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그날 밤.
라티아에게서 하인리드의 말을 전해 들은 클로드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검지와 중지 사이엔 얇은 궐련이 끼워져 있었는데, 한 모금도 빨지 않은 듯 입을 대는 부분은 깨끗했다.
“신탁……이라.”
라티아의 어머니가 친모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생아니까 레이시나가 친모일 리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클로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신탁, 신탁이란 말이지…….”
매캐한 연기 탓인지, 서늘하고 칼칼한 목소리였다.
라티아는 단 한 번도 신탁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하니, 하인리드가 후회한다는 신탁은 다른 이에게 내린 것일 터.
그렇다면 대체 누구에게 내린 신탁을 후회한다는 걸까?
클로드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긴 채로 한동안 정리해서 닫아 뒀던 머릿속의 서랍을 열었다.
깨끗한 밀빛 머리칼, 보라색 눈동자, 유독 닮은 어린 시절의 모습.
‘라티아가 어린 동생 같아 눈에 밟힌다며 먼저 안부를 묻는 아론 폐태자, 레오나르도 황제가 세상을 뜨던 날 죽지 말라며 겁에 질려 아빠를 찾던 라티아, 세리나 황녀가 있음에도 라티아를 두고 딸을 그리던 레오나르도 황제.’
그리고…….
‘과거, 신탁 때문에 딸을 사산한 적이 있는 루니아 황후.’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건 안다. 하지만 과연 이 모든 게 그저 우연일까? 우연도 계속해서 중첩되면 운명이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윽.”
클로드는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생각을 하다 화끈한 통각을 느끼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궐련이 끝까지 타 있었다.
근처 재떨이에 다 타 버린 궐련을 던진 클로드가 약한 화상을 입은 손가락을 가볍게 물었다. 여전히 그의 머릿속엔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결론이 나진 않겠지.”
중얼거린 클로드는 곧장 불이 꺼진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재떨이에 던져져 제대로 꺼지지 않은 궐련에서 희미한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이어지다 사라졌다.
* * *
“신전에 가셨다고요?”
이튿날 아침, 난 하품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클로드의 행선지에 대해 들었다. 뜻밖이었다.
“괜찮으시대요?”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난 몸이다. 그 몸으로 황도에 이어 신전까지,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나?
그뿐만 아니라 에메르나가 해독되었단 사실을 알면 또 어떤 수를 쓰려고 할 텐데, 아직 이에 따른 대비가 되지 않았다.
“공작님께선 워낙에 튼튼하시니까요.”
“혹시 몰라 헥터 장군과 함께 했으니 괜찮을 거예요.”
메리와 앤이 세숫물을 준비해 주며 말했다.
나도 클로드를 믿기는 하지만, 아직 그는 ‘어떤 방법으로’ 중독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지 못한 상태다.
달리 말하면 또 같은 방법으로 당할 수도 있다는 건데…… 정말 괜찮은 거 맞나?
바람개비 꽃 뿌리라는 대항 방법이 있다고 하지만, 한 번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으니 다른 독으로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
원작에 나오지 않은 방법이면 나도 손 쓰기 힘든데…….
이런저런 생각과 걱정을 하며 오전 시간을 보낸 때였다.
“공작님께서 돌아오셨대요!”
메리가 반가운 소식을 전해 줬다.
대신전엔 대체 왜 갔던 건지 여쭤봐야지!
난 읽던 책에 갈피를 꽂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헥터와 함께 현관으로 들어오고 있는 클로드의 뒤로 하얀 망토가 나부꼈다. 대신전에 가는 것이니만큼 예복을 입었던 모양이다.
“공작님!”
내가 계단참에서 반갑게 부르자, 클로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어?”
클로드는 나를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생각이 읽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겠는 건 아니다.
지금 날…… 피했어?
클로드가 나를 피했다. 정확히는 내 시선을.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데.
“큼, 큼!”
어느새 다가온 헥터가 내 머리 위에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희번득한 노란 눈으로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처음부터 겁나지도 않았고 이젠 무척이나 익숙해진 얼굴이지만 이렇게 빤한 시선을 보니,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
난 가만히 헥터가 말을 하길 기다렸는데, 사람들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닌 모양이다.
“잠시 따라와라.”
나를 이렇게 따로 부르는 것을 보아하니 말이다.
힐끔 돌아본 클로드도 마침 날 보고 있어 순간 눈이 마주쳤다.
“!”
하지만 클로드는 곧장 고개를 돌려 버렸다.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은 것 같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헥터가 얼른 따라오라며 먼저 등을 돌렸다.
난 고개를 돌린 클로드를 한 번 보고 헥터를 따라 정원의 오랑제리로 향했다.
“흠, 뭐. 음…… 우리 둘이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건 거의 처음이지?”
“어…… 네. 맞아요. 그럴 거예요.”
다른 곳에서라면 몰라도 오랑제리에서 과일 에프터눈 티 세트를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 맞았다. 난 헥터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찻잔의 손잡이를 아슬아슬하게 잡는 걸 지켜봤다. 꼭 아이의 장난감을 다루는 것 같다.
저러다 손잡이가 부러지겠어.
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름의 예법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헥터가 좋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보는 사람이 없기도 했고.
내가 스콘을 하나 다 먹었을 무렵, 헥터가 말했다.
“그, 뭐…… 흠. 우리가 대신전에 다녀왔다는 건 알고 있겠지.”
“아, 네. 이야기 들었어요.”
“그래, 사실은 말이다. 뭘 좀…… 확인하려고 다녀왔던 거야. 그, 너한테 그 말을 한 대신관 말이다.”
“하인리드 대신관님이요?”
“맞아. 그 사람. 음, 그 사람이 네게 후회한다 말했던 신탁이 무엇인지 알아보러 갔던 건데.”
“앗, 정말요? 치사해요!”
난 볼을 부풀렸다.
“그런 거라면 저랑 같이 가시면 좋았을걸요!”
나도 당사자이고, 클로드와 함께 조사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것 아닌가!
내가 토라진 듯 말하자 헥터가 비지땀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 난, 난 선택권이 없었어! 새벽에 갑자기 클로드 놈, 아니. 공작님이 찾아와서 같이 가자고 했다고!”
적잖이 당황했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퍽 위협적이었지만 난 아무래도 좋았다.
아씨, 이렇게 빨리 움직이실 줄은 몰랐는데!
무역을 가는 걸 막기 위해 던진 미끼를 꽉 문 건 좋은데, 그걸 바로 해결하려 들 줄이야!
클로드의 성격상 보다 신중하고 천천히, 나와 알아보려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간 클로드를 잘못 알고 있던 걸까?
아니, 공작님이 이렇게 유독 일 처리를 재빠르게 할 때가 있잖아.
그건 바로 짚이는 구석이 확실할 때.
……그렇단 말은 공작님은 왜 하인리드 대신관님이 내게 친모가 가짜라고 말했고, 신탁을 후회한다고 말했는지 알고 계신단 건가?
어제 클로드는 내게 신탁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난 당연히 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클로드는 생각에 잠겼다.
난 그가 생각에 잠긴 이유가 ‘그렇다면 하인리드는 대체 누구에게 내린 신탁을 후회한다고 말한 걸까?’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하인리드가 후회한다는 신탁을 내린 이를, 이미 알고 있는 거라면?
그래서 그걸 확인하고자 오늘 대신전으로 향했던 거라면?
내 생각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는 와중, 헥터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안, 안 궁금하냐?”
“네?”
“우리가 대신전에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
“왜 아까 클로드가 네 시선을 피했는지.”
아, 헥터도 알고 있었구나.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왜 클로드가 아니고 내가 하고 있는 건지.”
난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긴장해서 입 안이 다 바싹 말랐기 때문이었다.
헥터는 그런 날 가만히 보다 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운은 다 떼놨으나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뭐라고 대답을 좀 했을 텐데, 오늘따라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용기 내어 입을 벌린 때.
“자.”
헥터가 테이블 위로 뭔가를 올렸다. 아직 그가 초상화를 손바닥으로 덮고 있어 그 초상화 속 인물이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이건…… 초상화?”
그건 누군가의 손바닥만 한 복제 초상화였다. 복제된 지 시간이 지나 색이 조금 바라긴 했지만 그래도 관리가 아주 잘된 듯했다. 복제품마저 관리가 잘되는 이의 초상화는 드물었다.
아주 고위 귀족이거나 소중한 사람의 초상화거나.
하지만 헥터가 제게 귀한 이의 초상화를 내게 대뜸 줄 리가 없으므로, 전자일 확률이 높았다.
난 여전히 헥터가 손으로 가리고 있는 초상화 끄트머리를 보며 단서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날 보던 헥터가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걸 보면 알 거다.”
“뭐를요?”
“전부 다.”
아까부터 스무고개 놀이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최종장에 왔다니, 뭐…….
내가 고개를 끄덕였고, 헥터가 손을 치우려던 때였다.
“라티아!”
아까 나를 피했던 클로드가 다급히 달려왔다. 그리고는 손을 치우려는 헥터의 손바닥을 쾅 내리쳤다.
“으악! 무슨 짓이야!”
그 바람에 헥터는 클로드의 커다란 주먹에 손등이 눌려 버렸다. 헥터가 간신히 욕을 삼키며, 그러나 눈으로는 선명하게 욕을 하며 클로드를 흘겼다.
클로드는 급히 달려온 모양인지 숨을 조금 헐떡거리고 있었다.
“공작님?”
“그, ……아. 그래. 카르시안한테 편지가 왔더군.”
“아, 그래요? 헥터 장군님과 하던 대화만 마저 하고 가서 확인을―”
“급한 편지야.”
“급한 편지요?”
“그래. 그러니까 어서 가서 확인해 봐. 마침 나도 헥터에게 볼일이 있었거든. 그러니까 음, 서로의 볼일을 보고 다시 만나면 되겠군.”
클로드는 막무가내였다. 하지만 그런 클로드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어쩐지, 나의 감도 지금은 클로드의 말을 따르는 게 좋다고 웽웽 울어 대고 있었다.
“알았어요. 그럼 일단 카르시안의 편지부터 보러 갈게요.”
난 클로드와 헥터에게 인사하고 곧장 방으로 향했다. 그런 나의 뒤에서 “어쩌자고!”,
“아직은 아니야.” 하고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문 모를 소리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