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가주인 클로드가 자리를 비웠으니 라티아가 가주 대리로서 황녀를 맞이했다.
‘극진히 그리고 완벽하게 접대해야 해.’
세리나 황녀는 비록 입지가 미미하다 하더라도 그래도 황녀였다. 또 출생이 불확실하단 소문이 있어도 에메르나가 배 아파 낳은 자식임은 분명했다.
‘조그마한 꼬투리라도 잡혀서는 안 돼.’
아주 작은 틈이라도 보였다간 에메르나가 기가 막히게 파고들어 공격할 게 분명했다. 심지어 지금 클로드는 루니아 황후를 만나러 황성에 갔다.
‘공작님을 사랑하는 에메르나 황비는 그렇지 않아도 화가 잔뜩 날 상황이야.’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신이 아닌 정적인 루니아 황후를 찾았으니 어쩌면 이미 단단히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원작에선 사랑이 증오로 바뀌었지.’
클로드에게 바람개비 꽃 뿌리로 해독되는 독을 사용한 시점에서 이미 그녀의 마음이 애증으로 변질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에메르나가 클로드에게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할 것이 없단 상황이란 뜻이다.
‘그러니 나라도 황녀를 제대로 대접해야 해.’
라티아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황녀가 기다리고 있을 현관으로 향했다.
* * *
깨끗한 은발은 레오나르도를 닮았고 투명하고 맑은 파란색 눈동자는 에메르나를 닮았다.
조금 서늘한 듯 무심해 보이는 눈매를 가졌음에도 바쁘게 움직이는 눈동자 때문에 소심하고 겁을 잔뜩 집어먹은 것처럼 보였다.
황녀, 세리나는 분명 고귀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낮아 보이게 하는 기묘한 재주를 가진 소녀였다.
이것이 내가 계단 참에서부터 생각한 세리나의 첫인상이었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상대가 어려워 보이거나 강인해 보여 긴장감이 생기지도 않는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만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세리나의 표정이 읽히지 않았다.
나의 수호천사인 삐로리가 원하는 능력인 독심술 능력은 클로드나 카르시안 같이 몇몇의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조리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난 대부분의 사람을 만나도 마음이 편안했다.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니 지레 겁을 먹을 필요가 없지.
반대로 속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 앞에선 과할 정도로 겁을 먹었다. 더 조심스러워졌고, 더 긴장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세리나는 정말 신기했다.
뭐지, 이 기분은.
딱히 겁이 나지도, 긴장이 되지도, 그렇다고 안심이 되지도 않는…… 이 기묘한 느낌은 대체 뭐지?
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 속으로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라티아 라움디셀이 인사 올립니다.”
드레스 자락을 잡아 늘이며 인사하자, 내가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세리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가워요. 세리나 아우레니아 에멜하르트예요. 갑작스런 방문인데도 이리 환대해 주어 감사합니다.”
나를 공작성의 영애 또는 아가씨로 대우해 주는 건지 세리나는 자신의 풀 네임을 말하며 소개했다.
“디케 신전에 참배를 드리러 가는 길이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갑작스런 빈혈 때문에 잠시 쉬려던 때에 근처에 라움디셀 공작령이 있단 것을 알고 이리로 왔죠.”
황성에서 디케 신전까지는 바로 텔레포트를 이용할 수 있다. 일부러 마차를 타고 황도를 벗어나 타 귀족의 영지를 지나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지금 세리나의 말은 거짓말이다.
세리나는 일부러 여기에, 라움디셀 영지에 온 거야.
어째서일까?
짐작조차 가지 않아,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물론 세리나에게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고 추궁할 생각은 없다.
난 지금 공작님의 대리야. 에메르나 황비의 딸인 세리나 황녀를 잘 대접해서 보내야 해.
속으로 다짐하고 눈썹을 늘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저런,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네, 빈혈기가 워낙 심해 이런 일이 잦아서 동요하지 않고 마차에서 내리니 괜찮아졌어요.”
의사도 부르지 못하게 아예 선을 그어 버리는 걸 보니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더욱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참, 자리를 옮겨 차를 한 잔 드시겠어요?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는데 어쩌면 어지럼증 완화에도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신경 써 줘서 고맙습니다만 지금은 아무것도 입에 대고 싶지 않네요.”
정중한 거절이었지만 난 그 속의 따가운 가시를 느꼈다.
왜 저렇게 조심하는 거지?
라움디셀 공작성은 갑작스러운 황녀의 방문에도 그녀를 맞이해 줬다. 그러니 ‘자리를 옮겨 차라도 한잔하자’는 이야기는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응하는 게 예의일 터.
날 무시하는 건 아니겠고…….
에메르나를 연상케 하는 푸른 눈동자에선 마땅한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뭐, 지금 이렇게 마주 보고 서서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겠지.
“그럼 곧장 쉬실 객실로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원래라면 응접실이나 그 외의 장소에서 간단한 안부라도 묻겠지만, 거절했으니 어쩔 수 없다.
난 세리나를 보고 빙긋 웃고는 몸을 돌리려 했는데, 이때였다.
“마차를 타고 들어오는 동안 차창 밖으로 정원이 보였는데 오랑제리가 있더군요.”
반쯤 몸을 돌린 나에게 세리나가 뜻밖의 말을 건넨 것이다.
“오랑제리를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녀가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날씨가 무척 좋아 로비도 굉장히 밝았는데, 어째선지 세리나 주변만 좀 어두컴컴했다.
마치 그녀의 주변으로 어둠이, 늪이, 악의가 모여들고 있는 것처럼.
……기분 탓이겠지?
사람의 주위에 어둠이 몰려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난 너무 긴장해서 보인 환각이라고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황녀 저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얼마든지요.”
난 곧바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버틀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자 세리나가 손을 들며 말했다.
“제 말은, 안내를 해 주셨으면 좋겠단 뜻이에요. 라움디셀 영애가 직접.”
가주가 자신보다 상위 귀족이나 연장자에게 직접 저택을 안내해 주는 경우는 종종 있다.
황녀는 나보다 높은 사람이 맞으나 좀 더 예의 있게 청해야 했다.
왜냐면 그녀는 갑작스러운 방문자이고 가주 대리인 내가 한 차례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자 말하는 권유를 거절한 전적이 있으니까.
문득 ‘적의를 읽는다’는 것도 표정을 읽는 축에 속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세리나 황녀는 내게 적의를 갖고 있는데 내가 못 알아보고 있는 걸까?
그렇게까지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녀가 내게 적의가 있든 없든 난 그녀를 모셔야 하는 입장.
“네, 기꺼이요.”
난 황녀와 함께 오랑제리로 향했다.
한 바퀴 둘러보는 동안 나는 오랑제리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지만 세리나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티를 낼만큼 어수룩하지도 않다.
우리는 소형 분수대 옆의 테이블에 앉았다.
“음료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음, 물이면 돼요. 하지만 은수저를 받고 싶어요.”
세리나가 무표정하게 요구했다. 난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은수저를 요구한다는 건 곧 독이 있나 검사를 해 보겠단 뜻이다.
황녀가 차나 음료가 아니고 맹물을 마시겠다 한 것부터가 우리 공작성이 어떤 술수를 부릴까 봐 경계하고 있단 소리기도 했다.
대체 왜 공작성을 의심하는 걸까? 무엇 때문에?
난 속으로 궁금해하면서도 고개를 돌려 메리에게 맹물 두 잔과 은수저 하나를 가져오라고 했다. 메리의 표정이 잠시 흐트러졌지만, 다행히 세리나는 보지 못 한 듯했다.
세리나는 맹물이 담긴 잔에 은수저를 한참이나 휘휘 저은 후에야 한 모금을 겨우 마셨다. 내가 물잔을 두 번이나 비우는 동안 말이다.
앞에서 사람이 멀쩡히 물을 마시고 있으니 의심을 거둘 법도 하지만, 세리나는 참으로 신중했다.
이쯤 되니 정말로 궁금해졌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건지,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독 검사까지 하는 건지, 그렇게 믿지 못할 것 같으면 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여기로 찾아온 것인지!
난 세리나가 마치 은수저가 검게 변하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디케 신전에 참배를 가신다니, 추수 감사절을 앞두고 기도를 하러 가시나요?”
“네, 전 항상 이 제국. 하이페디움 제국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고 있으니까요.”
준비하고 있던 대답인 건지 심드렁한 목소리가 고저 없이 말했다.
그러다 이내 은수저를 보던 푸른 눈동자를 들어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내가 왜 갑자기 디케 신전에 기도를 하러 가느냐 물었는지 알아차렸단 듯이.
그래, 난 이제 슬슬 본론을 말하라고 운을 뗀 참이었다.
내 예상대로 내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인지, 세리나가 입을 열었다.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라움디셀 공작령엔 한번 들르고 싶었어요.”
“어머, 그러신가요? 기도를 하고 귀궁하시는 길에 들르실 생각이셨군요. 신전에서 출발하시기 전 미리 기별을 주셨다면 저희도 좀 더 준비를 했을 텐데 아쉬워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다, 정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시늉을 하자 세리나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워낙 소심하고 소극적인 탓에 사람을 많이 접하지 못해, 상대를 파악하는 눈치가 좀 없는 모양이다.
내겐 아주 잘된 일이지만.
난 세리나가 앞으로도 몇 마디, 형식적인 이야기를 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행동하자고 생각하며 기다리던 때였다.
“카르시안 라움디셀 공자에게 약혼담을 넣을 생각이었거든요.”
내 예상을 깨고 갑작스럽게 본론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