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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49화 (149/186)

149화

방으로 돌아오자 앤이 기다렸다는 듯 편지를 줬다. 정말 긴급한 편지였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걱정이 되었다. 난 자리에 앉기도 전 얼른 편지부터 열어 봤다. 그런데 편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여상한 인사로 시작되었다.

장장 여섯 장에 달하는 내용의 필체는 조금도 위험하거나 다급해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난 우선 첫 장을 읽으며 책상으로 향했는데, 그때 팔랑.

“……?”

편지지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아가씨, 여기요.”

앤이 주워 준 것은 자그마한 쪽지였다. 노트를 찢은 것 같은 쪽지인데, 거기에 이 편지가 급하게 부쳐진 이유가 적혀 있었다.

[에메르나 황비가 쓰러졌어. 당분간 황도가 봉쇄될 예정이야. 다시 연락할게.]

“세상에……!”

난 탕 소리 나게 책상에 카르시안이 준 편지를 내려 두고, 큰 소리에 깜짝 놀란 메리와 앤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공작님께 집무실로 와 달라고 전해 줘! 난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당황한 앤을 데리고 메리가 잽싸게 빠져나갔고, 나는 황급히 시엘, 셀트론과 바로 이어지는 통신구를 들고 집무실로 달려갔다.

내가 클로드의 집무실에 통신구를 내려두자, 마침 앤과 메리가 돌아왔다.

“공작님을 모셔 왔습니다!”

“라티아, 무슨 일이냐!”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클로드의 뒤를 따라 헥터가 들어왔다. 난 그 시엘과 셀트론에게 통신을 연결하며 말했다.

“비상이에요. 이러다간 공작님이 투자해 둔 장기사업이 몽땅 망할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늘 평정심을 잃지 않던 클로드가 드물게 동요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이제 막 연결된 통신기의 앞에 선 내 어깨를 잡아챘다.

그리고는 저를 똑바로 보게 하며 말했다.

“무슨 상황인지 나에게 먼저 제대로 설명해. 카르시안의 편지에 뭔가가 있었나?”

“네, 있었어요. 에메르나 황비님이 쓰러졌대요. 그래서 한동안 황도가 폐쇄될 예정이래요!”

“……!”

“그런……!”

내 말에 헥터와 메리가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지 모르는 앤은 어리둥절해 보였지만, 그녀에게 설명해줄 시간이 없었다.

난 클로드에게 어깨를 붙잡힌 채 통신구 너머에서 나를 찾는 시엘과 셀트론에게 말했다.

“상황은 얼추 알아요. 에메르나 황비님이 황도를 폐쇄한다고요. 그럼 멜르조 운하 도시는 어떻게 되나요?”

―“그것이…… 아마도 함께 봉쇄될 듯싶습니다.”

―“미치겠네, 정말! 거길 봉쇄하면 어쩌자는 거야. 쇄국이라도 하자는 건가?!”

셀트론이 우물쭈물거리자 시엘이 분통을 터트리며 외쳤다. 쇄국, 그 단어에 클로드의 표정은 차갑고 싸늘하게 가라앉아 버렸다.

멜르조 운하 도시.

황도의 바로 옆에 있으며 미관과 안전상의 이유로 황도에 내지 않은 운하를 모두 떠안은 도시. 거대 선박이 통과되는 대운하는 물론이고 내수 교역로도 이 멜르조 도시를 중심으로 뻗어 나간다.

황도에 들어가는 모든 물건은 먼저 멜르조에 도착한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모든 교역의 중심지란 소리였다.

그러니 이 멜르조 운하 도시가 함께 봉쇄된단 소리는 무역은 물론, 교역 자체가 끊긴단 소리다.

“안 돼.”

짐승처럼 사나운 목소리였다. 출처는 클로드일 게 뻔했고.

클로드는 모두 장기적인 투자로 승부를 보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사업은 다름 아닌 무역사업이었다. 해상 무역로를 개척한 제국의 영웅이니 당연한 행보였다.

그런데 해외 무역도 결국은 국내 무역로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클로드가 가진 라움디셀 상단의 가장 큰 창고는 멜르조 운하 도시에 있었다.

그런 멜르조 운하 도시가 황도의 봉쇄와 함께 닫힌단 말은.

“언제, 정확히 언제 닫히는 거지?”

―“황도의 성문은 벌써 봉쇄가 되고 있습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퍼진 사실이라서, 다른 상단들의 물건은 물론 황도에 사는 이들도 아직 탈출하지 못했다더군요.”

클로드가 뿌려 둔 사업이 완전히 막힌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불어 황도의 아카데미에 있는 카르시안이 완벽한 인질이 되고!

“……젠장!”

쾅!

클로드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원목으로 된 집무실 책상을 내리쳤다. 내가 옆에 있는데도 이렇게 분노하다니,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우지끈!

그 단단하던 책상이 무너지며 그 위에 쌓여 있던 서류들이 나풀거리며 떨어졌지만, 아무도 그것을 걱정할 수 없었다.

모두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쩡 얼어붙은 채였으니까.

그 속에서 클로드 홀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나직한 비소를 터뜨렸다.

“……하.”

늘 인자하고 나른하던 붉은색 눈동자가 지금은 그저 살의로 번뜩거리기만 했다.

“제대로 물먹었군.”

그 목소리는 또 얼마나 서늘한지!?

분노의 대상이 내가 아니란 걸 알고 있는데도 등골이 서늘하여 오한이 들 정도였다.

대충 머리를 쓸어넘기던 클로드가 세로로 흉이 난 눈가를 매만졌다. 그러며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억양이 강하고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아하니 욕설일지도 모르겠다.

“이크.”

그러한 클로드를 보던 헥터가 나를 황급히 뒤로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메리에게 넘겼고, 메리와 앤은 나를 데리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앗, 잠깐…….”

“아니에요. 아가씨. 이렇게 하셔야 해요.”

내 말에 메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닫히는 집무실 문틈 사이로 보인 클로드의 눈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완전히 돌아 버린 눈.

그 말이 절로 생각날 정도로.

* * *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

연달아 세 개비를 태운 클로드가 매캐한 연기 때문에 칼칼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연기를 얼마나 들이켰는지 늘 안광이 형형했던 눈동자가 잔뜩 풀려 있었다.

그 옆에서 클로드 못지않게 쉬지 않고 담배를 피워 댄 헥터 또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를 리가 있냐. 네 녀석이 그렇게 설치고 다니는데. 황도엔 몰래 갔다 하더라도 세리나 황녀가 왔을 때도 자리를 비웠고, 대신전까지 다녀왔는데.”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클로드의 탓이 있다고 힐책하는 소리였다. 그에 늘어진 클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클로드가 긴 다리로 테이블을 밀어 쓰러뜨리자 나무다리가 부러지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식으로 클로드가 모든 가구를 망가뜨린 탓에 집무실은 완전 난장판이었다. 그만큼 클로드가 이성을 잃었단 소리였다.

‘젠장, 아직 안 풀린 건가. 하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에메르나 때문에 전 재산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 누가 제정신이겠어.’

예전에 어쩌다가 한 번, 클로드는 헥터에게 에메르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를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아이샤와 결혼한 저를 미워해 아이샤의 가문과 라움디셀 백작가를 수렁에 빠트렸단 이야기를.

에메르나 때문에 앓게 된 가난으로 클로드는 죽을 각오를 다지고 바다로 향했다. 말 그대로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겨 돌아와 다시 라움디셀 가문을 부흥시켰는데, 또다시 에메르나가 방해를 하려고 한다.

‘미칠 노릇이겠지.’

헥터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뭐,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방법을 쓸 줄은 몰랐지만.”

이런 방법이라 함은 황도를 봉쇄하고 멜르조 운하 도시를 폐쇄한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황좌가 비어 있다고 여우가 호랑이 노릇을 다 하는군!”

헥터가 필터를 짓씹으며 말했다. 레오나르도가 제아무리 황비의 치마폭에 싸여 지내던 황제라 하더라도 황도와 운하 도시를 막겠다는 에메르나의 손을 들어 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 사태는 에메르나가 완전히 황권을 장악했단 소리나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클로드가 무역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단 사실은 제국민이라면 다들 아는 내용. 이런 상황에서 ‘무역’에 정확히 타격을 줄 만한 일을 벌이다니, 이건 클로드를 저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책은?”

“없어.”

헥터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클로드는 짓씹듯이 대답했다.

“에메르나 황비가 진짜로 쓰러진 건지도 불확실한 상황인데, 황도가 닫혔으니 황후 폐하와 접촉할 방법조차 없어. 그런데 대책은 무슨 대책.”

클로드의 냉랭한 말에 헥터가 부스스한 백발을 마구잡이로 털어 댔다. 손가락에 궐련을 끼고 머리를 터느라 재가 이리저리 흩뿌려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의 일만 계속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 봐야 답은 없었지만.

클로드가 여섯 개째 개비에 불을 붙였을 때였다.

“공작님, 공작님!”

“아가씨, 안 돼요!”

“아가씨 오늘은 부디 돌아가 주세요.”

아까 메리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던 라티아가 돌아왔다. 안의 상황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수잔과 버틀러가 그녀를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이 상황이 되어서도 코 묻은 돈을 사용하지 않으실 건가요? 마중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잖아요!”

라티아가 클로드 못지않게 까칠한 목소리로 외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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