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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47화 (147/186)

147화

이튿날, 라티아가 클로드를 찾았다.

“어제 황후 폐하는 잘 만나고 오셨나요?”

“아, 그래.”

내심 라티아의 얼굴을 보는 게 걱정되었던 클로드였지만, 라티아는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다.

마치 끙끙 앓고 있던 마음의 짐을 덜어 내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다.

‘뭐든 나아졌으면 다행이지만…….’

사실 클로드는 밤새 생각해 봤다. 왜 라티아가 카르시안을 좋아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건지. 대체 그게 왜 클로드에게 미안한 일인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군.’

답이 없는 문제를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심정인 클로드를 뒤로한 채, 라티아는 개운하고 상쾌한 얼굴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황성에선 별다른 움직임은 없대요?”

“음, 다행히도.”

사실 세리나 황녀가 왔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라 황급히 돌아오느라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마차에 타기 전, 루니아가 짧게나마 자신은 안전하고 평화롭다 말한 걸로 미루어 보아 아직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래, 아직은.’

하지만 클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소문이 슬슬 퍼지고 있으니 앞으로 어떨지는 또 모르는 일이었다.

“이상하네요. 사실 전 어떤 움직임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거든요.”

라티아가 심란한 얼굴로 혼잣말하듯 말했다. 클로드는 그런 라티아의 눈치를 봤다.

‘어제 카르시안을 좋아해서 미안하단 이유로 엉엉 운 아이가 맞나……?’

어젠 제 감정을 주체할 줄 모르고 상가 바닥에 누워 떼를 쓰던 아이 같았는데, 지금은 또 평소의 라티아다. 너무도 어른스러워서 때때로 그녀가 이제 막 12살이 된 아이라는 걸 잊게 하는 라티아.

평소 같았으면 ‘본인이 괜찮으면 괜찮은 거겠지. 라티아가 애도 아니고.’ 하고 그녀를 믿었겠지만, 어제 본 것이 있기 때문일까?

‘물어볼까? 아니야? 기다려?’

지금은 라티아가 걱정되어 어쩔 줄을 모르겠다.

클로드가 좀처럼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 보이자, 라티아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공작님?”

“어, 음? 왜 그러지?”

“아뇨……. 오늘 좀…… 피곤하신 것 같아서요.”

라티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간밤 라티아에 대해 계속 생각하느라 한숨도 자지 않았으니 피곤한 게 당연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몸이었고.

클로드는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물어보자.’

그가 그렇게 다짐한 때였다.

“아, 알겠다.”

라티아가 아직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통통한 손가락을 딱 튕기며 다 안다는 듯 운을 뗐다.

“돈이죠?”

그리고는 느닷없는 소리를 한다.

“아론 폐태자의 복위를 추진하려면 막대한 돈이 드는 거죠? 그런데 그 돈을 수급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시름에 잠기신 거죠?”

“으, ……으응?”

“설마 또 무역을 알아보고 계신 건 아니죠? 물론 그 방법이 가장 좋긴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신 지 얼마 안 되셨잖아요. 전 싫어요…….”

마주 앉아 있던 라티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혹여나 당장이라도 클로드가 무역을 떠날 채비를 할까 봐 그의 옆으로 딱 달라붙었다.

“네? 우리 무역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요. 아빠아.”

심지어는 평소 가뭄에 콩 나듯 불러주던 ‘아빠’라는 소리까지 한다.

클로드는 라티아가 답지 않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지만 동시에 벼락이라도 맞은 짐승 마냥 펄떡 놀라고 말았다.

‘그래, 아빠……!’

라티아가 왜 카르시안을 좋아해서 미안하다고 했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 실수군.’

클로드야 많은 사람을 만나도 많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사람 간의 관계도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라티아는 모르겠지.’

라티아가 아무리 클로드의 허를 찌르는 인맥을 갖고 있다 한들, 그건 결국 서로의 이윤을 위해 만난 사업적 관계일 뿐이었다. 제아무리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는 하나 어지간해서는 그 관계가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아야 하는 관계란 것이다.

그러니 라티아는 모를 터.

‘친구가 연인이 될 수도 있고 아빠가 아버님이 될 수도 있는데.’

실제로 클로드는 아빠 소리보다 아버님 소리를 듣는 게 더 빠를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가 라티아를 친딸처럼 아끼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라티아가 카르시안을 좋아하는 마음을 뭉개면서까지 친부녀 같은 사이가 되자 우길 생각은 없었다.

클로드에게 항상 최우선인 것은 늘 라티아의 진심이고 마음이었으니까.

‘젠장.’

지금껏 클로드는 몇 번이고 후회했다.

글라델리스 후작 일가를 너무도 편하게 보내 준 건 아닌지, 너무 곱게 보내 준 건 아닌지.

하지만 그들이 고통받는 만큼 리티아도 함께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그냥 일찍 가서 낫다고 여겼다.

그렇게 내면에서 싸우길 몇 년, 지금 그 결론이 났다.

‘빌어먹을 놈들, 역시 너무 편안하게 죽였군.’

그들이 라티아에게 충분한 애정을 줬더라면, 사람 간의 관계성에 대해 배울 기회를 줬더라면, 라티아를 조금이라도 더 아껴 줬더라면. 지금 라티아는 이렇게 메마른 아이가 아니었을 텐데!

‘설령 나와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상관없어.’

클로드는 어쨌든 간에 후견인, 명예 양부다. 그가 아무리 태산 같은 사랑을 준다 한들 친부모보다는 못할 터.

클로드가 입을 꾹 담은 채 콧김으로만 깊은 한숨을 뱉은 때였다.

그의 생각이 읽히지 않아, 이를 다르게 해석했는지 라티아가 또 한 번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다.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음?”

“아론 폐태자의 복위를 추진하는 정치 자금 말이에요. 제가 누구예요. 티아나 아메시스트잖아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이 조그만 것이 계속해서 제 마음이나 돌아볼 것이지.’

손바닥만 한 게 잘도 복위 자금이니, 정치 자금이니 따위의 어려운 이야기를 한다.

클로드는 라티아의 한쪽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찰딱 달라붙는 쫀득한 빵 같은 촉감에 치밀었던 부아가 슬그머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공자미……?”

볼이 늘어난 탓에 말투가 어눌해졌다. 보라색 눈만 열심히 깜빡이고 있는 라티아를 보다, 클로드가 콩 하고 이마를 부딪쳤다.

“아얏.”

“됐다. 코 묻은 돈 어디에 쓰게.”

클로드는 티아나 아메시스트의 계좌에 얼마나 큰 돈이 있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코 묻은 돈’이라 불렀다.

이번엔 라티아가 조금 부루퉁해졌다.

‘당장 운용할 돈이 없는 건 사실이면서!’

이는 원작에서 나온 내용이기에 확실했다. 클로드가 손을 댄 사업은 모두 장기적인 사업이었다.

당장 무역만 하더라도 그랬다. 무역의 수입은 하루아침에 뚝딱 나오는 것이 아니니.

‘하지만 자신이 직접 무역을 나가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중간 유통 과정이 싹 사라지니까. 그래서 원작에서도 직접 무역을 나갔던 거면서!’

그러나 그렇게 떠난 무역에서 클로드는 목숨을 잃고 만다. 에메르나가 먹인 독 때문에.

‘물론 그 독은 내가 이미 바람개비 꽃 뿌리를 줘서 해독 방법을 알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바다에선 워낙 많은 변수가 있지 않나. 물이 떨어질 수도 있고, 제대로 약물이 우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가지 않는 게 최고의 방법이야!’

어젯밤 라티아는 생각했다.

이미 원작은 상당히 바뀌었다. 레오나르도 황제의 죽음 둥 바뀌지 않은 부분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라티아 주변 인물은 원작과 상당히 달라졌다.

그렇다면 아주 원작을 비트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남주와 여주를 못 만나게 한다든가.’

카르시안과 이리스의 만남은 클로드가 아론의 복위를 위한 정치 자금을 모으러 간 무역에서 이루어진다. 클로드가 죽은 그 무역에서.

다시 말해 클로드가 무역을 가지 않으면, 카르시안을 데려가지 않으면 카르시안과 이리스는 아예 만나지조차 못 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과연 내가 그래도 될까?’

나 혼자만의 욕심으로 카르시안의 운명을 바꿔도 되는 걸까?

망설여졌다. 그러나 변명거리는 있었다.

‘공작님을 살리기 위해서야. 어쩔 수 없어.’

누군가 자신의 독백을 읽는다면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다. 이것이야말로 배은망덕한 일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좋다. 그런데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운명의 수레바퀴는 굴러간다고.

카르시안과 이리스가 어쩔 수 없이 이어져야 하는 운명이라면, 라티아가 원작을 바꾸는 한이 있어도 두 사람은 만나고 말 것이다.

‘그럼 그때 빠지자.’

주인공들의 극적인 만남을 방해했으니 이미 악역 조연이 된 후겠지만, 그건 라티아만 아는 내용 아닌가?

‘내가 카르시안과 이리스가 만났을 때 아무 짓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그 누가 라티아가 사실은 이 세계는 책 속의 세계이며, 미래를 알고 있고, 카르시안을 좋아해서 그의 ‘남자주인공의 운명’을 비틀려고 했다는 걸 알까?

여기까지 생각한 라티아는 제가 정말로 악역 조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어떡해.’

이미 자각해 버린 마음인데, 이 마음은 어지간한 이유가 아니면 포기되지 않을 거란 걸 아는데. 그렇다면 뭐라도 하고 포기해 봐야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너는 안 돼!’ 하는 신의 계시처럼 운명이 이어지면, 그때엔 포기가 될 것 같았다.

하여 라티아는 조금 설레는 얼굴로 클로드의 무역행을 막으려고 했지만.

“어른을 놀리면 못 쓴다.”

이러한 라티아의 사정을 모를 클로드는 좀처럼 쉽게 따라오는 법이 없었다.

“그런 게 아닌데…….”

라티아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사실 클로드가 한 번에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에게도 원작대로 움직이는 ‘억지력’이라는 게 있기는 할 테니까.

그렇지만 라티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카르시안과 이리스의 만남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도 진심이었지만 클로드를 더 이상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은 마음도 진심이었기에.

라티아는 마지막 수를 썼다.

“사실은 공작님과 같이 조사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음? 조사?”

“네. 그게 있잖아요. 디케 신전의 대신관인 하인리드 님이 그러시는데, 제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래요.”

그건 바로 신탁을 후회한다 말했던 하인리드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미끼로 투척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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