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다시 라움디셀 공작성.
“카르시안 라움디셀 공자에게 약혼담을 넣을 생각이었거든요.”
황녀, 세리나의 말에 라티아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어, 응?’
라티아는 세상이 뒤로 멀어지는 것 같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니까 세리나 황녀는 카르시안한테, 반, 반, 반…….’
입 밖으로 내는 소리가 아닌데도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찔한 현기증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라티아가 이런 상태인 줄 꿈에도 모를 세리나는 제멋대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검술 대회에서 처음 만났어요.”
“…….”
“처음부터 시선을 사로잡긴 했죠. 너무도 쉽게 상대를 격파하며 토너먼트의 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었으니까요.”
“…….”
“저도 모르게 시선으로 쫓고 있더군요. 그리고 라움디셀 공자가 우승 진출이 확정되었을 때였어요.”
라티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영애는 ‘첫눈에 반한 기적’을 믿나요?”
세리나 황녀가 뭐라고 이야기를 열심히 이어 나가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사실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 사람의 뭘 보고 반한단 말인가요? 그래 봐야 얼굴인 것 아닌가요? 그건 너무도 속물적이고 가당치 않은 이유잖아요.”
역시 황녀는 달랐다. 라티아야 몸만 어리지, 환생과 회귀를 하여 정신은 성인이니 단어 선택이 남달랐다지만, 세리나는 아닐 터.
그럼에도 세리나는 정확한 단어를 적재적소에 사용하며 상대에게 효과적으로 자신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소극적이고 소심해서 사람과 말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더니…….’
책을 많이 읽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제네스나 아론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라움디셀 공자를 본 순간, 전 인정해야만 했어요.”
무엇을? 이라는 질문은 할 필요도 없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기적’은 실존한다는 걸요. 그리고 그 기적의 또 다른 이름은 ‘운명’이라는 걸요.”
“운명…….”
“네, 운명이요. 그 순간 전 깨달았어요. 제 운명이 라움디셀 공자라는 걸. 왜 아니겠어요. 그를 보는 순간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심장이 그토록 빨리 뛰었는걸요. 아, 사실은 지금도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열이 몰리고 맥이 빨라져요. 숨이 가빠지죠.”
세리나는 카르시안을 떠올릴 때 느끼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아주 자세히 늘어놓았다.
“첫눈에 반한 그 순간이 제 눈에 문신으로 새겨진 것 같아요. 눈을 감아도 떠오르고요, 꿈속에도 나와요.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사랑일까요?”
세리나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사이 라티아는 천천히 정신이 들었다. 이제야 먹먹한 귀가 트이고 세리나의 이야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니 전 라움디셀 공자와 이어지려고 해요.”
“…….”
“약혼담은 빠른 시일 내에 정식으로 보낼 거예요.”
“…….”
“그 전에 제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하나예요.”
이제 라티아는 귀가 완전히 트였다. 진자운동을 하는 것처럼 흔들리던 세상도 이제 또렷하게 보였다.
라티아가 막 완전히 제정신을 차렸을 때였다.
“영애는 라움디셀 공자를 좋아하나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약혼을 축하해 주세요.”
다시 한번 세리나의 말 때문에 라티아의 의식이 저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 * *
“라티아!”
문이 벌컥 열리며 클로드가 뛰어 들어왔다. 라티아는 퇴창에 앉아 쿠션을 끌어안고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어쩐지 눈가가 조금 붉어 보였다.
‘운 건가?’
속눈썹이 조금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클로드가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때, 라티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제 몸만 한 커다란 쿠션을 안고 턱을 괸 채 웅크리고 있던 라티아의 눈에 물방울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
라티아는 아무런 말도 못 하며 그저 꾹꾹 울음만 삼킬 뿐이었다.
클로드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클로드가 황후, 루니아와 헤어진 이후 급히 공작성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황녀, 세리나는 공작성을 뜬 이후였다.
디케 신전에 참배를 하러 가다 들른 길이라 했으면서 공작성을 빠져나간 세리나의 마차는 곧장 황도로 향했다고 한다. 그러니 목적은 오로지 라티아였다는 말.
‘하필이면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아니, 과연 ‘하필’일까? 사실은 클로드가 오늘 공작성을 비운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건 아닐까? 황녀는 아무리 어려도 에메르나의 딸이다.
‘에메르나 황비가 시킨 짓인가.’
최대한 모든 방향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 나을 터.
그런 와중에 황녀를 홀로 맞이한 라티아가 지금 쿠션을 안은 채 눈물만 뚝뚝 떨어트리고 있다.
클로드의 마음에 분노와 걱정의 불이 지펴지다 못해 화산이 터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클로드가 가까이 다가가자, 라티아는 쿠션을 더욱 꼭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마치 클로드에게 겁을 먹은 것처럼!
깜짝 놀란 클로드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 때였다.
“……웃.”
라티아가 황급히 손을 뻗어 멀어지려는 클로드의 옷을 잡은 것이다.
‘다가가는 건 무섭고 멀어지는 건 싫단 건가?’
대체 무슨 심리인지 모르겠다. 일단 클로드는 그 자리에 서서 라티아가 무슨 말이라도 하길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몇 분, 혼자 소리도 없이 한참을 울던 라티아가 코를 훌쩍이고 입을 열었다.
“……죄, ……요.”
목소리가 너무 작아 뭐라고 말했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클로드는 재차 묻지 않았다.
“……송, 해요.”
라티아도 제 목이 잠겨 클로드에게 제대로 뜻이 닿지 않았다는 걸 알았는지, 알아서 계속 말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나 말문이 막히고, 그쳤던 울음이 다시 터지고, 참았던 한숨을 토해 낸 후에야 라티아는 완전한 문장을 말할 수 있었다.
“공작님, 정말 죄송해요.”
그건 뜻밖에도 사과였다.
클로드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왜? 뭐가 미안하단 거지?’
뭔가를 잘못한 걸까?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라티아의 방으로 오는 동안 수잔과 메리, 앤에게 들었는데 딱히 라티아가 황녀에게 실례를 범한 것 같지도 않았다. 실례를 범했다면 기별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황녀에게 있지.
그런데도 라티아는 클로드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이번엔 알아서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건지, 라티아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해서 클로드는 잠시 기다리다가 캐묻기로 했다.
“왜 사과를 하는 거지?”
최대한 억양을 억눌러서 평소보다 더욱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제 옷을 잡은 라티아의 손을 잡고,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아 시선도 맞췄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라티아의 보라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네가 황녀 저하께 뭔가 실수를 했을 리는 없고.”
클로드의 말엔 강한 확신과 믿음이 담겨 있었다. 라티아가 결코 잘못하지 않았으리란 마음이.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내게 누를 끼친 것도 아닐 텐데.”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책장을 엎었나? 라티아가 다치지 않았으면 그만이다.
클로드의 개인 서재를 드나들다가 서류를 망가뜨렸나? 다시 작성하면 될 일이다.
당장 생각나는 그 어떤 실수를 떠올려도 라티아가 이렇게 겁을 먹을 만한 일은 없었다. 클로드는 가만히 라티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때였다.
“……끼쳤어요.”
“음?”
“제가, 제가 공작님께…… 그리고 카르시안한테…… 누를, 끼쳤어요.”
다시금 와앙 울음을 터트리며 라티아가 느닷없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클로드뿐만 아니라 카르시안에게도 누를 끼쳤다니?
‘대체 어떻게?’
카르시안은 지금 아카데미에 있고, 라티아는 그를 만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누를 끼쳤단 것이지?’
순간 머릿속에 에메르나 황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라티아가 저지른 어떠한 실책이 에메르나 황비의 손에 들어갔고, 그것이 에메르나 황비가 라움디셀 공작성을 공격할 구실이 되었단 건가?’
라티아가 정확히 이야기를 해 주지 않으니 망상 같은 상상만 늘어 갔다. 클로드의 생각이 끝을 모르고 부정적인 쪽으로 계속해서 뻗어 나가던 찰나.
“어, 떡해요?”
라티아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얼굴로 클로드를 바라봤다. 그녀는 눈물을 닦을 정신도 없어 보였다.
이런 라티아는 처음이라, 그리고 이런 라티아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몰라 클로드는 마음만 저며졌다.
클로드가 드물게 쩔쩔매며 애를 먹고 있을 때 라티아가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울음을 터뜨렸다.
“은혜를,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방법도 가지가지인데에에.”
“라, 라티아?”
“제가, 제가 어떻게 이런, 나도 근데, 이러고 싶지는 않았, 나, 나도 잘 몰랐는데에에.”
“라티아, 그게 대체 무슨…….”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니, 이러고 싶지 않았다니? 그녀조차도 몰랐다니!
펑펑 솟아나는 눈물은 마치 라티아가 미처 조절하지 못한 감정처럼 보였다. 지금 라티아는 그 어느 때보다 감정적이었다.
레오나르도가 죽은 날보다도, 클로드가 독을 먹고 쓰러졌을 때보다도 더!
라티아가 이 말을 하면 클로드에게 버림을 받을까 두려운 얼굴로 말했다.
“카르시안을 좋아해요.”
“!”
“카르시안이, 너무 좋아져 버렸어요으아앙.”
난 주인공이 아닌데에, 카르시안은 주인공인데에에.
그것도 영문 모를 소리를 덧붙이며 공작성이 떠나가라 쩌렁쩌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