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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50화 (150/186)

150화

이 상황은 라티아에게도 좋지 않았다.

‘공작님이 무역을 떠나지 못하게 된 건 좋아!’

라티아는 솔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에메르나 황비에게 한 방 크게 얻어맞은 건 싫어!’

무엇보다 지금 봉쇄된 황도에 갇힌 카르시안이 걱정되었다. 그리고 루니아와 아론의 안부도.

‘황도가 봉쇄됐단 뜻은 교류가 안 된다는 소리야.’

수를 찾아보면 개구멍 정도는 있겠지만, 루니아의 건강을 회복시키고 있는 바람개비 꽃 뿌리를 자주 옮겨 줄 수는 없을 터.

‘게다가 무려 황도 봉쇄야. 역대 황제들 중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말도 안 되는 일이자, 막무가내인 행동이라고!’

그런데 그걸 황제도, 황후도 아닌 황비가 해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대체, 에메르나 황비는 어떻게, 언제 이렇게 세를 불린 거지? 역대 황제들에 버금갈 정도로!’

에메르나 황비가 하이페디움 제국을 제대로 장악하고 있는 실세나 다름 없단 소리다.

라티아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레오나르도 황제가 붕어한 이후 잠잠하다 했더니, 사실은 물 밑에서 세를 불리고 있던 거구나!’

어쩌면 클로드에게 독을 먹인 이유도 시선을 돌리려고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라티아는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제발요! 이렇게 허비할 시간이 없다는 거, 공작님도 아시잖아요!”

버틀러와 수잔이 라티아를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라티아는 필사적이었다. 이대로 또 잃을 수는 없었다.

라티아의 눈에는 잔상이 겹쳐지고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사냥대회에서 죽었단 이유로 숲속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레오나르도가 연상됐다. 그런데 그의 얼굴엔 클로드의 얼굴이 덧씌워져 있었다.

‘레오나르도 황제 폐하를 해친 사람은 에메르나 황비야. 공작님까지 해치게 놔둘 순 없어.’

황도를 봉쇄한 것에 불만을 가진 귀족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반항하는 자를 얌전히 놔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가 카르시안이라고 놔둘까!

라티아의 주먹이 붉어졌을 즈음.

벌컥!?

문이 열렸다. 라티아는 문에 기대 있었기 때문에 휘청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런 그녀를 받친 이는 다름 아닌 클로드였다.

“마중물이라고 했나?”

헉, 허억. 라티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런 라티아를 안아 올린 클로드가 말했다.

“마중물 치고는 꽤 금액이 크지만 그거 가지고는 안 돼.”

마주 본 클로드의 얼굴은 언제 야차 같았냐는 듯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라티아는 거기에 안심했다.

후, 라티아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뇨. 제가 말씀 드린 금액은 갱신 전의 금액이에요. 이젠 달라졌을 거예요. 지금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제 통장엔 돈이 쌓이고 있거든요. 공작님과 달리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이요.”

아, 이 얼마나 맹랑하면서도 든든한 말인가.

생각해 보면 신기했다. 막다른 곳은 항상 존재했다. 라티아도 때때로 벽에 부딪쳐 가로막힐 때가 있었다. 하지만 라티아는 항상 대비를 하고 있었고 제때에 적당한 수를 떠올려 해결했다.

그렇게 클로드를 도운 게 몇 번, 라티아는 지금도 그를 돕고 있다.

클로드는 피식 웃어 버렸다.

‘아이샤, 신기한 일이야. 어떻게 매번 이렇게 길이 보이는 건지 모르겠어.’

그는 오래 전 떠나보낸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며 라티아와 함께 망가진 집무실을 나섰다.

새로운 미래를 이야기할 장소는 새로운 곳이 나을 테니까.

* * *

에메르나 황비가 쓰러졌다.

루니아 황후의 알 수 없는 병증에 이어 레오나르도 황제가 서거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모두들 황성에 저주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고 쑥덕거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좋겠습니까?”

“저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루니아 황후 폐하께선 아직 자리를 보전하고 계시지, 에메르나 황비님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지, 제네스 황태자 전하께선…….”

누군가가 중얼거린 말에 다들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네스는 황제의 재목이 아니란 뜻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에메르나가 황도를 봉쇄해 버렸다. 아무리 수렴청정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최고 결정자는 황태자인 제네스다.

황도를 봉쇄하고 멜르조 운하 도시를 함께 닫는 것이 얼마나 큰 사안인지 알면서도 에메르나의 뜻에 반발하지 않은 그 제네스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모르는 걸지도 모르지.’

정무는커녕 정세에 관심조차 없는 제네스라면 필시 그러할 터.

앞으로 이 나라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에메르나의 폭정은 벌써부터 원로 귀족의 의견을 묵살하고 귀족들의 항의에도 꿋꿋하게 황도를 닫아 버리는 데에 이르렀다.

이를 달리 말하면 황도에 있는 귀족들을 독 안의 쥐로 만들어, 황도 밖에 있는 귀족들에게 협박할 인질로 삼은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에메르나와 제네스에 대한 여론이 고울 턱이 없었다.

그때 함께 시름에 빠진 한 사람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아론 황자는 어떻습니까?”

“아론 황자 저하 말씀입니까. 듣기로는 계속해서 문무에 정진하여 오러를 발현시켰다더군요.”

“정말 대단하시군요. 마땅한 스승이나 가르침도 없었을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최근 황도에서 가장 골머리를 앓던 고리대금 업자를 모조리 축출한 데에 큰 공을 세운 데볼락 단장 말입니다. 사실은 그의 뒤에 아론 황자 저하가 계시단 소문이 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하긴, 데볼락 단장과 아론 황자 저하는 유독 각별한 사이였죠.”

“아직도 제네스 황태자 전하께선 아론 황자 저하가 황태자 시절에 이뤘던 것들의 절반도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네. 맞습니다. 정무 회의에 참관하기는커녕 에메르나 황비님이 외우라고 시킨 것조차 다 말하지 못하는 형국입니다.”

“말세네요. 아론 황태자…… 아니. 황자 저하는 병으로 쓰러진 루니아 황후 폐하의 도움도 없이 에메르나 황비와 대등하게 대담도 했는데.”

다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제네스의 턱없이 부족한 능력치만 부각될 뿐이었다.

“세리나 황녀는…….”

“말해서 입만 아프지요.”

“에메르나 황비님이 황도를 봉쇄하겠다 선언했을 때 몇몇의 대신들이 세리나 황녀 저하를 찾아가 에메르나 황비님을 만류해 달라 일렀으나 소용없었답디다.”

“듣기로는 ‘어머니가 다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라며 황녀궁에서 내쫓고 문을 닫아걸었다더군요.”

어쩜 남매가 이렇게 쌍으로 정치에 관심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관심이 없으니 능력이 없는 건 당연했고.

귀족들은 모두 망명이라도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삼켰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생각만큼 제네스와 세리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오라버니?”

“뭐를 말이야?”

“어머니께서 쓰러지셨잖아요. 오라버니를 대신해서 정무를 봐주실 어머니께서요.”

“글쎄, 난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는데.”

세리나 황녀가 문을 걸어닫았다는 황녀궁 안에는 황태자, 제네스가 있었다.

아니, 앞뒤가 바뀌었다. 제네스 황태자가 황녀궁에 있었기 때문에 세리나가 문을 걸어 잠근 것이다.

‘날 좀 숨겨 줘. 지긋지긋한 대신들이 나더러 사정사정을 해서 귀찮아 죽겠으니까.’

불쑥 찾아온 제네스가 그렇게 말했다. 처음 세리나는 그대로 제네스를 내쫓으려고 했지만 조금 생각해 보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나와 언제부터 그렇게 살가운 남매사이였다고.’

볼일이 없으면 찾지도, 아니. 볼일이 있어도 굳이 직접 오지 않던 이가 세리나의 오라버니, 제네스였다.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나타나 ‘숨겨 달라니.’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겠지.’

해서, 세리나는 제네스를 숨겨 주고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밖에서 이 남매를 한심하게 여기는 귀족들은 생각조차 못 할 아주 은밀한 대화를.

“자업자득이라뇨? 어머니께서 쓰러지신 게 어머니의 탓이라는 건가요?”

“그래. 왜 아니겠어? 사술을 그렇게 써 댔으니 당신 몸에도 무리가 간 거겠지.”

싸늘한 말에는 비소가 걸려 있었다. 도무지 저를 배 아파 낳은 친모를 대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제네스가 이런 패륜적인 말을 하고 있는데도 놀라지 않는 세리나였다.

“이상하네요. 사술이 풀리지 않으면 시전자의 몸은 멀쩡할 텐데요.”

그녀는 마치 에메르나가 사특한 주술을 부리고 있단 걸 일찌감치 알고 있던 것 같았다. 놀라는 것은 제네스였다.

“뭐야, 알고 있었어?”

“오라버니께서도 아시는 걸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제네스에 비해 비교적 어두운 곳에 있는 세리나의 안광이 번뜩거렸다. 그 모습은 꼭 에메르나와 닮아 제네스는 오싹해졌다.

“세상은 절 그림자 황녀라고 부르지만 글쎄요.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없을 수 있나요. 제아무리 강렬한 빛이라 하더라도 결국 틈은 있는 법인데.”

우훗, 하고 웃는 소리마저 에메르나가 속살일 때와 똑같아서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모전여전이라더나.’

정말 그 어미에 그 딸이었다. 하지만 제네스는 그런 세리나를 비난할 수 없었다.

“역시 넌 어머니의 딸이야.”

비록 아비는 다를지 모르더라도 세리나의 몸엔 에메르나의 피가 흐른다. 그리고 제네스의 몸에도 에메르나의 피가 흐른다.

“정신 나간 게 나와 아주 똑같아.”

제네스가 잔인하게 웃었다. 부릅뜬 눈이 굉장히 형형했다. 남매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녹색과 푸른색, 전혀 다른 색의 눈동자엔 같은 생각이 담겨 있었다.

아, 이 세상에 가장 든든한 아군을 낳아 준 어머니를 어떻게 치워 버릴까.

생각만 해도 아주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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