사로 수놓은 검은 제복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남자.
휘오오…….
열어 둔 테라스 창문으로부터 안감이 푸른 돌먼이 묵직하게 휘날렸으나 꿈쩍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이제는 소년이 아닌 사내.
늘 나를 기다린다 말했던 이 세계의 남자주인공.
“카, 르시안.”
이제 20살이 된 카르시안이 그곳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