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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53화 (153/186)

153화

장장 5년 만에 황도 봉쇄령이 풀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간 잠들어 있던 에메르나가 드디어 깨어난 것이다.

에메르나는 깨어나자마자 시간이 5년이나 흘렀음을 깨닫고 서둘러 황도 봉쇄령을 폐지했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실 그녀는 이렇게 오랫동안 황도를 봉쇄할 생각이 아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간 제네스 황태자와 세리나 황녀는 정치에 일체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황도를 개방하는 것에는 아주 회의적이었다. 그 연유조차 밝히지 않고서.

이로 인해 민심은 손쓸 수 없이 황폐해졌으며 항간에서는 황족의 필요성에 대한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역사학자들은 에메르나 황비가 몸져누운 지난 5년간을 ‘최악의 암흑기’라 칭하였지만, 딱 한 사람만은 오명을 벗을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아론 그레이프 에멜하르트.

제네스가 황태자가 되기 위해 폐위되었던 전(前) 황태자였다.

그는 제네스와 세리나를 대신하여 황자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맡아 완벽하게 해냈다.

사실 아론은 제네스보다 더 어릴 때 황태자 자리에 있었는데, 당시에 그는 제네스는 하지 못하던 일을 척척 해내던 귀재였다.

노련한 대신들도 쩔쩔매는 에메르나를 독대하는가 하면 에메르나의 치마폭에 싸여 천지 분간 못 하는 선황제에게 쓴소리를 할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아론은 암흑기의 유일한 빛이었다.

매번 의회에 참석하여 최적의 방안을 제시했고 담합해 버린 친황비파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멜르조 운하 도시만이라도 개방할 수 있도록 힘썼다.

하지만 아론의 이러한 노력은 그저 ‘노력’에서 그치기 일쑤였는데, 그 이유는 그에게 자본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누군가와 만나 식사만 해도 빠져나가는 것이 바로 돈.

아론이 아무리 길고 난다고 하더라도 주류는 에메르나 황비였다.

물 한 줄기가 강을 뒤엎으려면 그만한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론에겐 힘이 되어 줄 돈이 없었다.

그런 시간이 지나, 기어이 황도 봉쇄령이 내려진 지 3년째.

헨델 이플란트가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라움디셀 공작이 후견하는 소녀, 라티아 라움디셀에게 약혼담을 요청했기 때문에 용의 선상에는 당연히 라움디셀 공작과 그의 명예 여식이 이름을 올렸다.

라움디셀 공작이 라티아를 끔찍이 아낀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으며 헨델은 라티아가 글라델리스일 적, 그녀의 의붓동생인 엘레네의 약혼자였기도 했기에.

또한 헨델과 라티아는 두 사람이 7세일 적 열린 황성 경매 전야 파티에서 마찰을 빚은 바가 있었다.

하여 에메르나 황비의 조카인 헨델 이플란트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라움디셀 공작 부녀가 기소되었다.

당시 판사를 맡았던 빈센트가 증거 불충분으로 두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 줬지만, 이는 제국에 아주 큰 바람을 불어왔다.

라움디셀 공작은 해상 무역로를 연 제국의 영웅이었으니까.

그런 영웅이 마땅한 증거도 없이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실제 재판까지 올랐다는 건 곧 정의와 귀족들이 부패하여 제대로 편 가르기를 시작하고 있단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제국이 이렇게 뒤숭숭한데 황태자와 황녀가 나란히 라움디셀 공작의 자녀에게 구혼하는 둥 종잡을 수 없이 굴었다.

세리나 황녀는 카르시안 라움디셀에게, 제네스 황태자는 라티아 라움디셀에게.

그 탓에 정치학자들은 에멜하르트 황가가 라움디셀을 완전히 잡아먹으려고 한다는 평을 내렸다. 이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지만.

사람들은 라움디셀이 당연히 황실과 손을 잡으리라고 생각했다.

제국의 영웅이 재판에 설 정도로 위상을 잃은 지금, 그들이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은 더욱 강력한 자와 동맹을 맺는 수밖에 없었다.

라움디셀 공작보다 더 위, 즉 황실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당시 어떤 이유에선지 아카데미와 봉쇄된 황도에서 탈출하여 라움디셀 공작령으로 향하여 검거된 카르시안이 단칼에 세리나 황녀의 약혼담을 거절한 것이다.

게다가 헨델 이플란트 살인 사건의 용의자 중 대표로 재판대에 선 라움디셀 공작이 풀려난 이후 자취를 감춘 라티아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것인지 제네스 황태자는 어느 날 밤, 군사를 데리고 공작령을 기습했다. 그런데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 있던 것처럼 대비하고 있던 트라이던트 기사단에 의해 참패하고 말았다.

대신 제네스는 화풀이로 16살의 소녀를 납치했는데, 다행히 그녀는 라움디셀 공작이 무사히 구출해 냈다고 한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제네스 황태자의 폐위를 주장하는 이가 늘어 기어이 귀족들이 궐기를 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아론이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그가 이번 황도 봉쇄령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상단들을 한데 모아 협회를 만든 것이다.

그 우두머리엔 예리엘 만물 상단이 있었는데 수장은 그루안 상단의 제2 관리자였던 티아나 아메시스트였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티아나 아메시스트가 아론 폐태자의 차명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아론이 사용하는 모든 돈은 티아나 아메시스트의 계좌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아론은 빠르게 입지를 다지며 제국민들에게 가장 큰 지지를 받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암흑기이자 격변이 생동하는 5년이 지나, 황도 봉쇄령이 폐지된 지 약 한 달 정도가 지난 오늘.

17살이 된 라티아 라움디셀의 데뷔탕트가 열렸다.

* * *

“아버지의 명령이 아니었으면 이런 곳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누가 아니래요? 저도 어머니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마찬가지예요. 그 누가 오고 싶겠어요? 살인자의 데뷔탕트를.”

수군수군, 쑥덕쑥덕.

높은 천장에 위용 있게 자리 잡은 샹들리에에서 화려한 빛이 사방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크고 작은 크리스탈 조각이 그 빛을 더욱 화사하게 난반사시키며 데뷔탕트 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이곳.

그레이트 홀에 참석한 각 귀족의 어린 자녀들을 아름답게 빛내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라움디셀 영애가 범인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예. 저도 들었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현명하며 디케 여신님이 가장 사랑하는 종, 빈센트 판사님도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더군요.”

“분명,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였다고 들었습니다.”

구석에서 샴페인을 마시는 작은 무리가 라움디셀 영애, 라티아를 두둔한 때였다.

“흥, 순진들 하시군요.”

“그렇게 단순하게 살아서 참 좋겠습니다. 적어도 머리 아플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다른 쪽에 있던 이들이 마찬가지로 로제 빛 샴페인을 들고 다가서며 이죽거렸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이에 발끈한 이들이 화를 억누르며 으르렁거렸지만 소용없었다.

“빈센트 판사가 정말로 정의롭고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렸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정말이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 분이로군. 빈센트 판사는 그 라움디셀 영애가 라움디셀 공작의 후견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그들은 일면식이 있는…… 아니, 일면식 정도가 아니겠군. 한패란 말입니다.”

“한패라고요? 그렇다는 말은 빈센트 판사가 모든 죄를 알면서도 일부러 라움디셀 부녀에게 무죄를 선고했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왜 아직도 헨델 이플란트 영식을 살해한 범인이 잡히지 않겠습니까?”

톡 쏘아붙인 소년의 말에 라티아를 두둔하던 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이들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자신들이 잔을 기울이던 곳으로 향했다.

이러한 말다툼은 그레이트 홀 곳곳에서 사사롭게 일어나고 있었다.

“정말 범인이 아니었다면 더 진즉 모습을 드러냈어야죠.”

“재판에 기소되었던 날 이후로 여태 단 한 번도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가 있을 거예요. 분명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본인이 생각하기에 떳떳하지 못했으니 그런 것 아니겠어요?”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일 거예요. 제 생각은 좀 달라요. 그게, 그렇잖아요? 라움디셀 공자가 황도 봉쇄령 때문에 아카데미에서 졸업한 후에도 공작령으로 내려오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공작성에서 즐거울 일이 뭐가 있겠어요?”

“맞아요. 그리고 이상하지 않나요? 라움디셀 공작님은 제국의 영웅이세요. 그런 분을 정확한 증거도 없이 기소부터 하다니요. 분명 누군가의 음해인 게 분명해요.”

“계속해서 안 좋은 일들만 벌어지고 있는데, 대체 누가 사교계에 마음 편히 얼굴을 비출 수 있을까요? 저라도 사교계에 발을 들이밀 정신이 없었을 거예요.”

이번엔 영애들 사이에서 불이 붙었다. 막 이야기가 나온 라움디셀 공자, 카르시안의 일로 다시 한번 말다툼의 불꽃이 피어오르려던 때였다.

후욱, 휘오오…….

조금 전까지 멀쩡히 아롱거리던 촛불과 샹들리에가 한순간에 꺼진 것이다.

“꺅!”

“아, 시작되는 모양이군.”

갑작스레 불이 꺼지는 바람에 누군가는 놀란 모양이지만 또 누군가는 익숙한 듯 보였다.

‘시작’된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주 연한 빛만 놔두고 모두 소등된 그레이트 홀의 뒤쪽에 있는 계단에만 불이 켜졌다.

녹색, 푸른색, 금색, 흰색…….

꽃잎 같은 색의 촛불이 계단의 가장자리에 순서대로 켜지더니, 그 계단참 위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긴 밀빛 머리칼은 아롱지는 불빛에 따라 다채롭게 빛났고 보라색 눈동자가 유독 영롱했다.

데뷔탕트를 치르면 성인은 아니지만 정식으로 혼인을 할 수 있기에 성인 여성이 입을 법한 연한 은색 드레스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아하게 주름졌다.

그녀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욕을 하거나 두둔을 하는 둥 입씨름을 하던 모두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분이 바로…….”

“아아, 무척 아름답게 성장하셨군요…….”

단순히 등장만으로 모두의 화합을 꾀한 이.

바로 이 데뷔탕트의 주인공인 라티아 라움디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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