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제네스가 에메르나를 향한 분노와 꺼지지 않을 증오를 태운 지는 조금 됐다.
에메르나가 레오나르도의 장례식에서 클로드와 나눈 대화를 엿들은 이후부터니까.
‘아버지를 살해한 당일 라움디셀 공작과 이어지려고 하다니.’
제 어머니긴 하지만 정말 소름 끼치는 여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나를 죽이겠단 말까지 하면서 갖고 싶나, 그 남자가?’
아론 폐태자의 복위. 그것은 곧 제네스 황태자의 폐위를 말한다. 그런데 과연 제네스가 폐위만 될까?
아론 폐태자가 무사할 수 있던 이유는 그가 황후 소생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네스는 아니다.
‘황비를 어머니로 둔 나는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거야.’
아론 폐태자가 복위되면 협소해진 루니아 황후의 입지도 회복된다. 그녀가 제네스를 살려 둘 리가 없다.
‘날 죽이면서까지 남자를 갖겠단 어머니가 날 보호해 줄 리도 없지.’
어쩌면 제네스와 세리나의 처형과 자신의 생존을 거래할지도 모른다. 에메르나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제네스는 에메르나를 사랑했다. 에메르나에게 진심 어린 사랑을 받은 적은 없는 것 같지만, 분노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손에 꼽을 테지만.
그래도 제네스에게 에메르나는 하나뿐인 어머니였다.
그러니 제네스는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으로 에메르나를 사랑했다. 그런데 에메르나는 그를 언제든지 죽여 치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라움디셀 공작을 사랑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닐 테지.’
그 말은 즉 에메르나에게 있어서 제네스는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적이 없단 소리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사랑이 증오로 바뀌어 버렸다.
에메르나가 클로드에게 연거푸 거절당하여 사랑이 증오로 바뀌었듯이, 그녀의 피를 이어받은 제네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후 제네스는 생각했다.
‘굳이 어머니와 함께 살아남을 필요는 없지.’
세상의 모든 것을 녹여 버릴 듯 뜨거웠던 용암이 식으면 결국 딱딱한 돌이 되는 법이다. 에메르나를 향한 제네스의 사랑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상황은 세리나 황녀도 다를 것 없었다.
세리나는 그림자 황녀로, 이 자리는 타의에 의해서 얻은 것이기도 하나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자의에 의한 것이다.
그녀가 소심해서, 소극적이어서, 뒤에 숨어서.
그렇다고 어둠에 잠겨 있지만은 않았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그렇다. 밝은 곳에선 하지 못할 이야기를 어두운 곳에서는 서슴치 않게 할 수 있게 된다.
하여 세리나는 볕에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이야기를 아주 많이 알고 있었다. 그중에는 에메르나가 레오나르도에게 사특한 주술을 걸어 자신에게 미치게 했고, 그를 억지로 취하여 제네스를 가졌다는 진실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루니아 황후가 사산한 딸의 대체품이라는 것도.’
과거에 딱 한 번, 에메르나가 레오나르도의 정신을 장악했던 주술이 풀린 적이 있었다. 원인은 모른다.
‘그날이 루니아 황후 폐하의 생일이어서 그랬던 건지, 황후 폐하께서 황제 폐하의 앞에서 제발 돌아와 달라고 울다 쓰러져서 그랬던 건지, 그도 아니면 어린 아론 황자가 황제 폐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매달려서 그랬던 건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나, 그때 레오나르도는 제정신으로 돌아왔고 루니아와 함께 밤을 보냈다. 다시는 루니아를 홀로 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러나 그 다짐도 결국엔 에메르나가 더욱 강력하게 덧씌운 주술에 사라져 버렸다. 물론 그의 다짐은 루니아 속에 남았다.
‘새로이 잉태한 생명, 두 사람의 둘째이자 아론 황자의 여동생으로.’
하지만 그 아이를 두고 볼 에메르나가 아니었다. 에메르나에게 루니아의 딸은 주술이 풀렸던 밤의 치욕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소문에 따르면 한 대신관이 루니아 황후에게 지금 배에 품은 딸이 모든 슬픔을 걷어가 줄 귀인이라는 신탁을 내렸다고 했어.’
그것을 에메르나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에메르나는 루니아의 딸을 해칠 계획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에메르나의 술수에 휘말린 루니아는 허무하게 딸을 사산했다.
레오나르도의 다짐이 깨진 탓일까?
루니아의 몸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고 레오나르도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일도 더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 다짐했던 순간이 사라진 건 아니어서, 레오나르도는 습관처럼 딸을 찾았다.
에메르나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는 황후궁 근처를 돌았고, 날이 갈수록 어린 여자아이들을 물끄러미 보는 날이 늘었다. 위기감을 느낀 에메르나는 기어이 딸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래, 세리나는 만들어졌다.
‘딸’이 될 수밖에 없게 마법으로 유전자를 조작하여 에메르나는 그것을 잉태했다. 그러니 세리나는 실제로 레오나르도의 딸은 아니었던 것이다.
에메르나는 세리나를 낳고 방치했다. 때때로 관심을 주기도 했지만 그건 세리나가 ‘필요할 때’였다.
‘그마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누굴 닮아서 이러냐고 나를 혼내셨지.’
세리나의 입가에 싸늘하고도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매가 제 친모인 에메르나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남매는 싫으나 좋으나 어쩔 수 없이 에메르나의 핏줄이었다.
저들에게 필요한 이들은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 이용하는 재주를 가졌다.
그리고 오늘 두 사람은 대화 끝에 의기투합을 했다.
누군가는 세리나더러 배알도 없냐고 욕할지 모른다. 그녀가 뒤에 있는 동안 제네스는 빛 속에 있었으니. 하지만 세리나는 알고 있다. 빛이 사라지면 그림자도 사라진다는 것을.
‘오라버니가 폐위되어 죽으면 나도 당연히 죽겠지.’
이제 와서 에메르나가 세리나를 살리려고 하진 않을 테니까.
살기 위해서 남매는 서로와 똘똘 뭉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적이 낳아 준 하나뿐인 아군인 셈이다.
세리나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글쎄. 하나씩 해 볼까 해.”
“하나씩이요?”
“그래. 생각해 봐. 어머니는 라움디셀 공작을 갖기 위해 우릴 버릴 계획을 하고 있어.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해 줘야지.”
“그 말은…….”
“너, 라움디셀 공자에게 마음이 있지?”
제네스의 말에 세리나가 덜그럭거렸다. 이것만큼은 그에게 밝히지 않은 세리나의 약점이었다. 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제네스의 입가엔 악동 같은 미소가 걸린 후였다.
“뭘 숨기고 그래. 너의 그 마음이 주역인데.”
“…….”
“네가 가져.”
“…….”
“어머니가 클로드 라움디셀을 갖지 못하도록, 네가 카르시안 라움디셀을 가져.”
“…….”
“사돈하고는 결혼할 수 없을 테니까.”
씩 웃는 제네스의 얼굴은 결코 귀족들이 입을 모아 떠들어 댄 멍청이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오라버니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텐데요.”
달그락, 찻잔을 내려 두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에메르나와 꼭 닮은 세리나의 눈동자에 욕망이 득실거렸다.
카르시안 라움디셀을 갖는다는 말 한 마디에 완전히 잠식된 모습은 정말로 클로드를 갖고 싶어 미쳐 버린 에메르나와 꼭 닮아 있었다.
“넌 정말로 어머니와 닮았구나. 라움디셀 공자가 가지고 싶어 미치겠으면서 나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고 억누르며 상대를 간파하려는 모습까지도 똑같아.”
소름이 끼칠 정도야. 제네스의 말에 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험담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제네스가 의자에 몸을 깊게 묻으며 말했다.
“무슨 상관이야? 라티아는 진짜 라움디셀이 아닌데.”
“……아.”
“성인이 되면 라티아는 라움디셀 가문에서 나올 거야. 글라델리스의 성도 잃었으니 기껏해야 졸부 평민이겠지. 라움디셀 공작과 명예 부녀란 소리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명예’잖아? 아무 상관 없어.”
제네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언제 방만하게 늘어졌냐는 듯 튕기듯 상체를 일으켜 테이블 쪽으로 확 기울였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세리나의 얼굴 앞에서, 제네스가 섬뜩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우린 꿩 먹고 알 먹으면 되는 거야. 어머니를 죽인 후 나는 라티아를 가지고.”
“저는 라움디셀 공자를 가지고.”
뒤따른 목소리는 세리나의 것이었다. 그녀 또한 언제 무표정이었냐는 듯 제네스와 닮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매가 손을 잡았다.
결코 십대들의 대화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얼굴은 사이좋은 남매처럼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그날 저녁, 세리나는 어둠이 드리워진 복도를 조용히 걸어갔다. 발소리조차 없는 그녀의 걸음이 닿은 곳은 쓰러진 에메르나가 있는 곳, 황비궁이었다.
스으윽…….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에메르나가 쓰러진 것은 정말인지, 그녀는 파리한 얼굴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레오나르도와 클로드에게 걸었던 사술이 풀려, 그 충격을 고스란히 되받은 탓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세리나는 그런 에메르나의 곁으로 다가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황도를 봉쇄해 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우리가 움직이기 수월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편안히 쉬세요.”
세리나의 손이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에메르나의 입을 조금 벌려 어떠한 액체를 먹였다. 깊게 잠든 에메르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액체를 전부 다 받아먹었다.
세리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문가로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당분간이지만요.”
달칵, 문이 닫히고 에메르나의 방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적요하기 짝이 없던 방 안에 고른 숨만 퍼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