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라티아는 곧장 클로드의 침실로 향했다.
“공작……! 큼. 공작님.”
너무 반가워 하마터면 갓 깨어난 환자가 있는 방에서 큰 소리를 낼 뻔했다. 의사가 눈총을 주기 전에 얼른 목을 가다듬은 라티아가 얼른 침대를 확인했다.
“……!”
라티아는 순간 깜짝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거기에 클로드가 있었다.
며칠 동안 봐 온,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모습이 아니고 침대에 기대어 누운 채 느긋한 표정으로 궐련을 태우고 있는 클로드가.
“윽, 이런!”
라티아가 방에 들어온 것을 알고 클로드가 황급히 크리스털 재떨이에 궐련을 비벼 껐다. 그리고는 손을 내저으며 주변의 연기를 흩뜨리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흑!”
당황한 헥터가 재빨리 창문을 열기도 전에 라티아가 클로드에게 달려든 것이다.
“잠깐, 연기가…….”
라티아는 정말 말 그대로 클로드가 기대어 있는 침대로 달려가 뛰어올랐다. 그 바람에 그녀는 클로드가 어찌할 새도 없이 그의 품에 얼굴을 박았다. 눈물이 흩뿌려졌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조용히 코를 훌쩍이거나 소매 끝에 눈물을 찍어 눌렀다.
“다행, 다행이에요……. 일어나셔서…….”
떨어지면 클로드가 깨어난 이 환상이 깨질까. 붙잡은 옷을 놓으면 클로드가 사라질까. 라티아는 그에게 꼭 달라붙어 울먹거렸다.
클로드의 품에서 지금은 살짝 맵고 알싸한 담뱃잎을 태운 연기 냄새가 났지만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아는 걸까?
이제 막 담배를 태워 라티아의 몸에 해로울 걸 알고 있지만 클로드 또한 그녀를 떨어트려 놓지는 않았다.
“걱정을 끼쳤구나.”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에게 매달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12살이나 되어서 여전히 작은 라티아를 마주 안아 줬다. 라티아는 저를 감싸 안는 두껍고 튼튼한 팔을 느끼며 다시금 눈물을 터뜨렸다.
아, 얼마나 기다리고 바랐던 포옹이던가.
당연하게 여기던 이 단단한 힘이 사라졌다 생각이 되자 발밑이 무너지는 것처럼 두려웠다.
‘내가, 내가 원작을 알고 있어서 다행이야.’
이 몸에 환생을 해서, 그 덕에 원작을 고스란히 알고 있어서 다행이라 여긴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라티아는 온 마음을 다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헥터에게 이야기 들었다. 전부 네 덕이라며.”
클로드의 잔잔한 목소리에 함께 눈물을 찍어 내고 있던 의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알기로 라티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라티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개비 꽃 뿌리를 달여 약을 만들었어요.”
바람개비 꽃 뿌리! 그것은 의사가 절대로 처방할 수 없다고 극구 반대를 했던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걸 먹였다고? 대체 언제?’
순간 의사는 자신이 자리를 비웠던 새벽을 떠올렸다. 휙 돌아본 수잔은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이러시면 어쩝니까!”
그런 수잔에게 다가간 의사가 목소리를 억누르며 항의했다.
“뭘 말인가요?”
“바람개비 꽃 뿌리 말입니다!”
의사가 윽박지르듯 말했지만 수잔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양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의사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가 뭐라 말하려던 때였다.
“그게 중요한가?”
라티아를 안고 느긋하게 어르고 있던 클로드가 의사를 봤다.
“내가 깨어났으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새로이 진찰하는 게 우선 아닌가?”
“하오나…….”
“하오나, 뭐.”
클로드가 한쪽 눈썹을 까딱거리며 말하자 의사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어떤 병증으로 쓰러지셨는지도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공작님께선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바람개비 꽃 뿌리를 달여 만든 약을 드시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래서.”
“바람개비 꽃 뿌리를 몇 개 끓였는지, 얼마나 끓였는지, 1회 용량을 어떻게 처방했는지, 그로 인한 몸의 변화가 어떤지도 확실하지 않고요. 그러니 먼저 역학조사를 실행해야…….”
의사가 뭐라고 주절주절 떠들어 댔지만 이제 막 깨어난 클로드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클로드는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궐련을 피운 이유도 강제로 정신을 각성시키기 위함이었다. 물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라티아 때문에 반절도 피우지 못하고 꺼 버렸지만.
요컨대 의사가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말은 지금 다 귀찮을 뿐이란 소리였다.
“모로 가도 황도로만 가면 된다고 하지 않나.”
“…….”
“내가 쓰러졌으니 나의 사람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 그것이 설령 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민간요법이라 하더라도.”
그러니 너무 공작성의 일원들을 추궁하지는 말라며, 클로드가 바람개비 꽃 뿌리 사태를 정리했다.
“무엇보다 라티아가 하는 일인데 내게 나쁠 리가 없지.”
클로드가 그렇지 않느냐며 여전히 제 위에 고양이처럼 얼굴을 콕 박고 있는 라티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어린아이가 한 일이니 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그 이야기를 말해 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을 듯했다.
해서, 의사는 자신의 직업 신념에 벗어나는 일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기실 제가 무시하고 반대했던 바람개비 꽃 뿌리를 처방함으로써 클로드가 깨어났다니 할 말이 없기도 했고.
“바람개비 꽃 뿌리를……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야 머리가 있는 사람이지. 의사 자격증이 괜히 있는 건 아닌 모양이군.”
클로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약간의 조롱이 섞였지만 공작성의 주치의로서 클로드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 사실 처벌 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딱히 의사를 처벌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내가 잠든 동안의 일을 보고 받도록 하지.”
의사가 나가고, 클로드가 기다렸단 듯 옆에 선 헥터와 버틀러에게 말했다.
“그럼 아가씨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수잔이 클로드의 품에 있는 라티아를 데리고 가려고 할 때였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클로드가 제게 안겨 있는 라티아의 등을 느긋하게 토닥이며 수잔을 말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살짝 옆으로 돌아간 라티아의 얼굴을 가리켰다.
“어머나…….”
라티아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클로드의 품에 안겨 최근 들어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얼굴로.
“내가 쓰러진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면서.”
“네…… 공작님을 아주 많이 걱정하셨거든요.”
수잔의 말에 클로드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걱정을 받고 웃다니 철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나 기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여 클로드는 라티아를 품에 안은 채 헥터와 버틀러에게 그간 있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카르시안의 검술 대회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을 가장 애석해했다.
아들의 첫 검술 대회 출전인 만큼 클로드도 무척 기대했으니.
“검술 대회는 또 열리니 너무 상심치 말라고. 참, 우승 트로피는 한동안 아카데미에 장식되다가 가문으로 보내진다더군.”
“음, 트로피 진열대를 하나 만들어두는 것도 좋겠지.”
헥터의 말에 클로드가 라티아의 밀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헥터와 버틀러가 돌아간 후, 클로드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라티아는 그의 품에 안겨 색색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라티아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던 클로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독이라…….’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정말 짐작 가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하물며 그는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너무도 멀쩡했다.
‘정말 독에 당한 거라면 고통이라도 있어야 해.’
무색 무미 무취의 독이 있다는 건 알아도 아무런 고통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독이 있단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다.
게다가 공작성의 주치의는 하이페디움 제국의 독뿐만 아니라, 타국에서 생활하는 지인들에게도 연락을 취해 알아봤다.
‘하지만 결국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
하이페디움 제국은 물론 다른 제국에서도 듣도 보도 못했다며 연구 대상감이라 말한 고통 없는 독. 이것의 정체는 정말 무엇일까?
클로드는 여전히 세상모른 채 잠든 라티아를 내려다봤다.
엎드려 자느라 살짝 눌린 뺨은 여전히 통통했고 그 바람에 벌어진 입술은 아기처럼 오물거렸다. 가장 천진난만한 천사가 잠든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클로드에겐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대체…… 라티아는 어떻게 해독제가 바람개비 꽃 뿌리라는 걸 안 거지?’
처음 라티아가 자신에게 티아나 아메시스트라는 차명 계좌가 있다고 밝혔을 땐 꽤 흥미로웠다. 그 계좌의 주인이 지금 그루안 상단에 위장 취업을 하고 있단 걸 알았을 땐 살짝 놀랐고,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이라 생각하던 때 그것이 루니아 황후의 흰뿔 산을 지켜준 이의 이름이란 걸 깨달았을 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왜 라티아는 일찌감치 바람개비 꽃 뿌리를 대량으로 구매한 거지? 그것도 주기적으로.’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일이겠거니 싶어 놔뒀던 게 어쩌면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고심하던 때,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라티아의 의중을 모르게 되는 날이 오다니…….’
그런데 그날이 너무도 일찍 와 버렸다.
생각해 보면 라티아는 처음부터 어딘가 기묘한 아이였다.
너무도 성숙했고 너무도 현명했다. 어린아이처럼 보이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 몇 번 어설프게 하다가도 이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는 듯 금방 때려치웠다.
그것을 보며 클로드는 라티아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는 어른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한 존재이다. 달리 말하면 어른의 울타리가 없으면 위험하단 뜻이다. 그리고 그녀의 울타리라 할 수 있는 글라델리스 후작가는 라티아를 보호해 주지 못했다.
하여 클로드는 라티아가 한시라도 빨리 어른이 되어 제 한 몸을 지키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라티아는 점점 더 성장해, 지금은 클로드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12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그녀는 벌써 훌쩍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생각을 모르진 않았는데.’
클로드는 고민했다.
라티아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알아내는 게 좋을지, 아니면 티아나 아메시스트 차명 계좌의 존재를 말할 때처럼 기다리는 게 좋을지.
한동안 머리가 아플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