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 * *
다그닥, 다그닥…….
장례식으로 향하는 경건한 마차인 만큼 소박하기에 밖의 소음이 고스란히 들렸다. 그 마차를 탄 이는 시꺼먼 상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었다.
바로 클로드와 헥터.
두 사람은 공작령을 벗어나 황도로 향하는 내내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장례식으로 향하는 중이니 떠드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지만, 두 남자의 머릿속엔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 가장 비중이 큰 생각은 바로 공작성에 두고 온 라티아에 대한 것이었다.
‘라티아는 대체 왜,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황제와 각별한 사이였나?’
‘왜 그렇게 쓸쓸한 표정을 짓는 거야? 그만큼 카르시안이 보고 싶었나?’
젠장, 두 남자는 동시에 이마를 짚었다.
마차를 타기 전 돌아본 라티아의 표정은 기묘했다.
분명 잘 다녀오라며 웃고 있었는데 우는 줄 알았다. 분명 총명함과 희망으로 가득 찬 눈은 건조했다. 그러면서도 라티아는 슬퍼 보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 표정은…… 부모를 잃은 아이나 짓는 건데.’
헥터는 제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해적이었던 그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숱하게 많이 봐 왔다. 그러니 알 수 있었다.?
라티아의 표정에 드러난, 그녀조차 모르는 감정은 부모를 잃은 아이의 두려움과 표출할 길 없는 슬픔이라는 걸.
‘하지만 왜? 라티아의 아버지는 황제가 아니고 글라델리스 후작이잖아. 지금은 클로드고…….’
뭐, 클로드와 라티아처럼 꼭 피로 이어져야만 가족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니 라티아가 어쩌다 황제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라티아가 황제를 아버지라 여겼을 것 같진 않았다.
‘이상해, 이상해…….’
헥터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상한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건가?”
“뭐가?”
“장례식 말이야.”
헥터의 물음에 클로드가 이마를 짚던 손을 내리고 무슨 소리냐는 시선을 보냈다. 헥터가 어느새 보이는 황도의 검문소를 눈짓했다.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늘 활기가 넘치고 시끄럽던 검문소도 쥐죽은 듯 조용했고, 성벽엔 온통 검은 천이 드리워져 있었다.
눈짓을 따라 검문소를 내다본 클로드에게, 헥터가 말했다.
“시체도 없는 장례식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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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장례식은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황제의 장례식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도가 지나쳐 참석한 이들이 중 몇몇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장례식인지, 축제인지…….”
“관을 열지 않으니 장례식이란 실감이 나지 않는 게지요.”
“애초에 이렇게 성대한 장례식은 어떻게 준비한 거랍니까? 듣자 하니 에메르나 황비가 시름에 빠져 몸져누웠다고 하던데.”
“뭐, 언젠가 이리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몇 시간 만에 이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쑥덕거리는 목소리는 조금 커지는 듯했으나 이내 잠잠히 사그라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해 봐야 좋을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맙소.”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 하이페디움 제국의 영광의 길을 닦으신 선황 폐하의 신하 된 도리로 예를 갖추는 것이 마땅하지요.”
이제 레오나르도는 선황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이가 바로 인사를 받고 있는 황태자 제네스였다.
에메르나 황비의 태생, 제네스 말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다들 알아서 불편한 이야기를 삭이고 묻어 두는 것이리라.
제네스는 찾아오는 이들과 일일이 독대하며 인사를 나눴다. 이는 에메르나의 명령이었다.
‘황태자, 모든 손님을 잘 맞이해 주세요. 이 황성의 주인은 이제 황태자이니 말입니다.’
‘칫,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에메르나의 극성 때문에 제네스는 언젠가 자신이 황제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빨리 황제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
제네스는 레오나르도가 안치되었을 관을 바라봤다.?
레오나르도는 좋은 황제였다. 그리고 좋은 아버지였다.
‘비록 나에게 진심으로 살갑진 않았지만…….’
제네스는 사실 레오나르도가 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는 결코 둔하지 않다. 자신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것이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 현명하고 기민하다. 어른의 손길에 기대어 유년시절을 보내야 성장할 수 있는 만큼, 아이는 어른의 사랑을 받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러니 제네스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겉으로는 무척 자상한 아버지지만 그 내면은 그렇지 않다고. 에메르나와 보여 주는 다정다감한 모습도 어딘가 위태롭다고.
그럼에도 제네스는 레오나르도를 진심으로 대할 수 있었다.?
얼마 전, 레오나르도가 제네스를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난 네게, 네가 원하는 사랑을 줄 수 없단다. 너도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겠지. 넌 외로운 아이니까.’
‘…….’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약조해 주마. 난 네게 좋은 아버지는 될 수 없어. 하지만 너와 가장 가까운 어른은 될 수 있다.’
그날, 제네스는 처음으로 레오나르도의 진심이 담긴 쓰다듬을 받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심으로 그에게 안겼다.
그때 레오나르도가 제네스의 귓가에 속삭인 따듯한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했다.
‘너에겐 죄가 없으니까.’
무슨 소릴까, 왜 나에겐 죄가 없다고 하는 걸까, 죄가 있다면 그건 누굴까. 밤새 궁금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런 날이면 제네스는 에메르나를 찾아갔다. 에메르나는 제네스와 함께 자 주지 않았지만 밤에 찾아오는 제네스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수면향을 마시고 자기 때문에, 제네스가 오는 줄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제네스는 늦은 밤 에메르나의 곁에 웅크리고 자다가, 그녀가 깨기 전 자신의 침소로 돌아갔다.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제네스의 약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제네스……?’
수면향을 덜 마신 걸까, 아니면 제가 너무 크게 움직인 걸까, 그도 아니면 굴러가야 할 운명이었을 뿐일까.
제네스가 침대에 올라가자 에메르나가 깼다. 제네스는 무척 당황하여 곧장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에메르나가 붙잡았다.
‘이 어미가 보고 싶어 왔습니까? 이리 오세요.’
기억이 있을 무렵부터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홀려 제네스는 에메르나와 함께 누웠고, 누설하고 말았다.
‘황제 폐하께서요, 제게 그러셨어요. 저에겐 죄가 없다고. 무슨 소릴까요?’
기껏 물어봤지만 에메르나의 품이 따스하여 제네스는 곧바로 잠들고 말았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오늘, 아침에 일어난 제네스는 레오나르도가 아침 사냥을 나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왔단 소식을 들었다.
제네스는 찜찜함을 벗을 수 없었다.
‘지난 일주일간, 어머니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뭔가를 준비했어.’
그리고 오늘, 에메르나는 실의에 빠져 몸져누웠다는 사람치고는 굉장히 무던해 보이는 얼굴로 제네스가 곧 황제가 될 거라 말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조화일까?
알 수가 없어 마음이 답답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또렷한 답을 줬으면 싶었다.
‘아주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
순간 제네스의 머릿속을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산들바람에도 흔들리는 주제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밀과 닮은 머리칼을 가진 여자아이. 수수한 듯 신비로워 사람의 시선을 잡아채 매혹시키는 자수정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총명하던 소녀.
‘……라티아.’
이상하게도 이 순간, 제네스는 라티아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에게 이 복잡한 마음을 말한다면 분명 산뜻한 목소리로 대답을 말해 줄 것만 같았다.
‘그래, 걔도 여기에 왔을 거야.’
제네스는 다른 귀족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클로드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클로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호위라는 명목으로 장례식장에 들어온 외눈의 헥터는 여기에 있는데.
‘대체 어딜 간 거지?’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제네스는 기분 탓이라고 여기며 라티아를 찾아 장례식장을 돌아다녔다.
같은 시각, 제네스가 그토록 찾고 있는 클로드는 장례식 건물의 뒤뜰에 있었다.
“…….”
황제가 죽은 오늘, 모두가 검은 상복을 차려입었음에도 홀로 화려하고 생기 넘치는 연분홍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과 함께.
“무슨 짓이냐고 묻지 않으시는군요.”
얼굴에 망사도 드리우지 않고 봄을 맞이한 꽃처럼 화장한 여인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클로드가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궁금해해야 합니까.”
고저 없는 말이었다. 정말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딱딱한 말에도 클로드의 앞에 선 여인, 에메르나는 황홀감에 젖었다.
‘클로드와 대화를 하고 있어.’
그것만으로 에메르나는 오늘 명을 듣지 않으려 하는 시녀들에게 찻잔을 던지고 그녀들의 머리칼을 잘라가며 치장한 보람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고작 이만한 대화를 하겠다고 오늘 클로드를 납치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헥터와 함께 장례식장으로 향하던 클로드를 눈 깜빡할 새에 소환했다. 에메르나는 그가 크게 동요하리라 생각했지만 딱히 그러지 않아 다시 한번 그에게 매료되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무뚝뚝한 당신을 내게 미치게 만들고 싶어.’
자신에게 푹 빠져 앞뒤 분간 못 하고 오로지 그녀만을 원하고 탐할 클로드. 상상만 해도 온몸이 따가울 정도로 전율이 일었다.
에메르나가 입을 열었다.
“제가 알아요.”
“무엇을 말입니까.”
“당신이 원하는 것이요.”
“우습군요. 지고하신 황비 전하께서 제가 원하는 걸 어찌 아신다고요.”
“그럼 말해 볼까요?”
“…….”
“아론 폐태자의 복위.”
에메르나가 눈을 휘며 말해도 클로드는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 말엔 그도 모르게 움찔거리고 말았다.
에메르나가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뱀처럼 아주 은밀하고도 또 야릇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도와줄게요.”