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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46화 (146/186)

146화

* * *

카르시안 라움디셀.

매일 같이 떠올리고 있는 원작 속 남자주인공의 이름.

이리스라는 여자주인공과 이어질 불행한 과거를 가진 소년이자 남자의 이름.

그리고 지금은 나의 후견인인 클로드 라움디셀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소꿉친구.

다시 말해 악역 조연에 환생한 내가 절대로 탐을 내서도 욕심을 가져서도 안 되는 사람의 이름이란 뜻이었다.

‘남매 같은 사이라고 들었어요. 그렇죠?’

세리나 황녀는 계속해서 나에게 카르시안에 대한 마음이 무엇인지 직시하라 강요했다.

아니, 세리나는 그저 나에게 세간에 퍼진 사실만 물었을 뿐이다.

난 클로드의 피후견인이고, 성인이 되기 전까지만 라움디셀이고, 카르시안이 글라델리스 후작가에 있을 때 함께 지냈고, 우린 사이좋은 의남매처럼 보인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며 물어본 게 전부이고 사실이었다.

당연히도 “네, 맞아요.”라고 대답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말문이 턱 막힌 이유는, 도무지 “남매 같은 사이예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약혼하신다면 축하해 드릴게요.”라는 인사치레를 하기 싫었던 이유는.

가당치도 않게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떠한 감정 때문에 세리나 황녀가 나를 구석으로 밀어붙이는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사실은 조사를 조금 해 왔어요.’

‘조사요? 저에 대해서요?’

‘네. 제가 라움디셀 공자와 이어지게 되면 저와 가장 많이 부딪힐 사람은 영애니까요. 제가 사랑하는 연인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이성 소꿉친구. 신경 쓰이는 건 당연하잖아요?’

난 세상에 퍼진 황녀에 대한 소문을 정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가 세리나 황녀더러 소심하고 소극적이라 했나?

자신의 감정과 생각 앞에서 세리나 황녀는 그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담대했다. 나 같은 것은 도무지 따라갈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런데 다행히도 영애는 라움디셀 공자에게 그 어떤 마음도 없어 보이더라고요.’

‘…….’

‘영애에게 라움디셀 공자는 좋은 친구죠? 사이좋은 의남매의 오라버니이고, 가족인 것뿐이죠? 그러지 않고서야 글라델리스 후작가를 제 손으로 멸문시키고 나서 곧바로 떠날 준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세리나 황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의 가장 아픈 구석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라움디셀 공자와 함께 힘든 시간을 버티면서 마음이, 아. 사랑이 아니고 동료애나 남매애라도요. 그런 마음이 생겼다면 당연히 ‘이 일의 끝에서 우린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영애는 그러지 않았죠. 홀로 그루안 상단주의 고향에 내려갈 준비를 마쳤잖아요.’

이제는 까마득해진 나의 계획이었다. 딱히 떠벌리고 다닌 기억이 없는데, 황녀는 대체 어떻게 안 걸까?

‘또 라움디셀 공작이 영애를 후견이 아니라 입양하려 했을 때도 영애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요. 라움디셀 공자를 좋아해서 그와 장차 이어지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친남매가 되고 싶진 않았을 텐데요.’

세리나의 말은 모두 논리정연했고 개연성이 있었다.

실제로 난 당시 카르시안과의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 닥친, ‘남주의 아빠가 나를 입양하려고 한다.’가 충격적이었을 뿐.

‘과거의 일은 더 볼 것도 없어요. 당장 이번의 검술 대회만으로도 그렇죠. 결국 안 오셨잖아요?’

‘그땐, 공작님이 쓰러지셔서…….’

‘핑계 댈 거리가 있다는 건가요?’

핑계. 그 말에 나는 또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듣자 하니 공자의 검에 묶인 수술은 모두 영애가 만든 것이었다면서요. 수술을 만들고 전해 줄 정신은 있고, 그 외에 말 한마디 더 해줄 정신은 없었던 말인가요?’

‘말, 한마디…… 요?’

‘네. 저였다면 수술을 전해 달라 부탁하는 김에 응원하다든지, 우승을 기대한다든지, 못 가서 미안하다든지 말 한 마디라도 더 했을 것 같아서요. 어머. 이렇게 관심이 없다니. 정말 친남매 같네요.’

세리나가 후후, 아주 만족스러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양 웃었다. 난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아졌다.

세리나의 입으로 내가 모르는 카르시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난 졸렬하게도 세리나를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난 참석하지 못한 검술 대회에서 내가 모르는 카르시안의 모습에 반한 세리나, 그녀의 모든 것을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리고 너무도 당당하게 ‘난 카르시안 라움디셀 공자가 좋다.’고 밝히는 그녀의 마음과 모습에 또 한 번.

이후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고, 황녀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기억이 없다.

정말 말 그대로 넋을 빼놓고 있던 것 같다.

방으로 돌아와 퇴창에 앉아 안뜰을 보고 있는 동안, 계속 생각했다.

세리나 황녀가 부럽다고.

카르시안의 방은 내 방과 마주 보고 있었다. 안뜰을 보고 있는 시선을 조금만 들면 바로 카르시안의 방이 보인다. 그래도 나는 카르시안의 방을 보지 않았다.

세리나 황녀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끝내는 부러워 하고 있는 내가 볼 만한 곳이 아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세리나 황녀가 부럽다니.

그럼 만약 카르시안에게 이리스라는 운명의 짝이 있는 줄 모른다면.

그가 이 세상에서 여자주인공과 맺어지는 남자주인공이란 숙명이 있다는 걸 모른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 세리나 황녀처럼 카르시안을 향한 마음을 올곧게 가질 수 있었을까?

카르시안에게 고백을 했을까?

그래서 기어이 카르시안과의 관계를 망치고, 클로드와의 관계를 망치고, 성인이 되기 전까지 공작성에서 불편하게 있다가 쫓겨나듯 떠나야 마음이 풀렸을까?

나중에 카르시안이 이리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맺어지는 모습을 보며 가슴을 움켜쥐며 슬퍼해야 직성이 풀렸을까?

내 손으로 나와 핏줄이 이어진 글라델리스 후작가를 멸문시켜 붙여 놓은 이 목으로, 결국 악역 조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야 만족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내게 물음을 던져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으니까.

아니, 난 다시 회귀를 한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똑같이 선택했을 것이다.

살기 위해 글라델리스 후작저를 버리고, 클로드가 날 후견하도록 놔두고, 그와 명예 부녀 사이가 되고…….

카르시안과 이어지기 위해 과거를 비트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난 두려우니까.

내 목에 내리쳐지던 단두대 칼날의 서늘함이 아직도 오싹할 정도로 선명하다. 다시는 죽고 싶지 않았다.

악역 조연으로 환생해서 죽는 건 회귀 전에 이미 충분히 겪었다. 그러니까 난 다시는 악역 조연의 운명으로 죽는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남주와 여주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욕망적인 실수 따윈 절대로 저지르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감히 세리나 황녀를 부러워할 수 있을까.

이 길로 걸어온 건 겁쟁이인 내가 고른 선택지가 연속된 결과인데.

터무니없는 마음이었다.

난 쿠션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안다, 이렇게나 잘 안다.

그런데도 울렁거리는 이 속은, 손이 저릿거릴 정도로 속상한 이 마음은, 후회할 거리가 아닌데도 후회막심하여 뜨거워지는 눈시울은 대체 뭐란 말인가.

클로드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클로드가 있었더라면 나는 그의 품으로 달려가 안겨 이 복잡하고 홀로 버티기 힘든 마음을 토해 내고 말았을 테니까.

나의 후견인이 되어 준 은인에게 사실은 댁의 아들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하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을 테니까.

그런데도 계속해서 내 마음 한구석에선 말도 안 되는 욕망이 속삭인다.

카르시안과 함께하고 싶어, 지금처럼 같이 지내고 싶어, 그의 옆자리를 다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카르시안이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이리스가 아니라 나를 봐 줬으면 좋겠어, 카르시안에게 이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어.

새삼스레 신이 미웠다.

이 세계의 운명의 흐름과 나의 역할을 알게 했으면, 마음은 주지 말았어야지.

내가 전생을 깨달아 죽는 순간, 그냥 그대로 놔뒀어야지.

왜 나를 회귀시켰어요?

나에게 바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나에게 또 한 번의 삶을 부여해서 이런 괴로움에 빠지게 하는 거예요?

이 고통이 내가 또 한 번의 삶을 얻은 대가인가요?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을 품고 사는 게 나의 죗값인가요?

그렇다면 나 조금 억울해요.

회귀 전엔 몰라서 그렇게 했던 건데, 내 죄도 아닌 죄를 뒤집어쓰고 죽은 건데, 회귀시켜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냥 좀 억울했을 뿐인데, 내가 바라지 않은 회귀였는데.

얼굴을 파묻고 있는 쿠션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악다문 이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나갔다.

그 소리를 들킨 걸까?

“라티아!”

아, 안 돼.

지금 이 순간,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클로드가 찾아오고 말았다.

* * *

“라티아는?”

“잠들었어.”

문을 닫고 나오는 클로드에게 헥터가 물었다.

두 사람은 클로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울었던 거래?”

“그게…….”

클로드는 팔짱을 낀 채 걷다가 성마른 손길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인상을 조금 더 날카롭게 보이게 하는 눈가의 상처를 훑은 손이 이번엔 말하기를 망설이는 입술을 매만졌다.

그가 신음처럼 말했다.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아.”

“응? 네가?”

“그래. 이렇게…… 힘들어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끙, 클로드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린 시절의 제가 그랬듯 라티아가 카르시안을 좋아하게 되면 둘이 이어져서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클로드와 지금 아이들의 사정이 많이 다르단 걸 간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티아가 생각이 아주 많고, 말도 안 되게 깊은 아이라는 것도.’

어린 것들이 뽀작거리며 노는 게 귀여워 어른이 도움을 주려 개입했던 게 실수였을까?

‘카르시안이, 너무 좋아져 버렸어요으아앙.’

머릿속에 카르시안을 좋아해서 미안하다고, 죄송하다며 괴롭다는 듯 울던 라티아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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