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 * *
클로드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황성으로 향했다.
‘황후 폐하를 뵙고 오마.’
그가 쓰러져 있는 동안 황성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지만 황성엔 에메르나 황비가 있다. 혹시나 클로드에게 또 문제가 생길까 봐 덜컥 겁이 났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클로드가 갑작스레 중독된 이유는 분명 에메르나 탓일 것이다. 원작에서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황성에 다녀오겠단 클로드를 말릴 변명 거리가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조심히,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바람개비 꽃 뿌리를 넉넉히 담은 주머니를 챙겨 주는 수밖에.
클로드는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 곧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그것이 몇 시간 전.
“아가씨, 아가씨! 어서 로비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사격장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버틀러가 황급히 달려왔다. 초조한 듯 놀란 표정 덕분에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알았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버틀러가 이렇게 허둥거리는 모습은 또 처음이라, 메리가 얼른 나를 손님맞이 옷으로 갈아입혀 줬다.
드레스룸 밖에서 버틀러가 말했다.
“그것이, 세리나 황녀 저하께서 이제 막 공작령의 검문소를 지나셨다고 합니다!”
……응?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세리나 황녀?
친부가 레오나르도 황제가 아니라는 소문이 있는 그 소문의 황녀?
유독 소심하고 소극적이어서 제네스의 그림자 속에서 지내느라 원작에서 마땅한 언급조차 없던 그 황녀?
최근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카르시안에게 파트너 신청을 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한 그 세리나 황녀?!
머릿속에 수많은 말이 소용돌이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 마디가 고작이었다.
가장 본질적이고도 궁극적인 질문.
“왜?!”
* * *
다그닥, 다그닥…….
말굽 소리가 아득한 곳에서 치는 파도 소리처럼 아스라이 들려왔다.
귀에 거슬릴 수도 있으나 일정한 소리가 오히려 마음에 안정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잠들었나 보다.
‘팔삭둥이거나, 가짜거나.’
하지만 좋은 꿈을 꾸는 것과는 별개인 건지, 어슴푸레 드는 정신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는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어리긴 하지만 이보다 더 어렸을 땐 몰랐던 이야기.
모두가 모를 거라 생각해서 떠들어 대던 이야기.
‘배가 엄청나게 불러서 태어났잖아.’
‘그럼 팔삭둥이는 아니란 거네?’
‘근데 생긴 건 꽤 왜소하지 않아?’
귓가에 맴돌고 있는 이야기들은 모두 이제 막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는 소녀의 출생을 둘러싼 소문이었다.
바로 황녀, 세리나의 이야기 말이다.
‘아무리 선잠을 잔 거라고 해도 그렇지, 이런 꿈을 꾸다니…….’
세리나는 잠에 들어 스르륵 무너져 있던 몸을 바로 하며 속으로 자신을 나무랐다.
아니, 과연 꿈일까?
‘누가…… 떠들었나?’
순간 세리나의 푸른 눈동자가 매서워졌다. 하지만 마차 안엔 그녀와 묵묵히 레이스를 뜨고 있는 유모뿐이었다.
사실 하도 많이 들은 이야기가 그저 머릿속에 남아 반복 재생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설령 욕한다 하더라도 저를 앞에 두고 이렇게 떠들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릴 적이라면 몰라도, 나도 이젠 다 컸으니까…….’
11살, 어리지만 그래도 알 건 어렴풋이 다 아는 나이다. 특히 황성에서 자랐다면 더더욱.
그럼에도 세리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모두가 자신의 출생에 대해 쑥덕거리고 있을 거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머니와 오라버니는 피해망상이라고 하셨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아.’
그들은 완전하기 때문에 무관심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당사자가 아니니까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에메르나가 이토록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떳떳하기 때문일 테지만, 세리나는 아니었다.
‘난 정말 언제 생긴 걸까?’
이 문제는 에메르나에게도, 유모에게도 직접 물어볼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세리나는 속으로만 끙끙 앓기만 했고 그러는 동안 그녀의 속은 착실히 썩어 문드러져 갔다.
음습하고 우울하게도 말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세리나는 그간 황성에 숨어 있다시피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어딜 가도 자신을 보며 사람들이 쑥덕거릴 텐데, 도무지 그걸 견딜 자신이 없었다.
세리나는 자의로 에메르나의 치마폭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어리고 소심한 황녀, 황태자 자리를 거머쥔 오라버니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겁쟁이 황녀가 되기로 한 것이다.
하여 그날, 황도 밖에서 검술 대회가 열린 그날도 세리나는 황성에 있어야 했다.
실제로 그녀가 황성에 있든, 외가에 있든, 검술 대회장에 있든 아무도 신경 안 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에메르나는 아니었다.
‘황제 폐하께서 붕어하신 이후 처음 열리는 제국의 화합 축제나 마찬가지인 자리다. 네 오라버니도 출전하는 그 대회에 네가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되겠느냐?’
에메르나는 본래도 황태자인 제네스에겐 꼬박꼬박 대우를 해 주면서도, 세리나에겐 미묘하게 날카롭게 대했다. 그렇지만 그날은 평소보다 좀 더 날카로웠다.
‘왜 이렇게 겁이 많은 거니, 대체 누굴 닮아서!’
‘대체 누굴 닮아서’라는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다. 그 말은 꼭 레오나르도도, 에메르나도 닮지 않았다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 세리나가 타인의 자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리나는 그 말을 부정하기 위해 검술 대회에 참석했다. 비록 에메르나의 옆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경기장을 보고 있는 게 전부라 하지만 내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세리나는 최대한의 용기를 낸 자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리나는 한 소년을 만났다.
‘카르시안 라움디셀 공자, 결승 진출!’
심판의 호쾌한 목소리가 검술 대련장을 울린 이후,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져 내렸다.
결승 진출이 확정된 카르시안 라움디셀이 지치지도 않고 보여 준 패기 넘치는 검술에 얼어붙어 있던 관중들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중엔 세리나도 있었다.
세리나 또한 넋이라도 놓은 것처럼 멍하니 카르시안이 펼치는 경기를 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도 멍하니 손뼉을 쳤는데, 이때였다.
‘후…….’
카르시안이 안전 문제로 쓰고 있던 투구를 벗은 것이다.?
옆구리에 투구를 끼고 건틀렛을 낀 채 땀에 젖은 검은 머리를 흩뜨리는 모습이 세리나의 망막에 선명히 새겨졌다.?
아직 앳된 느낌이 남아 있는 얼굴은 무표정한데도 불구하고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투구 속의 열기 탓인지, 아니면 경기를 진행하는 동안 긴장해서 입술을 물고 있던 것인지. 불길이 타오르는 것처럼 붉은 눈동자 못지않게 붉은 입술이 무척이나 생기 있어 보였다. 게다가 투명하고 깨끗한 땀은 마치 아침 이슬같이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카르시안 라움디셀 공자, 우승 진출을 진심으로 축하하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에메르나가 직접 그를 치하했다. 카르시안 또한 에메르나와 세리나가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순간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관객들의 시끄러운 함성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카르시안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열정적인 색을 띠고 있으면서도 무심하고 어딘가 차가운 느낌이 드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 사로잡힌 것처럼.
그 시간 이후로 세리나의 머릿속엔 오로지 카르시안뿐이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우승한 카르시안의 파트너로 함께 하고 싶다고 에메르나에게 뜻을 전했다. 순간 에메르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지만 제 딸이 처음으로 부탁한 일이라 그런지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리나의 바람은 그저 바람으로 끝나고 말았다.?
카르시안이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세리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림자 황녀라 불리는 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황녀였다.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남자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소녀임은 분명했다.
의문은 차곡차곡 쌓여 갔고, 그 끝은 그를 괘씸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리나는 뜻밖의 소문을 들었다.
‘라움디셀 공자에게 정인이 있다고?’
‘네. 비록 공인된 사이는 아니라 하지만 측근들은 다 알고 있는 정보라고 합니다.’
‘정인인데 공인된 사이가 아니라니, 그러면…… 라움디셀 공자가 홀로 좋아하고 있단 말이야?’
그녀에게 이야기를 전해 준 유모가 고개를 끄덕인 때, 세리나는 충격에 빠졌다.
저에겐 그토록 매몰찼던 이가 사실은 다른 이를 짝사랑하고 있었다니, 보답 받지 못할 외로운 사랑을 하고 있었다니!
‘대체 누구야? 라움디셀 공자가 좋아하는 사람 말이야!’
그 행운의 아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째서 카르시안의 마음을 받지 않는단 말인가? 왜 그렇게 아둔하고 멍청한 짓을 한단 말인가? 얼마나 얼간이이기에!
세리나는 불타는 질투심과 시기에 휩싸여 버렸다. 그리고 유모에게 상대방의 이름을 듣는 순간 미묘한 탈력감에 빠졌다.
‘그것이, 라티아 라움디셀이라고 합니다.’
라티아 라움디셀, 멸문한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장녀이자 자신의 가문을 고발하고 살아남은 비정한 소녀.
‘라움디셀 가문의 피후견인이자 라움디셀 공작의 명예 부녀로 유명한 아가씨죠. 그래서 아마 라움디셀 공자는…….’
‘못 이룰 사랑이네.’
유모의 말허리를 자르고 대답한 세리나의 입가엔 비소가 걸려 있었다.
카르시안에겐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그녀에겐 기회였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세리나가 라움디셀 공작령으로 향하고 있는 이유기도 했다.
‘분명 사랑 앞의 장애물이긴 하지만 뛰어넘으려고 한다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장애물이야.’
그러니 세리나는 라티아에게 통보할 생각이었다.
나 세리나 아우레니아 에멜하르트 황녀는 카르시안 라움디셀 공자와 약혼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